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구용(阿諛苟容)
[요약] (阿: 언덕 아. 諛: 아첨할 유. 苟: 구차할 구. 容: 얼굴 용)
남에게 아첨하며 구차스럽게 얼굴을 꾸미는 행동을 말하는데, 자신의 이익을 따라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행동에 쓰임. 우리 속담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
[유사] 아유첨녕(阿諛諂佞), 투합구용(偸合苟容).
[출전]《맹자(孟子) 등문공장구 하(滕文公章句下)》
[내용] 이 성어는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하(滕文公章句下)에 나오는 말인데, 경춘(景春= 맹자의 제자는 아님)이라는 사람이 맹자(孟子)에게 대장부(大丈夫)에 대해 물었다. 이에 맹자가 대답했고, 이에 대해 주희(朱熹= 朱子)가 해석한 맹자집주 권6(孟子集注卷六)에 보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춘(景春)이 말하였다.
"공손연[公孫衍= 전국 시대 위(魏)나라 출신 합종론(合縱論)의 변사(辯士)]과 장의[張儀= 위(魏)나라 출신 연횡론(連橫論)으로 유명(有名)한 변사(辯士)]야말로 진실한 대장부(大丈夫)가 아닌가요. 한번 노(怒)하면 제후(諸侯)가 두려워하고, 편안히 있으면 천하가 조용하지 않습니까?"
맹자(孟子)가 말했다.
“이들이 어떻게 대장부(大丈夫)가 된단 말인가? 그대는 예의(禮義)를 배우지 않았는가? 장부(丈夫)가 관례(冠)할 때는 아버지가 명(命)하고, 여자가 시집 갈 때는 어머니가 명(命)하는 것이니, 갈 적에 문에서 보내며 훈계하기를 '네가 시집가서는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남편의 뜻을 어기지 말라'고 하나니, 유순한 것으로 바름을 삼는 자는 부녀자(婦女子)의 도(道)이다.” [이하 생략]
孟子曰 : 「是焉得爲大丈夫乎? 子未學禮乎? 丈夫之冠也, 父命之 ; 女子之嫁也, 母命之, 往送之門, 戒之曰 :『往之女家, 必敬必戒, 無違夫子!』以順爲正者, 妾婦之道也.
[맹자집주; 주희해석]
관을 머리에 더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여가는 남편의 집이다. 부인이 남편의 집으로 시집감으로써 귀라 한다. 夫子는 남편이다. 여자는 사람을 따르니 순히 함으로 바른 도를 삼는다. 대개 두 사람(공손연, 장의)은 아유구용(혀끝으로 아첨하고 구차하게 용납하는 일)하여 권세를 절취하였으니, 이에 첩부가 순종하는 도요, 장부의 일이 아니다.
景春曰:「公孫衍、張儀豈不誠大丈夫哉?一怒而諸侯懼,安居而天下熄。」〈景春,人姓名。公孫衍、張儀,皆魏人。怒則說諸侯使相攻伐,故諸侯懼也。〉孟子曰:「是焉得為大丈夫乎?子未學禮乎?丈夫之冠也,父命之;女子之嫁也,母命之,往送之門,戒之曰:『往之女家,必敬必戒,無違夫子!』以順為正者,妾婦之道也。〈加冠於首曰冠。女家,夫家也。婦人內夫家,以嫁為歸也。夫子,夫也。女子從人,以順為正道也。蓋言二子阿諛苟容,竊取權勢,乃妾婦順從之道耳,非丈夫之事也。〉
孟子集注卷六作者:朱熹滕文公章句下
[蛇足1] 진(秦)나라 2세 황제 때 박사로 임용한다는 조서(待詔博士)를 기다리고 있던 숙손통(叔孫通)이라는 사람은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난 소문을 듣고 2세 황제가 반란이라며 노하자 반란이 아니고 쥐새끼 같은 도적이라고 아첨을 하여 목숨구하고서 고향 설현(薛縣)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항량(項梁)의 반란군이 투항했다.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패하고 죽자 초회왕(楚懷王)을 따라갔고, 회왕이 의제(義帝)가 되어 장사현으로 옮기게 되자 이번에는 항우(項羽)를 섬기게 되었다. BC 205년에 유방(劉邦)이 제후들의 군대를 이끌고 팽성(彭城)을 공격하자, 한군(漢軍)에게 투항했다.
유방이 한(漢)나라를 세우자 공신이 되고 한나라 조의(朝儀, 조정과 군신 간의 예의 거동에 관한 규정)등을 만드는 등 부귀영화를 누렸다.
[蛇足2]여포(呂布; ? ~ 198); 삼국지(三國志)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에서 후한(後漢) 말기의 군웅(群雄) 가운데 가장 무용(武勇)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여포. 또한 삼국지(三國志)에 주(註)로 인용되어 있는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민간에서는 그가 탔다고 전해지는 적토마(赤兎馬)와 함께 "사람 가운데는 여포, 말 가운데는 적토마(人中呂布 馬中赤兔)"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던 인물이지만 절개가 없으며 물욕이 많아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아유구용(阿諛苟容)을 보자.
처음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 ?~189)의 가신(家臣)⤅ 정원(丁原)을 죽이고 동탁(董卓, ?~192)의 수하가 됨⤅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초선貂蟬)을 미끼로 동탁을 죽임⤅ 이에 반발한 곽사(郭汜), 이각(李傕)에게 패⤅ 원소(袁紹, ?~202)에 합세 했다가⤅ 장막(張邈, ?~195)에 의지하였다가, 다시 하내(河内)로 가서 장양(張楊)의지⤅ 다시 유비(劉備, 161~223)에 의지하였다가 유비의 본거지인 하비(下邳, 지금의 江蘇省 邳州市)를 빼앗고⤅ 원술과 손을 잡고 조조(曹操)에 맞섬.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徐州)를 공격하자 여포는 하비성(下邳城)에서 조조의 군대에 포위되어 3개월 동안 농성전(籠城戰)을 벌였지만 결국 사로잡혀 처형됨.
[蛇足3]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첫댓글 왜요, 요즘도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의도에 어느 곳에 가면 입질하는데서 요리저리 붙는 사람이 많답니다.
‘朝三暮四’도 모르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가요. 이리저리 눈치 보는 사람이 안 되에야 하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