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부이아에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두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고, 3년 뒤에 시성되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마르코 3,7-12)
Even the people who had evil spirits, whenever they saw him, would fall down before him and cry out, "You are the Son of God."
말씀의 초대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대사제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직무를 맡으시고 몸소 제물이 되시어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시다(제1독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병고에서, 더러운 영에서 벗어나고 싶어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아 주긴 하셨지만, 아직 당신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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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사제이시자 동시에 제물이 되신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가 날마다 자신과 백성을 위해 바치는 속죄의 제사를 단 한 번에 완전하게 바치셨다(제1독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보자,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 진리의 반대편에서 오히려 진리이신 주님의 신원을 더 잘 드러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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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갈릴래아 호숫가에 모입니다. 당시에는 자동차도 없었으니,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오늘날의 사업가와 같으셨다면, 그 정도의 정성을 들인 이들에게 “나에 대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라.” 하시며 널리 알리기를 종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 7장 24절부터 27절까지를 보면, 두 개의 집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입니다. 둘 다 평상시에는 멀쩡하겠지만,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치게 되면, 모래 위의 집은 무너지고, 반석 위의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비유를 오늘 복음에 대조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께 몰려든 이 많은 군중의 믿음은 마치 모래 위의 집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호소하고 그 어려움이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겪게 될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다면 썰물처럼 사라질 사람들인 것입니다(요한 6장 참조).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고 싶었던 것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어려움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반석 위의 집과 같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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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갈릴래아에서뿐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옵니다.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지요?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 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인생이라는 척박한 ‘광야’에서 느끼는 목마름 때문일 것입니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그들이 안고 사는 온갖 삶의 갈증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갈망하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였고, 그분과 만남은 곧 구원과 해방의 체험이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분을 갈망하며 그분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활이 아무리 풍요해지고, 과학과 의술이 발달했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두렵고 황폐한 광야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외로운 광야의 삶을 달래려고 세상의 거짓 기쁨과 위로 속으로 몸을 숨깁니다. 현대판 더러운 영은 거짓이 진짜가 되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영적 힘을 얻지 못하면 금방 이 더러운 영에 오염되고 맙니다. 거짓을 진짜로 믿고 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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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거룻배 한 척을 제자들에게 주문하십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려고 서로 밀치며 나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배 위로 옮겨 가시어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병이 낫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이 멀쩡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 몸에 손을 대면 무언가 강렬한 힘이 전해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 다투어 몰려들고 있기에 그분께서는 호숫가의 배 위로 옮겨 가신 겁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기적이 있었던 곳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기적이 있었다고 ‘소문만 나도’ 사람들은 찾아갑니다. 호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믿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간접 체험이라도 좋으니 ‘기적의 순간’에 동참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모습입니다. 한 번이라도 뜨거운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결국은 ‘그분의 뜨거움’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의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과 성경 속의 예수님은 같은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외로운 축복
-노희연 수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 무리 속에 함께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된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많은 학생이 “외로워요.”라고 외치고 있다. 혹 다른 사람한테서 인정받고,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러한 물음이 내면의 세계에서 늘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외로움은 대학생뿐 아니라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를 망라하고 인간의 내면세계 깊이 새겨져 있다.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인간 사이의 소통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면서 인간 내면의 가치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으니 우리 학생들이 외롭다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그러나 진정한 외로움은 축복의 빈자리다. 인간한테는 친구도, 연인도, 남편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근원적 외로움이 있다.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군중도 아니요 무리도 아니다. 오히려 혼자이기에 풍요로움이 될 수 있는 외로움인 것이다. 쇼핑을 하고 놀러 가고 누군가를 만나 수다를 떠는 등 어떤 활동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빈자리가 있다. 하느님은 그 빈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은 무리를 떠나 축복의 외로움을 만들어 보자
얼마 전 전철을 타고 어디를 가고 있는데 제 바로 앞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앳된 모습을 띄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면서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마디에 끊임없이 욕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 말들이 마치 평상시의 말인 것처럼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많은 욕을 섞어 말을 했습니다.
이 학생들이 쓰는 욕은 겉으로 보이는 앳된 모습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앳된 모습에서는 깨끗한 말, 사랑 가득한 말이 나와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저의 예상과는 달리 입에 담기에 더러운 말, 싸움을 지금 당장 해야만 할 것 같은 말이 나와서 정말 보기가 싫더군요.
하긴 저 역시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학창 시절이 잠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는 왠지 욕을 해야지만 멋있어 보이고, 친구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지요. 그렇게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자신이 추해 지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추한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던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의 입에서 추한 말만 계속 나온다면 그때에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 즉 아름답고 깨끗하고 사랑 가득한 말을 해야 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앞에 패배를 인정하는 소리이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비밀을 폭로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확실한 예수님의 신원이었고 우리 모두도 해야 할 고백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 인간들이 말하고 있지 않고,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고쳐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은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더러운 영을 통해서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의 말을 막아버리고 대신 우리 인간들의 올바른 고백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주님을 찬미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하나 되어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아리스토텔레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양승국신부-
<신명나는 교회공동체 건설을 위해>
언젠가 큰 행사를 치룰 때의 일이었습니다. 3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대성당 제대 위에 서서 성당 안을 내려다보니 대단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안내하고, 행사를 치루면서 다들 얼마나 정신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단한 인파에 주최측 입장에서 얼마나 흐뭇했던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보니,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상상이 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 뒤를 따라 ‘큰 무리’가 따라다녔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무리’는 어느 정도의 군중이었을까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때로 만 명, 때로 2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따라다녔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한번 잡아보기 위해 몰려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때로 너무나 많은 군중들, 집요하게 달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는 것을 아닐까’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군중들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피곤에 지치고, 때로 잠시라도 쉬고 싶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말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엄청나게 몰려드는 수많은 ‘고객’들로 인해 하루 온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예수님과 제자단의 모습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열정을 지니고, 얼마나 간절한 마음과 함께 우리 교회로 달려오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너무나 ‘썰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와 있는 사람들마저도 그저 의무감에, 마지못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얼마나 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얼마나 큰 호감을 주고 있습니까? 상처 입은 사람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너무 좋아, 우리 교회 사목자들과 봉사자들의 모습에 크게 매료되어 자발적으로, 기쁘게 우리 교회를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우리와 한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오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마음 한 몸이 되어 행복한 표정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사목적 서비스를 제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김기현신부-
월요일에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오전 10시쯤에 신자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출발하려고 했는데, 제가 가는 본당의 총무님께서 ‘바다가 얼어서 배가 안 뜬다... 1시나 되야 배가 뜰지 안 뜰지 알 수 있다..’ 는 말을 하셨습니다. ‘바다가 언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바다가 어는 일은 외국에나 있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사이동 하는 곳의 바다는 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지역이 강이랑 만나는 지점이라 염분이 낮아서 어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도 잘 얼지 않는데 요번 한파 때문에 몇 십 년 만에 바다가 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꽁꽁 언 건 아니구요. 배가 다니기 어렵게 얼음이 둥둥 떠다닙니다.
