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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날개로
출 19: 1-6
먼저 서로 환영하는 순서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자녀들 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이 시간 같이 은혜받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독수리 날개로’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훈련시키시는 과정을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고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모습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왕이라고 불립니다
. 그래서 독수리는 확실히 다른 새와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폭풍우가 불어 닥치면 일반 새들은 폭풍우를 피해 숨는데 비해 독수리는 오히려 폭풍우를 향해서 힘차게 날아올라갑니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 바람을 타고 더 높이 날아올라서, 구름 위에서 폭풍우가 치는 아래를 바라보며 유유히 날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길이가 1m이며, 날개를 쫙 펴면 3m나 되는 대형 새입니다. 세찬 날개로 최고 높이 5000m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시속 200km로 빨리 난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나무 꼭대기나 절벽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새끼를 훈련시켜서 성숙시키기까지 3-4년 걸립니다.
새끼 독수리가 자라서 날 때가 되었는데도 둥지 안에서만 놀고 게으름을 피우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발로 붙잡고 하늘 높이 올라가 아래로 떨어뜨려 버립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날개로 재빨리 받아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다시 떨어뜨립니다. 어미 독수리는 이렇게 새끼 독수리를 떨어뜨리고 받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결국 새끼 독수리를 높이, 빠르게 날 수 있는 강한 독수리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셨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광야에서 훈련시키시고 연단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신명기 8: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동안 광야에서 독수리 훈련을 시켜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하는 것처럼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축복받을 그릇으로 아름답게 빚어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1.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본문 5-6절을 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질문은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하다가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 마저도 자기가 확실한 답을 말하지 못하겠으니까 “너 자신을 알라”고만 말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예수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무엇이고 생년월일은 언제고 주소는 어디이고 자기 부모는 누구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하는 현실적인 면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육신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믿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눈에 보이는 현상인 육신적인 답변에 더하여서 본질적인 답변, 영적인 답변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12절에서 답변해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여러분을 부르시고 예수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이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의 주인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양육시키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성도들을 책임지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양육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분명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올라가는, 성공하는 인생을 사시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아멘!
어미 독수리는 자기 새끼 독수리를 새 중의 왕으로 키우기 위하여서 엄격한 훈련을 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으로 잘 키우기 위하여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보호해주시고 광야학교에 보내서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십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민수기 9: 17절에 보면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구름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멈추고, 구름이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고난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기도 하고 성공의 산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때로는 배고프고 추울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배부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더욱 소망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런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한 시가 시편 23편입니다. 여러분들 모든 잡념을 버리고 눈을 감고 제가 들려드리는 시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평안이 물밀 듯이 밀려올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이제 눈을 뜨십시오. 계속 주무시지 마시고 저를 다시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맛있는 꼴을 먹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주셔서 목마른 우리들에게 맑은 생수를 마시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우리 구주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주셨듯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꿈과 희망이 있는 소망의 항구로 인도해주시며 마지막 종착점인 천국까지 무사히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아멘!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훈련을 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독수리는 높은 나무 꼭대기나 절벽에 둥지를 틉니다. 이 둥지에 알을 낳고 알이 부화하여 새끼가 태어나면 독수리 암수는 정성스럽게 새끼를 키우는데 이 새끼 독수리들이 점차 몸집이 커지고 날 때가 되었는데도 날려고 생각하기는커녕 밖으로 나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자기 날개에 태우고 하늘높이 날아올라가서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살려고 퍼득퍼득하며 날개짓을 해보지만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미는 재빠르게 날아서 공중에서 떨어지는 새끼를 날개로 받아 보호해줍니다. 이런 강한 훈련을 통하여 새끼 독수리로 하여금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독수리 훈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게으르고 나태하게 지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수영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난 뒤, 자신의 피눈물 나는 훈련 과정을 글로 썼습니다. 한번은 그가 수영장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팔에 기브스를 하고 쉬고 있는데 코치가 자신을 수영장으로 데리고 가더니 팔은 기브스를 했지만 발은 멀쩡하니 발로 수영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영장으로 자신을 밀어 넣더니 아예 올라오지 못하도록 수영장에서 올라오는 사다리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빠져 죽지 않으려고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발로 헤엄을 쳤습니다. 이렇게 한 15분쯤 지나자 코치가 그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는 당장 코치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자신은 발로 수영하는 진짜 수영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숨을 건 훈련을 통하여 다시 거듭났고 결국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다들 남 다른 큰 절망과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새끼 독수리들이 공중에서 떨어질 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습니까? 