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풍성한 삶은 열보다 하나다,
소 주 제: 생명. 사랑. 포도나무비유
날자 및 분류: 240303낮 설교 창 조 의 말 씀
성 구: 요15:4-8
저 자: 정 헌정 목사 http://cafe.daum.net/changcho
[본문]요 15:4-8.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현재 사극 드라마에서 고려거란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거란이라는 나라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민족이다, 싸워서 빼앗고 갈취하고 모든 보급품은 자신의 나라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싸워서 착복하여 군사의 보급품을 현지 조달한다, 거란은 고려를 집어삼키고 고려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어 군사들도 충당하고 식량이나 보급품도 조달하려하고 있다, 거란은 그래서 가만히 있는 민족이 아니다 거란은 가만히 있으면 분란이 나고 스스로 자폭하는 민족이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서 모든 보급품을 조달한다, 식량도 군사들도 마찬가지다, 고려가 이 전쟁에서 거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땅은 빼앗기지만 모든 식량과 사람은 그곳에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급품을 충당하지 못하도록 태우거나 없애는 일이 중요하다,
1812년6월26일 나폴레옹군대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와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폐한 이유가 나폴레옹군대의 진격은 빠른 반면에 보급품이 그것을 따라 올 수 없었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는 모든 보급품을 남겨두지 않고 후퇴를 했기 때문에 군사들의 배고픔과 말들의 사료가 충당되지 못하여 그 싸움은 나폴레옹이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과 나폴레옹군대가 그 전쟁에서 패전할 수박에 없는 이유는 보급품이 그들의 실력만큼 뒤 따라주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요사이 산에 가면 고로쇠니 가래수니 하는 물을 나무에서 빼먹는 경우가 많다, 팔기도 한다, 봄이 되기 전에 나무는 땅에서 물을 빨아 올려서 온 나뭇가지가지마다 물을 충분히 공급한다, 그러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가지들이 물을 공급하여 새로운 싹이 뜨고 생명이 되살아난다. 이처럼 모든 전쟁이나 나무까지 보급로가 열려 보급품이 도달해야 만이 살아갈 수가 있다, 그래서 보급품이 잘 조달될 때 비로소 우리의 몸도 나무도 전쟁도 이겨 낼 수 있다,
우리들이 몸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요 15:4-6..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밖에 버려서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님이 포도나무라 그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모든 공급 즉 물이나 영양도 생명도 이어갈 수 없다 따라서 예수안에 붙어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눅15장을 보면 세 번째 비유에서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간청을 한다, 아버지가 살림을 나누어줬다, 둘째 아들은 그 유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모두 낭비했다, 그리고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은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에 독립을 부르짖으며 자유를 자신의 욕망에 채우기 위해서 갔으나 그의 생명은 아버지를 떠날 때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둘째 아들에게 재물이나 생명에 조달해 주는 조달청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며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려 했지만 이 세상은 둘째 아들에게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평생 공급 책인 아버지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옴으로서 비로소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회복하고 먹을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리를 비로소 찾게 된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 돌아왔기 때문이다, 생명을 잃어버렸던 아들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옴으로 아들이라는 신분도 회복되고 아버지의 후계자라는 권세도 주어졌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나님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하면 이루리라 라고 성경에서 이루어 주겠다가 아니라 이미 이루리라 라는 그것은 자연법칙이며 당연한 순리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기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 가,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보면 자신의 처지에 낙심하며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하는 내 미래는 깨어지고 시간도 많지 않다, 답답하니 불안하고 망막하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시선을 세상으로 향하지 말고 자신의 지금의 꼬라지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 시선을 두며 소망을 하나님께서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의 환경이. 처지가 탕자의 신세와 같은 꼬라지라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오직 아버지 품으로 처참한 모습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는 기쁨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말씀을 성경은 선포한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작은 아들이 집으로 향할 때 아버지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췄다,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고 시간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기다렸고 거리가 멀어서 잘 알아볼 수 없는 거리인데도 아버지는 아들인 줄 알아보고 뛰어오셔서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포한다,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다윗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향한 마음을 이렇게 호소한다,
시 18:1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평생 도망자의 신세로 살았다고 하였다, 과언은 아니다, 거의 15년을 사울 왕에 의해서 도망 다니며 살았고 이스라엘 땅에 더 이상 숨을 수 없어서 블레셋 땅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 미친 척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향하는 시선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시던 날에 고백하기를 시편18편을 시로 찬양한다, 나의 힘이 되진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 말씀을 뒤집어보면 나의 힘은 나으이 공급책은 하나님이시니 나는 쓰러질 수 없고 질 수 없고 좌절과 낙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쓰러지지 않는 한. 나는 왕성하다는 비유법이다,
언제나 찾아오셔서 자신에게 힘을 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다,
세상의 모든 신들은 사람들에게 치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치성을 드리고 사람이 자신의 모든 몸과 물질로 정성을 다하여 희생하며 섬겨야 하는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온 정성과 마음과 몸을 드리라고 하시지 않고 신이 사람을 위하여. 우리를 위해서 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신이 있다니 정말 우리가 믿을 만한 신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은 그 신을 믿기로 했다고 고백한다,
롬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32-34.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