그래서 1시정도까지 성당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인사 이동하는 본당의 총무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착장에서 5분 전에 갑자기 방송을 하고 배를 한 번 운행했답니다. 배를 운행하고 하지 않은 건 선장 마음인가 봅니다. 그러고는 운행을 마감해서, 배를 못 타고 본당에 하루 더 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새로 부임해 온 신부님과 몇몇 청년들과 잘 놀았지만, 짐을 실어주고 날라줄 신자 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는데, 그날도 배가 뜰지 안 뜰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쪽 신자 분들의 말에 의하면 오후가 되 봐야 운행을 할지 안 할지 알 수 있는데, 적어도 한 번은 배를 운행할 거라고 해서 일단 선착장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상황은 어제보다 더 나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3~4시간 정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2시쯤 배를 운행한다는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전 본당 신자 분들과 인사를 하고 제가 갈 섬 본당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 본당이 바로 영종도 옆에 있는 신도 본당입니다. 섬이긴 하지만, 도시와도 가깝고 배도 많이 다니는 육지 같은 곳입니다. 이틀 동안 지내면서 ‘정말 조용하다. 공기 좋다. 전망 좋다.’ 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요. 조금 걱정되는 것도 있습니다. 아예 나갈 생각을 안 하면 괜찮겠지만 치과 치료나 피정이나 다른 모임 때문에 나가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가려면 배 시간이나 기상 상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저녁 6시가 넘거나 안개가 끼거나 얼음이 얼면 육지가 코앞인데도 나가지 못합니다. 섬에 사는 이상 배에 의존하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 갈 수밖에 없겠죠.
우리 사람이 사는 조건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제한과 제약, 그리고 한계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부족함이나 공허함,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게 될 텐데요. 그러면 자연히 나의 부족함이나 공허함, 그리고 필요를 채워 줄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그 무언가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이고 하느님 나라겠죠.
그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고 통하고 연결되기 위한 ‘배’ 가 되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섬에서 사는 사람들이 ‘배’에 의존하여 도시와 연결된 생활을 할 수 있듯이, 우리도 하느님 나라와 연결된 삶을 살고 언제가 그 나라로 이동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 부족하다. 용서가 필요하다. 부족함이 없는 평안함을 원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고 싶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 의지하고 예수님을 통해 건너갈 수 있어야겠죠. 오늘 하루, 예수님을 통해서 기도하고 예수님께 의지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레지오 회합 후에 신자분들과 커피를 마시는데, 작년에 세례를 받으시고 어부이신 할아버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에게 이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일러주셨잖아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예수님처럼 제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많은 지시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마음에 눌어붙은 이기심
- 황세현-
오늘 복음에 치유를 바라며 밀려드는 사람들과 이를 피하시려고 거룻배를 마련하시는 예수님이 대조를 이룹니다. 지난해 어느 성지에 갔을 때 신부님께서 참기도를 하지 않고 구복신앙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며 하신 강론이 떠오릅니다. 좋은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수험생 부모님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성당 안을 꽉 메워 밖에서까지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정은 저에게도 다를 바 없습니다. 치유를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처럼 저의 이익을 위해서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고 있는 저와 그로 인해 제 마음에 이기심이 철석 눌어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종종 사회봉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남의 이목을 생각하고 할 때도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득 송유미 님의 시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가 생각납니다. ‘물만 마시고도 컵은 씻어두는데 내 마음은 씻지도 않고 사용해 온 탓에 더럽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 없다. 그릇은 한 번만 써도 뼛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마음은 비우지 못하고 닦아내지 못하고 있다.’ 는 취지의 글귀가 귓전에 맴돕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양적으로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지만, 내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와 교회는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예수님 정신에 따른 참된 길을 가야겠습니다.
비럭질하시는 우리의 대사제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저는 히브리서에서 얘기하는 대사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감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의 사제직 수행에 대해서는 부끄럼을 느낍니다.
특히 오늘의 히브리서가 저에게 감동을 주는데 구원자이자 중재자이신 대사제를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자이신 분이 중재자 되심에 대해 우리는 자주 아무 감동 없이 지나칠 수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감동적인 낮춤이요 사랑입니까? 이는 프란치스코가 그토록 감동했던 그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신 것, 인간을 만드신 분이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린 것의 그 감동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풀어서 얘기하면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완전한 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당신을 통하여”가 맞지만 개신교 성서는 “당신을 통하여” 대신에 “당신을 힘입어”로 번역합니다. 이는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구원하실 수 있는 엄청난 힘의 소유자이고, 그러기에 그 힘센 손가락을 까닥만 하셔도 우릴 구원하실 수 있으시고 우릴 구하시기 위해 수고스럽게 이 땅에까지 내려오실 필요조차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사제는 끌어올릴 힘이 없으셔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모셔가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고마우십니까? 끌려가도 그만인 비천한 우리를 귀인처럼 모셔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셔가기 위해 우리의 대사제는 내려오시고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시고 구원자이신 분이 중재자가 되시며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이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잘못을 빌고 살려 달라고 빌고 도와 달라고 빕니다.
우리는 욕처럼 “빌어먹을 놈!”이라고 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빌어먹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럭질하는 존재가 되신 것이고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하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대사제께 “우릴 위해 비천해지소서!”하고 기도하는 셈입니다.
"샘솟는 기쁨"
-이수철신부-
중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중심이신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삶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 안에 자리 잡은 정주의 삶일 때 샘솟는 기쁨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극명히 드러내는 표지가
바로 지금 거룩한 이 성전에서 거행되고 있는 미사입니다.
사제의 존재이유는 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미사 은총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퍼뜩 떠오른 주제가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중심이신 주님을 찾는 복음의 장면입니다.
예나 이제나 하느님을 찾는 인간입니다.
바로 이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느님 찾는 기쁨을, 행복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세상 그 어디도 없습니다.
이 복음의 장면에서 예수님이 빠져버린다면
온통 혼돈과 허무의 어둠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잊고 우상과 환상에 빠져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모두 인양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주님은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중심이신 주님을 찾아 만날 때
죽음은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뀝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바로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으며,
늘 살아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히브리서가 묘사하다시피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우셨습니다.
하여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바로 이 성전미사를 통해 그대로 깨닫는 진리입니다.
바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보이는 사제를 통해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는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요.