앞이 캄캄하고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 부모가 미워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 독수리는 이런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 일생 동안 마음껏 푸른창공을 날아다니며 하늘에서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새들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현재의 상태가 어렵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아픕니까? 그렇다면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연단시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크게 축복하시고, 건강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일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크게 사용하시고 축복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요셉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 강한 훈련을 통과한 후에 축복받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교는 장교훈련을 받고 사병은 사병훈련을 받습니다. 장교훈련이 사병훈련보다 훨씬 더 길고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을 잘 받으면 훌륭한 장교가 되어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훈련에서 땀 한 방울이 전쟁에서 피 한 방울과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질병으로, 사업의 부도로, 각종 사고로, 자식들의 문제로, 기타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리하여 이런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고 죄악을 씻게 하여 축복받을 그릇으로 만들어서 축복을 주십니다. 교회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일꾼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용광로에 들어간 금이 여러 차례의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순금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하여 많은 연단을 받고 정금같은 믿음을 가진 축복받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들에게 유익이요, 축복의 예고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통과 어려움과 환난이 닥칠 때 낙심하지 말고 “아!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더 큰 축복과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독수리 훈련을 시키시는구나”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충성하고 순종하고 헌신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날개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다가 제대로 날지 못하면 재빠르게 아래로 날아가서 새끼가 다치지 않도록 날개로 받습니다. 훈련은 시키되 새끼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믿는 자들이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연단과 훈련을 시키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혹시 믿음의 날개를 펴지 못하더라도, 찬송과 기도를 하지 못하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사랑과 위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병들었으나 죽지 않게 하십니다. 넘어졌어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피할 길을 주십니다. 다운은 당해도 KO는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4절에도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다치지 않도록 재빨리 날아가 날개로 받습니다.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또한 어떤 대적이 위협하고 공격해도 철저하게 보호합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아래 품고 보호하는 것을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들도 자식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 성도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에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태양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씨에 독수리 새끼들이 헉헉거리면서 더위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갑자기 새끼들 머리 위로 그늘이 생기더니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더위에 죽을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시원한 그늘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새끼들은 금방 장난을 치고 떠들며 신나게 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쫙 펴더니 새끼들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끼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놀고 있는데 어미 독수리는 그 새끼들을 위하여 하루 종일 날개를 펴서 시원하게 해주고 계속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적군과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병들어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만나를 내려 굶어 죽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돌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부르고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31장 5절에서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하셨나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안전케 하십니다.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 무서운 세상입니다. 부모가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버리는 세상입니다. 자식이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를 버리는 세상입니다. 특히 요즈음 버려진 늙은 노인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일평생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을 함께 하자고 하던 부부들이 많이 헤어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아내가 남편을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함께하시며 늙어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천국까지 인도해주시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시편 121편 7-8절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아멘!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1.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훈련을 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날개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어린 독수리가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독수리의 날개를 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과 연단을 이기고, 믿음의 날개를 펴고 축복받는 성도가 됩시다. 독수리가 그냥 독수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훈련을 통해서 강하고 힘센 독수리가 되는 것처럼 광야에서 하나님은 독수리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제사장의 나라로 거룩한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모든 삶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받듯이 우리도 인생의 광야학교에서 독수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은 훈련을 받은 후에 누릴 우리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욥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우리들도 때로는 혹독한 훈련을 받기도 하지만 이런 혹독한 독수리 훈련을 통과한 후에는 욥처럼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의 인생도 역전이 될 것입니다. 축복의 대로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의 인생에 인생역전이 시작되었고 이미 축복의 대로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 믿음으로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책임져주시고 형통케하여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복된 만남
출 18: 1-12
우리는 가족 가운데 태어나 가족과 함께 살다가 가족의 배웅을 받고 죽게 됩니다. 인생은 가족 구성원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삽니다. 그런데 어떤 가족은 참으로 불행한 만남을 가지는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이 원수처럼 살아갑니다. 무거운 짐이 되어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부모와 자녀 등 친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작년에 하루 평균 72건 발생했다고 합니다. 친족 대상 범죄는 작년에만 2만 6천 118건이나 발생했다고 합니다. 지난 3년간 친족 대상 범죄는 2006년 2만 7천 459건, 2007년 2만 6천 821건, 2008년 2만 6천 118건이었다고 합니다.
