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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내리교회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7월 첫 예배를 드린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1901년, 1955년, 1966년, 1984년. 머릿돌 4개가 붙어 있는 벽이 교회의 긴 역사를 말해준다. 단출한 한옥으로 시작한 교회는 신자가 늘면서 1901년 붉은 벽돌 건물을 세우고 ‘웨슬리(감리교 창시자) 예배당’이라 이름 짓는다. 이후 개축하며 140여 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펜젤러 비전센터 3층의 내리역사전시관에선 교회의 발전사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교회는 1900년대 초,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에도 중대한 역할을 했다. 조지 존스 목사가 주한미국대리공사와 함께 하와이로 갈 신자를 모집했던 것. 그 결과 1902년 12월 말, 하와이로 향한 102명 이민단 중 50명이 내리교회 교인이었다.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도 한인 감리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 설립, 한국 최초의 목사인 김기범 목사 배출 등 ‘한국 최초’ 타이틀을 숱하게 보유한 교회이기도 하다.
인천제일교회의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다. 1946년과 교육 선교. 인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인천제일교회는 1946년에 지어졌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내리교회보다 60년이나 늦게 지어졌는데, 이유가 흥미롭다.
한마디로 인천은 장로교의 선교 지역이 아니었다가 분단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 개신교 전래 초기, 조선에 온 외국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는다. 교파끼리 지역을 나눠 과한 경쟁을 막자는 것. 이에 따라 오늘날 북한에 속하는 평안도와 황해도는 북장로교, 호남은 남장로교, 인천·충청·강원도는 감리교가 맡게 된다. 그러나 남북 분단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의 많은 장로교인이 인천으로 내려왔고, 이들을 위해 건립된 곳이 인천제일교회다.
교회는 유치원과 학교를 설립해 교육 선교에 앞장섰다. 1947년 무궁화유치원을 시작으로 무궁화공민학교(현 인성초등학교), 보성여중 인천분교(현 인성여중)를 지어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일깨웠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는 다비다 모자원을 열어 피난민과 과부, 고아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옥성당(안드레성당). 1906년 영국인 주교 마크 트롤로프가 지은 성당(교회)은 건축 양식이 꽤 독특하다.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은 팔작지붕(팔(八) 자로 생긴 지붕)을 얹은 한옥이다. 용마루(지붕 제일 높은 곳의 마루) 양쪽의 십자가를 빼면 어엿한 양반집 같은 모습이다.
동서양의 건축 기법을 절충한 건물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성공회가 이국땅의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교회는 길상초등학교의 전신인 진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열심이었다.
교회 안에는 100여 년 전에 쓰던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그 옆에는 2004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새 성전이 있으며, 푸르게 반짝이는 잔디밭과 고풍스러운 교회가 잘 어우러져 사진이 잘 나온다.
“존스 선교사가 마을 땅을 밟으면 세례받는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겠소.” 서당 훈장 김상임이 내리교회 신자 이승훈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훈의 노모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강화도까지 온 내리 교회 목사 조지 존스 선교사는 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깊은 밤, 배 위에서 세례를 한다. 강화도에 ‘선교’라는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마을 사람 몇몇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드리며 1893년, 강화교산교회가 건립된다. 강화도민이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 문물에 큰 반감을 품었던 것은 당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라는 두 번의 외침을 잇달아 겪었기 때문이다.
강화도 북서쪽에 자리한 교회는 고즈넉한 멋이 있다. 입구의 선상 세례 조형물이 교회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기독교를 배척하던 김상임이 훗날 교인이 되어 선교에 앞장섰다는 사실.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가 그의 극적인 삶을 대변한다. 교회 옆 기독교선교역사관에선 존스 선교사의 얼굴을 새긴 부조부터 초창기 교회 모습까지, 강화도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인천제일교회의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다. 1946년과 교육 선교. 인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인천제일교회는 1946년에 지어졌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내리교회보다 60년이나 늦게 지어졌는데, 이유가 흥미롭다.
한마디로 인천은 장로교의 선교 지역이 아니었다가 분단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 개신교 전래 초기, 조선에 온 외국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는다. 교파끼리 지역을 나눠 과한 경쟁을 막자는 것. 이에 따라 오늘날 북한에 속하는 평안도와 황해도는 북장로교, 호남은 남장로교, 인천·충청·강원도는 감리교가 맡게 된다. 그러나 남북 분단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의 많은 장로교인이 인천으로 내려왔고, 이들을 위해 건립된 곳이 인천제일교회다.
교회는 유치원과 학교를 설립해 교육 선교에 앞장섰다. 1947년 무궁화유치원을 시작으로 무궁화공민학교(현 인성초등학교), 보성여중 인천분교(현 인성여중)를 지어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일깨웠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는 다비다 모자원을 열어 피난민과 과부, 고아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옥성당(안드레성당). 1906년 영국인 주교 마크 트롤로프가 지은 성당(교회)은 건축 양식이 꽤 독특하다.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은 팔작지붕(팔(八) 자로 생긴 지붕)을 얹은 한옥이다. 용마루(지붕 제일 높은 곳의 마루) 양쪽의 십자가를 빼면 어엿한 양반집 같은 모습이다.
동서양의 건축 기법을 절충한 건물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성공회가 이국땅의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교회는 길상초등학교의 전신인 진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열심이었다.
교회 안에는 100여 년 전에 쓰던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그 옆에는 2004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새 성전이 있으며, 푸르게 반짝이는 잔디밭과 고풍스러운 교회가 잘 어우러져 사진이 잘 나온다.
“존스 선교사가 마을 땅을 밟으면 세례받는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겠소.” 서당 훈장 김상임이 내리교회 신자 이승훈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훈의 노모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강화도까지 온 내리 교회 목사 조지 존스 선교사는 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깊은 밤, 배 위에서 세례를 한다. 강화도에 ‘선교’라는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마을 사람 몇몇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드리며 1893년, 강화교산교회가 건립된다. 강화도민이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 문물에 큰 반감을 품었던 것은 당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라는 두 번의 외침을 잇달아 겪었기 때문이다.
강화도 북서쪽에 자리한 교회는 고즈넉한 멋이 있다. 입구의 선상 세례 조형물이 교회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기독교를 배척하던 김상임이 훗날 교인이 되어 선교에 앞장섰다는 사실.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가 그의 극적인 삶을 대변한다. 교회 옆 기독교선교역사관에선 존스 선교사의 얼굴을 새긴 부조부터 초창기 교회 모습까지, 강화도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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