바로 중심에서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미사 장면을 압축한 듯합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 받은 병자들이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 중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을 만나
영육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빛이신 주님 앞에 숨어있을 수 없자
뛰쳐나와 엎드려 주님을 고백하는 더러운 영들입니다.
새삼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치유할 분은 주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떠나 방황할 때 파생되는 온갖 질병들이요,
더러운 영들에 포로 된 삶입니다.
오늘도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은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치유, 구원하시어 건강한 영육으로 살게 하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제들을 위한 옛 기도문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강론을 마칩니다.
사제는 물론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문으로 삼아도 은혜롭습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의 성심 속에 (사제)우리들의 안식처를 마련하시어
아무도 감히 (그들)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날마다 주의 성체를 (만지는 사제들)모시는
우리들의 손을 깨끗하게 보존하시며,
주의 성혈을 마시는 (그들)우리의 입술을 항상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주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의 표를 받은 그들의)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마음을 언제나 순결하고 결백하게 보존 하소서.”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을 닮아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 겸손해 질 때
충만한 주님의 현존에 샘솟는 기쁨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본다면
- 이창걸-
나는 암을 치료하는 의사인데 명성이 높아서 많은 환자가 몰려오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암환자를 치료할 때 암 자체만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환자들은 암을 진단받는 순간부터 충격의 연속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불안·우울·두려움 때로는 분노에 아파한다. 이런 환자들과 관계를 잘 맺으려면 환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환자가 어디에 사는지(치료를 매일 한 달 넘게 다녀야 하므로 가까운지 확인), 자녀는 몇인지, 누구와 살고 있는지, 그리고 직업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술이나 담배를 많이 했는지, 살면서 스트레스는 많지 않았는지, 그리고 종교는 무엇인지 물어본다. 이 정도면 환자의 주변 환경에 대해 대략 알 수 있다.
이 사적인 정보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필수적이어서 어떻게 접근할지 또 치료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집이 멀거나 지방이면 병원에서 입원하거나 가까운 협력병원에 입원하도록 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경우라면 가능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사회사업실을 연결하기도 한다. 암으로 인한 불안이나 우울증이 있으면 정신과 도움을 받도록 하고, 영적으로 지쳐 있다면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성직자와 연결하거나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래서 초진 환자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방사선 치료만 하면 되지 무슨 호구조사를 꼼꼼히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다음부터는 환자와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물론 방사선 치료에 대한 설명과 검사한 사진을 일일이 보여주며 설명하다 보니 환자들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느덧 초진 환자 뒤에 기다리는 환자들이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진료실 밖 복도에 환자들이 밀려 장사진을 이룬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소리도 없고 환자들은 진료 후 나갈 때는 행복해한다. 많이 기다렸지만 자신도 충분히 설명을 듣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진료는 9시 이전에 시작해 오후 1시가 넘어 끝났다. 많은 환자를 본 것 같지만 실은 25명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2008년 1월 한 신문사에서 전국의 암환자 동호회 회원을 대상으로 친절한 암전문의를 선정한 바 있는데 전국 방사선 종양학과에서 내가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무슨 상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들이 나를 평가했다는 데서 무엇보다 큰 상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유명세
-김연희 수녀-
제가 담당하고 있는 ‘우리성서모임’의 연간 계획에 외부강사의 특강을 넣습니다. 3년의 교육기간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공부하면서 정해진 말씀봉사자의 강의에서 벗어나 좀 더 폭넓게 성경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강생들뿐만이 아니라 교구 신자들에게도 문을 열어놓고 특강의 기회를 공유하게 합니다. 강사가 국내에서 잘 알려진 이라면 각 본당의 여러 행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참석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게 바로 유명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리가 꽉 찹니다. 인터넷이나 광고가 없던 그 시대에, 입과 입으로 전해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파다했습니다. 그 유명세로 큰 무리가 사방에서 그분께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점점 늘어나서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치유를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에 관한 참된 이해에 이르지 못한 군중을 봅니다. 오직 더러운 영들만이 두려움에서 터져나오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에게 침묵을 명하시는 예수님의 엄하신 명령을 귀담아들으면서 주님께서 가시는 십자가 길과 벗을 위한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거리
-전삼용신부-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주락적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생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 기생이 군수를 너무 사랑했던 터라 오로지 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군수에게 촛불을 주며 자신의 온 몸에 화상을 입히도록 합니다. 또 그 군수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누구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미국에서 한 때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책이 40주간 이상 베스트셀러로 올라있었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너무 사랑 (too much loving) 증후군’을 다루었던 책입니다. ‘너무 사랑 증후군’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너무 불안해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대상을 잡아두기를 원하는 증세입니다.
알코올 중독증이나 마약 중독증 환자 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합니다.
저도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손과 발을 잘라 못 움직이게 하고 집에 가두어놓는 끔찍한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랑병은 결손가정과 혹은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불목한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 사랑이 모자랐던 사람은 커서 만끽하는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따라서 사랑하면서도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착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사랑과 집착은 거리에서 차이가 납니다. 집착은 두 사람이 꼭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고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말씀도 선포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또 옷에 손만 대면 모든 병이 고쳐지는 것을 알고 누구나 예수님을 건들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그들이 당신께 덮쳐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이기를 원치 않으시고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이 위에서 말한 사랑병, 혹은 집착과의 차이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있어도 이위일체는 없습니다. 즉,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둘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녀 두 사람이 춤을 춘다고 합시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춤을 출 수 있을 때는 음악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둘은 각자의 춤을 추다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그러다가 서로 떨어져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떠나가지 않게 잡아놓고 둘을 하나로 엮어줍니다.
저는 사랑을 생각할 때 항상 기찻길을 생각합니다. 기찻길은 서로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만나지 않고 평행을 이룹니다. 서로 조금씩 좁아지거나 벌어진다면 그 길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 기찻길 위에 서서 목적지를 바라보면 사실 둘은 만나지 않지만 멀리 볼수록 둘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기차가 그 위로 지나가면서 기차를 통하여 둘은 정말 한 몸이 됩니다.
어떠한 관계든 같은 하느님을 지향하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려하지 않고 단 둘만이 서로 하나가 되려한다면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병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둘만 서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돌려 함께 가야할 목적지를 바라봅시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서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어드립시다. 둘은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삼위로 한 몸을 이루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양승국신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혼자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드문드문 자리 잡고 앉아있던 ‘꾼’들이 그날따라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서둘러 낚싯대를 두 대 드리웠습니다. 수시로 떡밥을 갈아주며 ‘대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때마침 호수 건너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로 새떼들이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훈훈한 봄바람에는 그윽한 야생화 향기가 묻어있었습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홀로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그림 같은’ 오후였습니다.