올해도 지난달 말까지 1만 6천 701건이 일어났으며 이중 살인 사건도 171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작년에 친족 대상으로 살인(228건), 강간(44건), 강도(30건), 방화(317건) 등의 강력 범죄도 619건이나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족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가족 개념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황금만능 주의 사고가 지배하다 보니 패륜범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가난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20대 그룹 절반이 총수 일가가 형제의 난을 겪었답니다. 어마 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 때문에 형제들이 재산 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정 윤리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가장 기본 구조인 가정이 파괴되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한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납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떤 관계를 가져야 복된 만남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그의 가족의 행복한 만남을 통해 가족과 복된 만남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를 본문 말씀을 통해 교훈 받고자 합니다. 올 추석에 가족들을 만났을 텐데 어떤 만남이 가족과 복된 만남일까요?
1. 복된 만남은 가족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는 만남입니다(1-6).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모세에 대하여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애굽에 임한 여호와의 10대 재앙(7:14-12:30)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 홍해 도하 사건(14장)을 들은 것입니다. 쓴 물을 달게 만든 마라의 사건(15:22-26)을 들은 것입니다. 광야의 음식 만나와 메추라기 먹은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16장).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만든 르비딤 사건(17:1-7)을 들은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건(17:8-16)을 들은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승리하게 하고 민족을 구원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만날 마음을 가지고 모세의 부인 십보라와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모세를 만나기 위해 광야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가족이 모세를 만나로 왔다고 전갈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바로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홍해를 건너다 중간에서 빠져 죽었습니다. 마라의 쓴물로 백성들이 원망하자 다시 백성을 쳐 죽였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먹이지 못해 백성들이 다 굶주려 죽었습니다. 르비딤에서 목말라 백성이 돌로 모세를 쳐 죽였습니다. 아말렉과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장인과 가족이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부인과 자식들을 데리고 왔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순간 순간 위기이고 한 시도 긴장을 멈출 수 없는 삶이었지만 사위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공한 것입니다. 사위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과업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제 딸과 손자들을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데리고 온 것입니다.
모세는 그 동안 하나님의 소명, 민족 구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값비싼 개인적인 대가를 지불한 사람입니다. 이산 가족이 된 보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가족을 만났습니다. 이런 만남이 가족과의 복된 만남입니다. 불행한 만남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만나는 복된 만남입니다. 우리도 복된 가족과 복된 만남을 지속적으로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든지 가족으로 인하여 한 맺힌 사연을 품고 인생을 파괴적으로 살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처가 살이 40년을 한 사람입니다. 일 이년이 아닙니다. 문화도 다르고 신앙도 다르고 습관도 다른 땅에서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40년 전 살인자가 되어 도망 온 사람입니다. 애굽 나라의 일급 수배자가 된 사람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오늘날 구분으로 나누어 보면 40세까지는 유아 청소년기이고, 40부터 80살까지는 청년기이고, 80부터 120살까지는 장년, 노년기입니다. 모세는 유아 청소년기에 불행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출생 자체가 불행한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노예입니다. 나라가 없는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모세가 출생하면서 처음에 부딪힌 관문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남자 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죽음을 품고 태어나는 불행이었습니다. 자신은 죽음이요 부모에게는 슬픔을 주는 불행이었습니다.
모세의 출생은 환영받는 출생이 아니었습니다. 출생 후 3개월 동안 모세의 친부모가 모세를 직접 양육했지만 모세를 은닉시킨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상적인 양육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출생은 기쁨이라기보다는 억압이었고, 축복이라기보다는 고통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지만 진짜 유대인 어머니와 권력자 애굽의 양어머니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을 것입니다.
40세가 되어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자가 되었고 1급 지명수배자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한 번의 실수로 양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과거 사연으로 인생을 파괴적으로 살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 민족 구원에 대한 사명을 부여받고 그 사명을 이루는데 쓰임받았습니다. 가정환경이 나쁘다고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에게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는 좋은 소식을 들려 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장사의 아들이었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다 집에서 쫓겨나 처가살이를 한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넷이나 되었습니다. 형제들의 시기로 노예로 팔려간 사람입니다. 억울하게 성희롱 죄로 감옥에 갖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국무총리가 되어 가뭄 때 나라를 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사 입다의 어머니는 기생이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래서 형제들에게 좇겨남을 당한 사람입니다. 불량배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베냐민사람 아비하일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고아입니다. 그래서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 아래에서 양육받았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여 이스라엘 민족을 죽음의 위기로부터 구원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룻을 보십시오. 이방 여인입니다. 시아버지 죽고 남편 죽고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땅 한 마지기 없습니다. 남의 이삭 주어 먹고 살아야 할 거지같은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모시고 끝까지 효도하며 결국 다윗 왕가를 만든 가정이 되었고 메시아 예수님의 족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좋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살다가 불행한 가정환경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사명 붙들고 나아가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하는 일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국 교회 초기 교인 중의 한 분인 서상륜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13살 때 부모님을 여위었답니다. 삶의 여건이 좋은 부모 만나지 못했습니다. 가난합니다. 고아가 된 이 사람은 살길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개성에서 나는 고려인삼을 사 가지고 만주에 가서 팔았답니다. 인삼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사를 하다 31살에 장티푸스에 걸렸답니다. 열이 오르고 쓰러지고, 헛소리를 했답니다. 아무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코틀랜드에서 파송 된 메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습니다. 죽어 가는 그를 살렸습니다.
서상륜에게는 메킨타이어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가장 고귀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일 년 만에 세례를 받고 그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이제 가난이나 질병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번역인 로스 성경을 로스 선교사님과 함께 번역했습니다.
황해도 장면에 있는 송천(솔내, 소래)에 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합니다.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서울에 새문안 교회를 세웠습니다. 처음 14명이 세례를 받습니다. 모두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황해도, 평안도 할 것 없이 부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평생 평신도로 살며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집을 헌납하여 교회를 지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님께서 그가 헌납한 집과 똑같은 기와집을 노년에 사주었다고도 합니다.
어떤 가정환경일지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맡겨준 사명을 이루어 나에 대하여 소문을 듣는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신 좋은 소문을 듣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복된 만남은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만남입니다(7-8).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만났습니다. 그 때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모세가 장인을 맞아들여 큰 절을 합니다. 200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자신의 지위에 아랑곳없이 모세는 장인 이드로를 맞이하는데 있어 최대의 친절과 경의와 기쁨을 표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처가살이할 때와는 신분이 완전히 달라진 사람입니다. 200여만 명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대개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르면 교만하여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장인을 맞이했습니다. 입 맞추고 평안을 빌었습니다. 자신이 기거하는 장막으로 장인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장막에서 장인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이것이 우리가 오늘 두 번째 교훈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입니다. 둘째,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을 이야기 합니다. 셋째,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말합니다. 요즈음 말하면 그동안 겪었던 지난 일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지난 일을 자신이 한 일로 말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사사로운 일이나 개인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밝히 간증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당한 고난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모세는 가족 없이 살았던 자신의 외로움을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얼마든지 지난날의 고통을 하소연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지팡이를 들으니까 열 가지 재앙이 내렸고 자신이 지팡이를 들으니까 홍해가 갈라졌고 자신이 지팡이로 바위를 치니까 생수가 나오고 자신이 지팡이를 들으니까 아말렉을 이겼다고 자신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영웅담을 이야기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가족을 만나 무엇을 이야기 한 것입니까? 자신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변잡기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신 인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성취해 놓고 가족에게 자기 자랑만 들어 놓는 것은 진정 복된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만남이 진정 복된 만남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신앙인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고 있습니다. 지금 대통령은 장로님입니다. 국무총리는 안수 집사입니다. 여당 대표도 야당 대표도 교회 집사님입니다. “뭔가 장로 대통령은 다르다. 뭔가 안수 집사 국무총리는 다르다. 뭔가 예수 믿는 집사가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를 하니까 다르다.”라는 것을 보여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로 꼭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소리를 안해도 되는 것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모습을 나타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 정치 지도자들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국가의 중대한 일이 있으면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백성을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종교 중립을 해친다고 말한다면 말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영원한 천국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백성을 위하는 공의와 사랑의 정치를 하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신문을 보니까 '노전대통령 국민장 끝난 날 밤 대통령은 돌연 술 한잔 하자고 참모들 호출하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참모진 5~6명이 1시간 후 모여 대통령의 술벗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원래 편하게 술 마시며 마음 달랠 친구도 없을 정도로 외로운데, 당시 이 대통령도 부쩍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다"고 신문은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울적하면 술로 마음을 달래야 하겠습니까? 그로부터 석 달여 지난 뒤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을 다시 청와대 안가에 불렀답니다. 개각을 끝내고 대통령 여론 지지도가 오른 때였습니다. 기사에는 "이날은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가 10잔 가량 돌았고 이 대통령과 참모진 모두 흥겨운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졌다"며, "한 수석은 만취해 이 대통령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졸 정도였다"고 기사는 실려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술을 가지고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에게 성직자의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기본자세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술로 풀고 국민들의 지지도가 올라갈 때 술 파티를 한다는 것은 신앙인의 기본자세는 아닙니다. 저는 대통령을 비난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보도 하나로 이것이 전부다고 대통령을 정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대통령이 잘 되어 이 민족이 잘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 떨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치적 이용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 같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역사를 간섭하시지도 어쩌면 존재하시지도 않는 것 같고, 무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를 치신 하나님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경제 문제를 외면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기갈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외교와 국방 문제에 침묵하거나 능력 없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말렉을 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정치지도자로 심각한 문제를 만났습니다. 그 때 마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일들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합니다.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나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시86:10)"