호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강이나 바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호수 특유의 맛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갈릴래아 호수 역시 그랬습니다. 언젠가 직접 제 눈으로 확인했던 갈릴래아 호수,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랜 여독이 눈 녹듯이 풀릴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시나 광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초원이며,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같은 호수며, 여러 종류의 야생화며, 대추야자 나무...마음속이 다 환해졌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태와도 같은 장소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신 장소도 갈릴래아 호숫가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회했던 만남의 장소도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당연히 거룻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래아 이 지방 저 지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호숫가에 묶여있던 배에 올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군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때로 너무나 많은 인파에 피곤해지셨던 예수님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피해가셨습니다.
언젠가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걷는 시범도 보여주셨습니다.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골란 고원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과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면 심한 기류의 이동으로 금방이라도 잡아 삼킬 듯한 큰 파도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큰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위해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셨지요.
오늘 마음으로나마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로 여행을 떠나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금 갈릴래아 호숫가, 푸른 풀밭 위에 앉아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오전입니다. 내 주변에는 키 작은 꽃들이 지천입니다. 때마침 호수로부터 미풍이 불어옵니다. 멀리 배 위에는 예수님께서 서계십니다. 산들 바람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들아.”
“너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사랑, 내 귀염둥이들이란다.”
“안심하거라. 평안하거라. 너희는 구원 받았단다”
“이제 그만 내려놓거라. 이제 그만 떠나보내거라.”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왕은 못된 불한당을 석방해버리면 어쩌나,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 또 어쩌나 싶어 밤낮으로 걱정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집무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와 한탄했지요.
“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로 그 순간 악마가 나타나서 이러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말씀드리자면 당신한테 그런 특권을 주기는 식은 죽 먹기지.”
“딴 데 가서 알아보시구려. 악마의 속셈이라면 나도 잘 알아요. 악마는 교환 조건 없이는 아무것도 거저 내주지 않는 법이죠.”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댁한테는 정말로 특별히 예외로 해줄게.”
“왜 나한테 그런 선심을 쓴단 말이오?”
“그냥 재미삼아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난 어디까지나 악마인 만큼 순전히 심술이라고나 할 까? 그렇지만 안심하라고. 교환 조건으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원한다면 서약서를 써줄 수도 있어.”
왕은 이튿날 나랏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신하의 재판을 앞두고 있었지요. 유죄인지 무죄인지, 그 신하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에게 서약서를 받고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의 그 신하가 유죄인 것은 물론이고 들키지는 않았다뿐이지 죄 지은 신하들이 수두룩했으며, 자기가 아끼고 믿었던 측근들조차 질투와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면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왕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능력이 과연 왕을 행복하게 해주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지릅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내가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누구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베드로에게는 칭찬의 말을 하실까요?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아직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는 놀라운 능력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말들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가 행복의 길로 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숨기기도 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주시지 않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몫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이 최선이며 바로 나를 위한 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뒤에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진정한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남의 능력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내 능력만으로도 행복하기에 충분합니다.
맛과 서비스
-구경국 신부-
음식집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다른 집들은 파리를 날리는데 유독 어느 한 집만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입소문을 탄 덕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입소문을 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교통이나 통신 상황을 감안한다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기 위해 몰려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입소문이 났다 해도 일시적인 문전성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것에 걸맞은 음식 맛과 서비스가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인기도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르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가르침이라는 음식이 맛깔스럽고, 병자들까지 척척 고쳐주시는 서비스가 확실히 뒤따르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한때는 입소문을 타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모여드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이 줄어든 것을 보니 음식 맛과 서비스 중 하나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음식이 예수님의 시대와는 달리 요즈음의 세태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워봅니다만 아무래도 서비스의 부족, 다시 말해서 교회의 모든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삶이 그다지 복음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악령에 대한 나의 생각
-김현숙 수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악령이 소리 질렀다. 악령의 속셈은 무엇일까?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복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당연하다고, 그분을 기능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을 사랑하고 희생해야 하고, 선생이니까 당연히 학생을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삶이 그렇게 당연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철든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이다.
때로는 미사를 소홀히 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강론으로 신자들을 야단치려는 사제도 있고, 수업 준비는 제대로 하지 않고 학생들의 잘못만 들추며 적당히 수업 시간을 넘기려는 교사도 있다.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자녀의 성질만 나쁘게 버려놓는 부모도 있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는 돈벌이 의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역할을 순간순간 성실하게 잘해 내는 것만큼 큰 성인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닐까!
철들면서 부모님이 힘겨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주신 것이 감사하고, 나의 자매들이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수도생활의 완덕을 지향하며 도반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고맙고,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매일매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동료 교사들이 고맙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신앙의 절대적 가치와 권위를 지켜나가며 세속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신영성의 도전 앞에서 서로 고뇌하면서 일치하려는 사제들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하는 세상을 거슬러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상을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있어 감사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마다하지 않았듯이 수많은 악령의 잡다한 외침에 흔들림 없이 묵묵히 예수님만을 바라볼 줄 아는 하느님의 아들딸이 있음에 감사드린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돈보스코의 이상향, 프란치스코 드 살>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저희 수도회의 주보성인이신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일명: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던 제 자신을 깊이 반성하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앙리 코위아니에 저, 안응렬 역, 돈보스코미디어, 2001)를 서고에서 꺼내들었습니다.
책을 펴드는 순간,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의 분량에 기가 많이 꺾였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돈보스코 성인께서 왜 그리도 이 성인을 존경했었고, 또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주보성인으로까지 모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던 저는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생애 각 단계마다 널려있었던 숱한 걸림돌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더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좌절과 낙담의 순간에도 꾸준히 희망했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그의 낙천성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낙천성은 돈보스코에 이르러 예방교육의 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의 온유와 겸손, 성공적인 사도직, 그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그의 낙천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비록 고통스럽고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잘 되어 나가리라고 믿는 그의 낙천성은 후에 돈보스코의 생애 안에 철저히 재현됩니다.
1593년, 26세 되던 해 프란치스코 드 살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네시의 사제로 서품됩니다. 안네시의 수석사제로 열심히 활동하던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오는데, 샤블레 지방의 선교책임자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샤블레 지방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칼빈 교도들의 땅이 된 곳이었습니다.
샤블레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드 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오래 전 이 지역은 칼빈 교도들에 의해 접수되었고, 전체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 수는 백 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일부 개신교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 사이에 나타난 그를 우상숭배자나 거짓 예언자로 몰아세우곤 했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첫 번째 강론은 어느 예배당에서 개신교 목사가 일차로 설교를 마치고 나간 뒤에 시작되었는데, 잔뜩 겁을 집어먹어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던 몇 명의 천주교 신자들뿐이었고, 그 뒤로 호기심에 찬 몇 명의 칼빈교도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모두 합해서 10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한겨울에도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선교를 위해 눈이 내린 시골길을 끝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동상에 걸린 그의 발은 자주 부어터지곤 했었는데, 그로 인한 통증이 너무 심해 어떤 날은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귀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서 돈보스코 낙천주의의 뿌리를 읽습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피로감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냉대와 급진적인 개신교도들의 위협으로 가득 찬 그 험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희망을 않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샤블레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불가능은 없다고 여기며, 언젠가 자신의 노력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알찬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있어 낙관주의는 곤란한 상황 앞에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지’하고 포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윽고 8년 후에는 샤블레 지역 주민 거의 모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한 뒤, 그 이후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는 것, 그것이 프란치스코 드 살의 낙관주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도 낙천적인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막중한 삶의 십자가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그 이면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을 읽고자 노력합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처럼.
인간이기에 매일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시련이나 좌절, 실패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꾸준히 나아갑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처럼.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이 몰려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등 당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중풍병자, 나병환자, 마귀 들린 자 등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이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다니고 또 고쳐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과 어울려 다니시고 먹고 마시는 등의 당시 사회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헐벗고 굶주린 자를 보살피시고,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해 주시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또 자주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갈 것을 약속하고 다짐하였습니다. 모두를 사랑으로 보살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이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보살피고 살아갑니다. 또한 어디에서건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힘들 때 치유자이시며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탁합시다.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예수께 믿음으로 의탁합시다. 주님은 언제나 지치고 쓰러진 우리를 위로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그분을 향해 눈을 돌려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김상조 신부 -
오늘복음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 왔다고 합니다. 요르단강 건너편 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넘어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나를 넘어 서야 하고, 내가 정해놓은 경계를 허물어야 하고 나의 원칙을 허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경계를 허물지 않고서는 경계선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요르단강 건너편 사람들까지도 예수님께 몰려드는 상황은 좋은 징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안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라도 한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셨다”그리고 악령들까지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모두 잘못된 혹은 왜곡된 추종의 모습들입니다. 병이 고쳐지지 않으면 언제라도 예수님을 욕하면서 떠날 사람들이고, 악령들도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해 줌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높은 신분과 그에 걸맞는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라는 유혹을 건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저런 사정 때문에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보호하시고 일정한 거리를 두시면서, 악령들린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아주 엄중하게 타이르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몰려오는 군중들을 피하는 모습은 아주 이례적이고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고, 그래서 어떤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그분처럼 사는 것이 비록 힘들지라도 참된 가치가 있고 그것만이 바른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까?
그분처럼 산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 처럼 대중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가치있고 바른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병을 고치고 또 배고픔을 해결하고, 그래서 복음서 어딘가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거절하시고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울 때,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의 응답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잘못된 혹은 지나친 과욕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청이든지 하느님이 못들어 줄 청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비록 기도하고 청하는 나에게는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려면 덩달아서 변해야 할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 하느님도 전혀 손쓸 여지가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악령들처럼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실제 그 속마음은 그러니 당신의 그 능력을 가지고 나를 위해 봉사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추종, 거짓된 진실, 그래서 수고의 삶을 거부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의 반듯한 제자, 반듯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도 그분처럼 인간적인 인기나 인간적인 위로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예수님의 자상한 마음
-이철구신부-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으시고, 하시는 일마다 신비롭게 보였기 때문에 많은 군중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래서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군중을 일일이 다 만나주시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한마디 말씀이라도 전해주기 위해 제자들을 시켜 배 한 척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찾아 온 군중을 만나시려는 예수님의 따스하고 자상한 마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의 사목생활은 예수님처럼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찾아오는 신자들을 피하기도 했고, 교우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준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진정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자상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유 루시아 수녀 -
◆예수님의 명성이 알려져서 군중이 많이 모여듭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기적의 사목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려고, 또 그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옵니다. 명성이 절정에 달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계속 당신의 일을 하셨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시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던 장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은총을 계속 받습니다.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나는 스무 살이 넘어 세례와 견진을 받았고 은총을 계속 받으며 늘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최의정 신부-
여러분도 ‘물부족국가’란 말을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국제연합 국제인구행동연구소(PAI)에서는, 전세계 국가를 조사해 물이 부족한 나라를 분류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물부족 국가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연간 강수량이 세계 평균 강수량보다 조금 많은 편이긴 하지만, 국토의 70%가 급경사로 된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게다가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되어 있어서 한철에 집중적으로 내린 비가 그대로 바다로 흘러가는 한편,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1인당 강수량은 세계 평균의 12%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물부족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물이 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돈을 물쓰듯 쓴다’는 말도 이제는 옛날 말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돈을 주고 물을 사서 마신다는 말이 옛날에는 우스개 소리같았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듯이, 돈을 주고 공기를 사서 마신다는 말도, 지금은 우스개 소리같겠지만, 현실이 될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물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 몸의 70%를 구성할 만큼, 물은 중요한 존재이고, 사람이 출생할 때에도, 어머니 태 속의 양수에 들어 있다가 출생합니다. 또한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를 살펴보면, 모두 물이 풍부한 강을 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은 건강과 생명, 풍요로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말씀에도 물은 생명과 풍요로움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47장에는 성전에서 샘솟는 물이 강(江)이 되어 흘러내리면,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치고, 짠 사해(死海)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에제 47, 8-9)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서 그 장면을 상상해본다면, 예수님께로 몰려든 군중이 여러지방에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를 기점으로 해서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는 남쪽 지방입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은 동쪽 지방입니다. 그리고 띠로와 시돈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그야말로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갈릴래아에서도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또한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死海)의 차이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살아있는 호수이고, 주변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반면, 사해(死海)는 문자 그대로 죽은 호수이고,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사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생명의 호수 갈릴래아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로 가시어 거룻배 한 척을 띄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병고에 시달리다 못해 사방에서 몰려와서, 생명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주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입니다. 생명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간절히 찾던 군중들처럼, 한때, 우리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로써 새 생명을 주셨고,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러한 생명을 나눠야겠습니다. 성전에서 샘솟는 물이 흘러 흘러 강을 이루고 사해의 물마저 단물로 바꾸듯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흘러들어가야 할 생명수가 되는 일. 바로 세례성사로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의 몫이요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양승국신부-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는 교회>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바리사이들과의 쓸 데 없는 논쟁에 예수님께서는 신물이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를 떠나십니다. 회당을 떠나 한적한 갈릴래아 호숫가로 물러나십니다.