왜 언론이 대통령의 사적인 일을 보도하는가 모르겠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모세의 사적인 일을 그렇게 보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말하면 청화대에서 장막에서 일어난 일을 보도하면서 여호와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아버지 같은 장인에게, 종교가 전혀 다른 이방인 제사장에게 아주 담대하고 정직하게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술 파티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인을 통해 술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며 위로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인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장인 눈치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론 살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크고 작은 어떤 일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 참으로 복된 만남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격의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복된 만남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원칙이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한 덩이의 진흙을 얻었답니다. 그 진흙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강하게 났다고 합니다. 그는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라고 물었답니다.진흙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답니다. 나그네가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라고 묻자, “그것도 아니요”라고 대답하였답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라고 묻자, “나는 한 덩이의 진흙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그러면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라고 물었답니다. 이에 그 진흙은 비결을 말하기를 “나는 백합화와 함께 오래 동안 살았다”고 했답니다. 진흙이 지닌 향기의 비밀은 백합화와 함께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력도, 우리에게 주어진 명예도, 건강도, 부요함도 교만하게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한 줌의 진흙으로 돌아갈 우리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삶의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성취의 복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한 가지 원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한 가지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3. 복된 만남은 가족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만남입니다(9-12).
이드로는 모세의 간증을 듣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9절에 보십시오. 무척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모세의 생생한 간증을 듣고 그의 가슴은 뜨거운 기쁨으로 타올랐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단계가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벅찬 기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카일(Keil)은 이드로를 가리켜 '이방인 중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은 첫 개종자'라 하였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하였습니다. '찬송하다'는 말은 '무릎꿇다', '송축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찬양과 영광 돌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찬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0절,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서 건지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찬양을 통하여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찬송의 내용은 첫째,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와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신 것과 둘째, 모든 신보다 크신 하나님이신 것과 셋째,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교만히 행하는 자를 이기신 승리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일의 간증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모든 신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사위의 간증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확신한 것입니다. 사위가 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백성을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드로는 이방신에게 제사 드리던 제사장이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아들 미디안의 후손입니다(창 25:1, 2). 이들은 주로 아라비아 서북쪽의 아카바 만 동쪽 지역을 본토로 삼아 거주하던 유목민들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그는 모세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입니다(출2:18).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서(레 1:3-9), 드리는 자의 전적 헌신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기뻐하여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복된 만남입니까?
믿지 않았던 가족이 간증을 듣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예배드리는 삶을 살게 만드는 만남이야 말로 가장 복된 만남 중의 복된 만남입니다. 우리가 일가친척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일가친척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의 도움은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순간적입니다. 받을 때만 좋은 것입니다.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것은 나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명예, 나의 권력, 나의 성공, 나의 승리, 나의 건강, 나의 부, 나의 고통, 나의 인생을 통해 일가친척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인생의 과정을 통하여 일가친적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된 만남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일가친척이 예수 만나면 인생이 바뀌고 가정이 바뀌며 사회가 바뀝니다. 나사로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소아시아와 유럽이 변화되었습니다. 이레니우스가 예수님을 만나자 프랑스가 복음화되었고 영국에서 건너온 보니페이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독일이 기독교 나라가 되었습니다.
패트릭이라는 16살 난 포로 소년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아일랜드가 복음화되었으며, 언더우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한국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미얀마가, 허드슨 테일러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중국이 변화되었습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는데 그것은 그 어머니 헬레나의 신앙적 감화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예수님을 만난 이름 모를 한 하녀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름 모를 하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삶이 행복해 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층인 관리·전문직이 다른 직업군보다 더 종교적이며, 이 때문에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김성건 교수가 9월 29일 '종교와 행복: 관리·전문직 사례를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전국 성인남녀 1508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였답니다. 전체 응답자의 79.9%는 종교생활이 내적 평화와 행복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답니다. 직업군으로 보면 관리·전문직의 89.5%가 종교의 긍정적 기능에 동의했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관리·전문직은 건강 37.6%, 가족 29.4%, 종교 11.8%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28.2%가 '신의 존재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관리 전문직 종사자는 기독교가 35.3%로 가장 많았고, 이어 천주교 11.8%, 불교 7.1% 순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진정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을 일가친척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
이 땅에서 뿐 아니라 내세를 준비시켜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있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서 얻어먹고 사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다다는 것입니다. 불꽃 가운데 고민하는 지옥입니다. 그래서 손가락 끝으로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하소연합니다. 그 지옥의 고통이 괴로워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16:29)”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 믿는 가족까지 주님을 떠나는 삶이 아니라 나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 믿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일가친척이 예수 믿고 기쁘게 생활하고, 예수 믿고 찬양하고, 예수 믿고 예배하는 삶을 살고, 예수 믿고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가장 복된 만남은 가족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만남입니다.
흑자 성도
출 18: 1-12
사람이 일평생을 살다보면 마지막에 가서 세 가지 유형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적자인생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장사할 때에 적자를 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적자를 보았다는 것은 망했다는 뜻입니다.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됩니다. 두 번째로 본전인생입니다. 장사로 말하자면 10년 20년 열심히 수고하고 장사해봐야 본전만 하는 본전치기 사업입니다. 전혀 발전이 없는 인생, 항상 제자리걸음하는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흑자 인생입니다. 장사를 해서 이익을 많이 남기고 수익도 풍족해서 남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흑자인생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흑자를 내는 성도"라는 뜻으로 제목을 정리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전에 이 본문으로 주보에 요약설교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몸이 불편해서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제목은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같은 본문이지만 다른 제목, 다른 내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때의 설교 내용을 잠깐 되살펴보면, 강아지가 눈을 뜨듯이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도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눈 뜨게되면 사람 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이드로라고 하는 모세의 장인은 모세를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사실 모세가 광야로 도망 왔을 때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모세의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잘되고 온 가족이 잘되었습니다. 그 다음 미래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야 누구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10년, 50년, 100년의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드로야말로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제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방법과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문제를 정확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문제 해결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설교문을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제목을 달리해서 "흑자 성도"로 말씀드립니다.
I. 봉사의 흑자 (1-6)
오늘의 주인공도 역시 모세의 장인 "이드로"입니다. 우리는 첫째로 무슨 흑자를 내야 하는가 하면 봉사의 흑자를 내야 합니다. 장사하는데 흑자를 내면 재산과 살림이 늘어납니다. 그것처럼 봉사를 열심히 하다보면 봉사의 폭이 늘어나고 범위도 넓어집니다. 작년보다 금년이, 금년보다 내년의 봉사는 그 폭을 넓혀야 하고 깊이를 더 합니다. 봉사 중에서도 귀한 봉사가 있는데 사람을 키우는 봉사입니다. 물론 그 보다 더 귀한 봉사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바울이 말한 것 중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전혀 이의를 달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다음으로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은인이 있습니다. 바나바입니다. 바울의 삶을 돌아보면, 바울은 원래 지독한 핍박 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아 옥에 가두고 두들겨 패고 재산을 빼앗던 아주 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이라고하는 도시로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는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와 만나는 순간에 은혜 받고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그를 인정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때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중재역할을 잘하게 됩니다. 바울의 입장을 잘 대변하면서 사도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당장 일꾼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곧바로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 길리가아 다소로 가서, 14년 동안을 썩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가 굉장히 부흥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교회의 책임자가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의 부흥으로 일꾼이 더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러오게 되었고 바울에게는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은인이 되었습니다. 1년 동안 교회를 가르치고 봉사하는 중에 세계선교사를 보내기로 하자 택함 받은 사람이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여행에 한 사람이 더 참여했는데 마가라고하는 요한입니다. 