제자들 생각에 ‘이제 좀 쉴 수 가 있겠구나, 여유가 생기는 구나’ 했었는데, 웬걸, 도시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호숫가로 밀려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호숫가 주변은 거의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라(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옛 유다왕국),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 이두매아 사람들,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 북서쪽에 위치한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군중의 특징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의 은혜를 입고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밀고 난리였습니다. 그러다보면 ‘상주 참사’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자 일행은 무척 당황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전장치 겸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십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척을 구해보라고 이르십니다. 거룻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밀어 육지에서 약간 떨어트려놓으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 가라앉힌 상태에서 차분하게 치유활동을 재개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 차 성당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길 바랍니다.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영하 20도 가까이 되는 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 문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운 날씨에도, 그 신 새벽에 집을 나서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참 구도자의 얼굴을 만납니다.
발걸음 옮기기조차 힘겨운 분들, 100미터 걷기 위해 10분 이상 걸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당 한번 왔다 가면 진이 다 빠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찾아오십니다.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제들과 수도자들, 봉사자들은 그 옛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사람들이 원 없이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마셔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길 바랍니다.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말끔히 치유 받고 춤을 추며 떠나가던 사람들처럼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영혼 역시 깨끗이 치유되어 기쁜 얼굴로 교회를 나서기를 바랍니다.
혹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고향에 가셔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하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명절이면 기차를 타고 부모님의 고향에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린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를 드리면서 저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를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은 제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누구 아들입니다’라고 말을 하면 그제야 사람들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면 ‘아이구 고놈 속 빼닮았네’라는 정감어린 시골말투와 함께 제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던, 어쩌면 오늘날은 잊어져가는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처음에는 저를 모르셨지만 저의 부모님의 이름을 통하여 제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누구라는 것이 부모님의 이름을 통하여 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 오늘 복음을 보면 악령들이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소개 됩니다. 마치 우리가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듯이, 오늘 예수께서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불림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아들이라는 단어는 직계관계만을 뜻하지 않고 어떤 집단에 예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아들’, ‘바빌로니아의 아들(에제 23,17)’, ‘시온의 아들(시편 149,2)’, ‘예언자들의 아들(2열왕 2,5)’, ‘사람의 아들(에제 2,1)’ 등과 같은 표현을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아들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평화의 아들(루까 10,6)’, ‘빛의 아들(루까 16,8)’ 등과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지요. 이처럼 오늘 복음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특성과 그분께 속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칭호는 예수님에게만 붙여진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왕들도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하였고, 로마의 아우구스티노 황제 이후에는 모든 황제들의 비문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붙여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들이 사용한 칭호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즉 오늘 예수님께 붙여진 칭호는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 당신이 물리쳐야 할 적으로부터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적대 세력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본질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적대세력을 통하여 인정 받으셨기에 우리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드러냅니다. 일상 속에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잊지 말며 우리도 주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모습을 본받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 합시다. 아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 !!!
- 이찬홍 신부-
복음에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며 띠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많이 몰려왔다”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가르침과 여러 가지 놀라운 행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연중 1. 2주간을 살펴보아도,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시고, 가나안 여인을 낫게 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참된 회개를 불러일으키시고, 나자렛 회당에서는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이외에도, 베싸이다의 소경, 성전에서의 앉은뱅이, 회당에서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는가 하면, “에파타”라는 말로 귀머거리를 치유해 주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치유의 기적들과 가르침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로 몰려왔습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과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요약하고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의 전체적인 삶을...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은 많고, 실제로 그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인 마르 3, 7-12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 이 복음 말씀을 연상케 하는 사건은 오늘날 여러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루르드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발현 이후 오늘날 년 간 400만 명이 방문합니다.
루르드라는 그 촌구석에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타고 오고, 또다시 기차타고 오는 것입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1882년부터 1905년까지 총 2,000여 건의 기적적인 치유가 발생했으며 그 이후로도 현재까지 기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의,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의 놀라운 손길과 그에 따른 변화를 목격하기 위해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의 핵심은 후반부 곧, 함구령을 내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고 거기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면서도 그것을 당신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드러내는 광고 효과는 엄청날 텐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슴 속에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러하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칫 소문만 무성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의 변화, 치유에만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모든 효과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에서 오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얻어 누리는 결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행렬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매 시간 마다 이곳저곳에서 미사가 이어집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 순간, 미사가 있고, 그 미사에서 이루어지는 말씀과 성체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그 말씀과 성체라는 두 양식으로 우리는 양육되고 하느님께 나아가기에 기적과 치유가 바로 이곳,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놀라운 신비에... 말로 다 표현 못할 은총과 사랑의 나눔에 함께 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진정한 사랑이라면
- 강인봉-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마음입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고 그 사람의 손 한번 잡아보는 것이 무한한 행복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온갖 나쁜 병을 고쳐주고 어쩌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으로 가까이 가려 애를 쓰게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을 밀쳐내기도 하고 소중히 모셔야 할 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연예인을 보면 무척 피곤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 휴식도 취해야 하고 다음 일정을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한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대중을 무시할 수도 없고 또 그들이 있기에 자신의 위치가 지속됨을 잘 알기에 때로는 내키지 않아도 팬들을 위해 웃음을 짓곤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이 편하고 행복해지도록 배려하는 일일 겁니다.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하셔서 그들이 자신을 밀쳐내지 않도록, 어느 한 사람에게 편중되지 않은 공평한 가르침을 주시려 애쓰십니다. 받기보다 주는 사랑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닐지요?
얼마 전에 참석한 결혼식 주례사가 떠오릅니다. "서로 덕 보려 하지 말고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숨겨진 이기심은 없는지 잘 헤아려 볼 일입니다.
얼마 전 대형 할인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고 아주 한산하더군요. 저는 필요한 물건을 들고서 계산대에 섰습니다. 그런데 계산대 직원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워 보였습니다. 아마 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많이 힘든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늦은 시간까지 일을 참 열심히 하시네요. 정말 보기 좋아요.”
그러자 그 직원의 얼굴이 금세 화색이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웃으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 직원은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계산만 하고 그곳을 지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기분이 별로 안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 한 마디 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것을 얻게 되었지요. 물론 시간이 낭비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감사의 응답을 들었던 것은 물론, 나의 한 마디로 직원의 표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큰 기쁨도 얻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데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잘 한 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잣대로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우리들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들의 창조 목적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기 보다는 힘을 빼앗는 존재가 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여기서 힘이 되어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힘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분명히 힘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전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꿋꿋하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면서 함구령을 어기지요.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이 주님을 만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끄는 우리, 그래서 참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작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올바른 것을 찾기 전에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라도 설사 몇 번의 시도를 해야 할지라도 용기만은 잃지 말라. 실망을 맞아들일 준비는 하되 원하는 것을 포기하진 말라.(알버트 슈바이처)
욕심
-조명연신부-
지금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저의 홈페이지에는 하루 평균 천 명에서 천오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원 수는 현재 8천 명을 넘어 9천 명을 향하고 있지요. 사실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했을 때는 정말로 인원이 조촐했습니다. 방문하는 이들이 몇 명 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문득 그 당시가 더 재미있었고 따뜻함을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원 수가 많아질수록 말도 많아지고 충돌도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외적인 번창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대신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홈페이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우리들이 되길 원하셨던 것은 아닐까 싶네요. 놀라운 행적과 말씀으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명예와 재물을 갖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사실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아셨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그 욕심들을 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욕심은 주님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김찬선신부-
오늘은 2시도 안 되어 잠이 깼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회의를 하여 몸이 피곤한 때문인지 바로 일어나지지 않아 얼마간 잠자리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제가 보이고 제가 가엾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 어제 머리를 많이 쓰는 회의를 한 뒤의 건조함과 공허감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자기 전에 읽고 잔 오늘 복음 때문일까?
내 마음이 더 따듯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이 더 생동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느낌을 갖고 일어나 오늘 복음을 마주 하니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수도원에 매일같이 미사 드리러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강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그 새벽에 미사 드리러 오셨습니다. 저는 우리 집에서 미사를 드리니 찾아 갈 필요가 없었지요. 찾아 가는 것, 몸이 가지만 몸이 가기 전 마음이 찾습니다. 그러니 찾아 감에는 몸과 마음의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몸이 찾아 갈 필요가 없으니 마음의 찾음이 그리 열렬하지 않습니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이 그리 뜨겁게 찾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간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강사를 찾아 가시는 신자들을 보고 좋은 강의를 들으러 가는 우리 형제들을 봐도 나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고 와서 그 느낌을 얘기하고 우리 카페에 그 영화 감상이 올라와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 영화 괜찮은 영화일 거라 생각이 들어도 굳이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작년 “워낭 소리”처럼 누가 표까지 사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가고, 또 가서 보면 감동을 받겠지만 아직까지 갈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작년 “워낭 소리”를 보고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聖事的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위대한 침묵”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튼 수도원 성당에 성체가 모셔져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찾아 어디 갈 생각이 없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축복인 것 틀림없지만 微動도 않으니 感動도 없는 것은 아닌가, 몸으로 찾지 않으니 주님을 찾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하게 되는 새벽입니다.
기적, 상처받은 마음의 반응
-이중섭 신부-
공생활 동안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많은 기적을 행하여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야 했던 상황은 인간적인 가능성이 고갈된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신앙을 고백할 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처럼 기적 이야기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상대방에게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은 비로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곧바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나? 이 사람이 기적의 은혜를 입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만일 이 사람을 고쳐주면 이 사람이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당신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놔둘 수 없는 그분의 상처받은 마음의 즉각적 반응이었고, 아울러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건의 표징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인기를 끌기 위한 것도 아니요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하느님의 나라가 이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행복` 없인 못살아요
-문화순 수녀-
오늘날 현대인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어디 재계발 지역은 없는지, 몸짱을 만드는 곳은 없는지, 넘쳐나는 찜질방과 온천장·헬스 클럽·게임방 등이 현대인들이 모여드는 실상을 잘 말해준다. 작은 본당에서 잠시 도와주던 때다. 매일 성체조배 오시는 한 자매님이 하루는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그 자매님은 글자를 깨칠 수 없는 장애인이라고 했다. 친정에서는 불편 없이 지냈지만 시집가서 얼마 후 글자를 모르는 것이 들통나 남편의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중에 첫아이를 낳았는데 뇌성마비 장애아였다. 그러자 시집 식구들도 대놓고 구박하기 시작했다. 자매님은 갈 곳이 없어 성당을 찾았고 세례를 받았는데 성당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데 둘째, 셋째, 넷째까지도 뇌성마비 아이를 낳았고 냉대는 더욱 심해져 결국 집에서 쫓겨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수녀님, 저는 첫아이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얻었고, 둘째아이 때문에 사랑의 열매를 얻었고, 셋째아이 때문에 겸손의 열매를 얻었고, 넷째아이 때문에 인내의 열매를 얻어 너무 기뻐요”라고 했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장애 아이 넷을 파출부하면서 키웠는데 아이들이 일고여덟 살이 되면 그냥 천당으로 갔단다. “수녀님, 제가 키울 능력이 없으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더군요” 하면서 그뒤로 딸 셋을 더 두었는데 착한 딸들이라고 얼굴이 환해진다. 막내를 가졌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낙태시키라고 했지만 숨어숨어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낳았다면서 “지금 그 아이 없으면 저는 못살아요” 한다. 재롱을 얼마나 떠는지 ‘행복’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자매님은 “수녀님, 저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 너무 좋아요” 한다. 만약 하느님이 보였다면 돈 있고 힘있고 잘난 사람들이 먼저 성당을 다 메워서 자기같이 글자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사람은 성당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란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니 늘 성당이 비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가 가고 싶은 때 성당에 들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었다. 어느 곳이나 성당이 텅텅 비어 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비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인가? 그 옛날 예수님 주위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도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병을 고치고 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군중들은 “우리가 식인종인가?” 하며 모두 떠나갔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가? 진정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살아 계신 그분 곁으로 가는가, 아니면 이익이 생기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생명과 거리가 먼 곳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
1. 오늘의 루가 복음은 불쌍한 병자와 마귀들린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고 전해 줍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신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엘리트층들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이들은 죄인, 창녀,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쿰란 공동체 수도자들의 회칙도 보면 그 당시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대했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 미친 자, 무지한 자, 마음이 헷갈리는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귀머거리, 철부지 등 이러한 자들은 그 누구도 공동체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인간들, 곧 죄인, 창녀, 세리,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고,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이들이 당신께로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를 위한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신은 예수님이 당신이 자라난 나자렛 마을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다음의 대목을 펴서 읽으신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2. 특히 예수님은 죄인들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것을 원하십니다. 예1)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오점은 영구히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을 다시 찾아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자의 마음(루가 15,4-7), 잃었던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주인의 마음(루가 15,8-10),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루가 15,11-32)은 주님께서 우리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3. 이러한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복음을 전해들은 군중들은 앞 다투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복음을 전해도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뭘까요? 예2) 윌리엄 바클레이(영국의 성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 곧 교리에 설복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는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누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미 영세를 받은 교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랑의 표양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또 교우가 아닌 여러분도 비록 이미 영세 받은 교우들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더라도 어차피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처음부터 죄인들의 공동체였음을 이해하시어 주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이회진신부-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온갖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칭찬을 받아 자신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죠.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상황은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예수님 곁으로 몰려듭니다.
그래서 그분을 서로 밀쳐댈려고 하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서로 예수님께 은총과 축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명성에 이용하려고도,
어떤 이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어떤 이는 육체적, 물질적 이득을 취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이리저리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발견됩니다.