그러나 도중에 젊은 요한은 너무 힘이 들고 고생스러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1차 전도여행은 아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 요한이라 하는 청년이 다시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원래 생각의 폭이 넓고 대범한 사람인지라 요한의 요청을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격은 폭이 좁아 바나바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러한 의견대립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은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행동을 한 번 돌아봅시다. 자기는 과거에 예수 믿는 사람을 때리고 옥에 가두고 죽이던 사람이면서, 선교가 힘들어 중간에 돌아 간 청년의 과오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바나바와 싸워야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이해하기 더 힘든 부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나바는 어린 요한을 10년 넘게 데리고 다니면서 훌륭한 일꾼으로 키워 놓았습니다. 그 소문이 바울에게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디모데를 보내서 요한을 데려오게 합니다. 이런 얌체같은 행동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필요할 때에는 데리고 오고, 필요 없을 때는 버린다는 심보입니다. 이런 바울이 나중에는 대 사도가 되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그 다음으로는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라고하는 요한이 누구입니까? 나중에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키우지 않았더라면 그런 훌륭한 일꾼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울을 키웠고 마가를 키웠습니다. 훌륭한 일꾼을 키워내는 봉사야말로, 봉사 중에 최고의 봉사입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를 보면 "이드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이드로라고 하는 사람은 시나이반도에 사는 이방인의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젊은이가 쫓겨왔는데 애굽에서 살인죄를 짓고 쫓겨온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세를 훌륭한 지도자로 좋게만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을 죽이고 먼 광야로 도망간 "망명객"이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도망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먹는 것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고 입을 옷도 제대로 입지를 못했습니다. 몰골은 형편없는 거지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여러분은 사위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드로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모르게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그 사람 됨됨을 보았습니다. 모세를 자기 집으로 불러 대접을 잘 하였습니다. 자기의 딸들을 도와준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자기의 딸을 좋아하기도 하는지라 사위를 삼았습니다. 40년을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모세가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만 이드로라고 하는 장인의 보살핌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갈 때, 처음에는 처와 자식을 데리고 갔지만 바로와의 싸움을 하다보니 가정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게도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처와 자식을 장인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때 장인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위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가족부양이 어려우면 "내가 도와주어야지" 하면서 모세의 짐을 덜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모세를 밀어주는 것도 되지만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봉사하는 것이 됩니다. 장인 이드로의 숨은 봉사가 훌륭한 모세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교회의 일을 하려고 하는 식구가 있으면 뒤를 잘 밀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하는 것도 봉사지만 다른 식구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것도 큰 봉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가 구역장, 권찰 잘 할 수 있도록 손자, 손녀들을 봐 주십시오. 얼마나 좋은 봉사인지 모릅니다. 사람을 키우는 봉사, 그 다음에 일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 인생을 흑자 내는 성도인줄로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II. 믿음의 흑자 (7-11)
장인 이드로의 집으로 가족을 돌려보낸 모세는 바로의 권세와 싸워 승리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는 길에 장인 이드로가 사는 동네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뿐입니다. 그 동네 앞에 즉 시내 산밑에 천막을 쳐 놓고 있는데,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처와 자식을 데리고 찾아 왔습니다. 장인의 생각으로는 자기가 돌볼 만큼 돌봐 주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모세는 장인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리고 어른이 찾아오셨으니 장인에게 큰절로 영접하였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장인은 장인이요 어른은 어른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어른에게 예의를 갖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절을 한 다음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능력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장인 이드로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라고 정확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드로가 섬기던 이방신들은 그런 이적과 기사를 보여준 일이 없었습니다. 장인은 참 신을 찾았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헛살았다는 것을 모세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처와 자식을 데리고 짐을 꾸린 다음 백성들과 함께 여행을 시작합니다. 모세의 장인과 그 가족들도 선민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드로의 가족은 요단강을 건너 종려나무 성 즉 여리고 성에 정착을 하고 그 자손들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삿1:16). 미디안에 살면서 귀신의 이름을 팔아가며 살았다고 하면 편안히 살수는 있겠지만 가나안 땅에 가서 선민과 함께 기업을 받고, 선민의 축복에 동참하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장인의 가정은 개종을 하였습니다. 자자손손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은 뿌리내리고 폭이 깊어지고 넓어져서 믿음의 흑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이드로는 믿음의 흑자를 낸 성도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아만 장군은 시리아의 군대장관, 다시 말해 국방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적군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다 망하게 되고, 임금은 어디로 도망가야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나아만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데리고 싸워 승리를 했습니다. 그 나라를 지켰으니 왕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이제 나아만은 출세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온 몸에 퍼져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지만 낫지를 않습니다. 장관이요 왕에게 신임 받는 신하이지만 문둥병에 걸렸으니 집안에 기쁨이 없고 절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남편 역할도 못하고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하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닙니다. 