성당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수도자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제라는 이름으로
신앙인의 삶을 흔들어 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서 떨어져 서 계십니다.
그들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당신을 흔드는 것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
그들로부터 떨어져 당신의 삶이 오직 하느님의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군중 속의 고독이 아버지 하느님 앞에 겸손하신
그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흔들어 대고 올려주고 추겨주면 자신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잊고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어 착각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주님은 당신의 말없는 겸손으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것이고,
나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이며,
나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 되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 이름이 아니라면 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저의 부끄러운 교만을 살피시고 용서하소서. 아멘”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 이기양 신부-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에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고,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이며,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옵니다. 더러운 악령들까지도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피하시고, 악령들에게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3,12)고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알리지 말라는 명령은 여기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후 병자들에게 자기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마르1,34)
또 마르코 1장 40절 이하에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보이도록 하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왜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하려 하시고 또 악령들에게는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 온 나라에 소문이 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알리지 말 것을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싶은 병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지려고 들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많은 군중들이 찾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
또 수없는 기적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하시고는 그들을 떠나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백성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빵에만 매달릴 것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이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여러 기적을 목격했지만 기적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기대로 시작한 접근은 끝까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요.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결국 예수님은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망하여 흩어져 버립니다. 이러한 한계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극복되고, 성령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성당을 처음 찾을 때는 하느님을 알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호기심과 막연한 기대심으로 출발해서 차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적인 호기심과 기대는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것에 실망하거나 게을러져서 냉담을 하게 되지요.
때로 믿음보다 인간적인 것만을 좇아 바리사이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군중들보다도 더 무섭게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서려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인간적인 것보다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사이들이나 어리석은 유다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함구령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기대나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분은 본당 신부도, 수녀도, 사목위원도 아니고 또 직책이나 재력, 신분도 아닌 오로지 하느님 한 분뿐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강영구신부 (2003-01-23)-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을 때에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며 띠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몰려왔다. ..더러운 악령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소리질렀다.(마르 3,7-8.11)
온 세상을 두루 밝히는 큰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이 갈릴래아, 유다, 예루살렘, 에돔과 요르단강 건너편, 띠로와 시돈까지 방방곡곡에 두루 비치고 있다. 생명의 빛, 자비의 빛, 희망의 빛, 진리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추자 수많은 사람들이 빛을 향해 나왔다. 그리고 그 따뜻함과 밝음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은 치유를 받아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생명의 불이 꺼져가던 사람들은 새 생명의 씨앗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살던 사람들도 희망을 불꽃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로 인해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빛의 근원이 어디일까? 예수 자신에게서 그 빛이 나오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의 빛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한 사람 예수, 그의 존재의 근거는 하느님에게 있다. 하느님이 아니면 예수는 없다. 온전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으로 충만한 예수,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예수는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다. 태양이 있어서 밤 하늘에 밝게 떠오르는 달처럼, 하느님의 빛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고자 하는 사람이다. 스승 예수와 같이 자신을 비워 하느님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그래서 예수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一明)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 왔다>(마르3,7-1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띠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7-8절)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는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몰려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 모여든 지방을 보면 모두 7개지방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는 남쪽 지방이고 요르단 건너편은 동쪽 지방이며 띠로와 시돈 근처는 북쪽이며 갈리래아 지방은 남쪽 지방이다. 7개 지역은 완전한 숫자이며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지역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몰려 온 사람들은 어느 한 지방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온 사람들이며 이들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이 왜 몰려왔을까? 그냥 몰려 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많이 몰려왔다.”고 하였다. 무엇을 보았는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
예수님의 존재는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활동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런 예수님의 활기찬 활동을 보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새로운 비젼을 보았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존재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시다. 예수님의 활동은 희망을 주고 생명력을 불러 일으키고 당신께로 몰려 오게 하는 동기를 유발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만이 모든 이에게 똑같은 희망과 느낌을 주고 삶에 자극을 준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 오는가? 인간은 누구나 병자들이거나 더러운 영이 들린 존재익 때문이다. 자신이 병자가 아니고 더러운 영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니 그것은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중풍병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누구나 병자이고 더러운 영이 들렸기 때문에 그것을 치유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하신 예수님께 몰려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주 작은 공동체이다. 마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존재이다. 그 공동체에 비해 그분께 몰려 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작은 공동체는 병든 이들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하고 필요한 공동체이다. 그 어디에서도 고쳐줄 수 없는 병을 고쳐주어야 한다.
이 작은 공동의 한 중앙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앞으로 건설될 하느님의 나라의 모퉁이 돌이시다. 그 위에 작은 공동체가 건설될 것이며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는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켜주어야 할 공동체이고 그것이 그들의 일이고 사명이다.
오늘날 이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병든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어야 하고 또 그 사람들을 고쳐주는 곳이어야 한다. 과연 오늘 우리 교회는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오게 하는 능력 있고 매력적인 교회인가? 병든 이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이 교회에 와서 치유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병들고 더러운 영이 들린 이 세상 한 가운데에 존재하지만 아무러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병든 이들이 치유 받기 위해 왔다가 아무런 치유의 능력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가고 왔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돌린다.
오늘 날 얼마나 교회에 나오는가? 보통 3분의 1정도이다. 그러니까 1000명 신자라면 300명 정도 나온다. 그것도 수도권이니까 그렇지 시골 본당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도 나이 드신 분들이고 젊은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가 이런 사정인데도 뚜렷한 대책이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고 특별한 대책도 없다.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병든 이들은 다른 곳을 찾아가고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로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기본적인 인간의 모습을 상실한 병든 이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에 대한 책임은 교회에도 있다.
과연 오늘 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가?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가? 과연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올 만큼 매력적인 힘을 갖고 있는가? 오늘 사람들의 하느님은 교회가 전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아파트나 증권 또는 부동산에 만들어내는 하느님이 그들의 하느님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리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가기 때문이다. 나의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나는 어디로 몰려가야 하는가?
교회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커다란 비젼은 가지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또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양떼를 인도해야할 사제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할 교회의 생명이라고 하는 수도자들조차도 자신의 사명을 다 하고 있지 못하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자들은 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하는데 복음을 읽지 않는다. 오늘 우리 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지도 못하고 보여주지 못하고 인도해주지도 못하는 교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순절 특강이다 대림절 특강이다 하고 장을 마련해놓으면 신자들이 얼마나 올까 하는 것부터 걱정해야할 처지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배부른지 모른다.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하는 이나 말을 듣는 이가 힘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가야할 곳은 다시 예수님께로 몰려 가야 한다.
그분에게서 치유받고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고 희망을 발견해야한다. 즉 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