마침 그 집에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혀 와서 종살이하는 계집아이가 살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땅 사마리아에 가면 하나님의 종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분을 찾아가서 그분의 지도를 받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앙지도는 항상 주의 종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나아만은 급하게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에게 찾아갔습니다. 엘리사가 하는 말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면 낫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아만은 불평합니다. 엘리사는 불평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 주었습니다. 그가 불평하는 까닭은 치료방법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즉 요단강에서 목욕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이 병 고쳐 주시는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고치실뿐, 우리의 방법대로 고쳐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믿습니다하고 가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앞세우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그런 연유에 기인합니다. 내 주장대로만 하려고 하는 그것이 교회에서는 문제만 야기시킬 뿐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불평, 원망, 시비가 많아집니다. 더욱이 요단강에 가서 목욕하라니 내 나라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강은 더 좋고 아름다운데, 요단강에서 목욕하여 나을 것 같으면 그 강에서 목욕하면 되지 목욕할 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느냐?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이 말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음이 있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말의 씨가 먹힌다고 하더라도 그 말은 분명히 불평하는 말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을 사람은 한가지가 다릅니다. 하인들의 충고가 "목욕하는 것이 힘이 듭니까? 밑천이 듭니까? 더 중한 일을 시켰어도 했을 텐데 그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합니까? 어서 가서 요단강에서 목욕하시지요" 라고 믿음의 충고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충고하였습니다. 이때 나아만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네 말이 옳도다" 하면서 하인의 충고를 받아 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키는 대로 순종을 했더니 깨끗이 나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아만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심령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흙을 가지고 가서 흙 제단을 쌓고 제사 드리겠다고 할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나아만이 집에 돌아가 보니 가족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온전한 몸을 보고 난 후 그 가정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초상집이 아니라 잔칫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나아만의 고통이 온 가정의 슬픔이 되더니 이제는 나아만의 은혜가 온 가정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사람의 변화가 가정을 변화시키고 직장을 변화시키고, 가는 곳마다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직장이 달라지고 사업이 달라집니다. 나의 믿음이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의 변화를 일으키니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흑자"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믿음은 온 가정의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믿음이 믿음을 낳았습니다. 즉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흑자의 믿음입니다.
III. 교제의 흑자 (12-)
성도간의 교제는 서로의 믿음이 자라도록 격려를 주고 힘을 북돋우어 줍니다. 그래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이런 교제가 상당히 활발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인 이드로는 모세와의 교제를 통해서 감동을 받고 자기 인생이 허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변화되었습니다. 모세가 들려준 하나님의 능력은 이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믿어 온 신은 가짜이며 하나님만이 진짜 신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크시다는 겁니다. 내가 믿었던 신은 가짜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드로는 집으로 돌아가 송아지와 양을 가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바람직한 출발입니다. 이제부터 귀신과는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집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우선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지 못하고 세상과 계속 교제를 가지게 되면 잡족이 되어 버립니다. 출애굽기, 민수기에 보게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원망이 자주 나오는데 이스라엘과 섞여 있는 잡족들에게서 시작되고 급속히 확산되는 것입니다. 즉 그 불평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까지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잡족이 있을 때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방해를 받습니다. 잡족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바로 되어 있지 않은 암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먹는 것과 입는 것에만 열중합니다. 결국 하나님께는 원망과 불평, 비난만 늘어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보면 교회 나온 지 10년이 지나도록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가 없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드로는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헌신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성경에 보면 아론이라고 하는 대제사장과 72인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일꾼들과 사귀는 겁니다. 주의 종들과 교회 일꾼들 사이에 깊은 교제를 나눌 때, 얻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아 자기 믿음에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은 다음은 주의 종들과 일꾼들과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다 보면 교제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더해갑니다. 이런 경우 "교제의 흑자"를 낸 사람입니다. 교제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윌리암 레이큰이라고 하는 목사님이의 이야기입니다. 이 윌이암 레이큰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는 좀 크다 보니 목사님이 교인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항상 당회장실에 나가서 보면 점심때쯤 되어서 이상한 사람을 늘 보게 됩니다. 옷을 깨끗이 입지 못하고 가난이 몸에 벤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인데 점심때면 교회에 왔다가 5분도 못 되어서 돌아가고 또다시 5분도 못돼서 돌아가기를 매일같이 반복합니다. 목사님 생각에 혹시 저 영감님이 도둑질하러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비원에게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경비원이 할아버지께 물어 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매일 교회를 왔다 갔다 하십니까? 했더니 그 영감님이 하는 말이 "교인이 교회에 오는데 뭐가 잘못된 것이 있소" 라고 하십니다. 다시 경비원이 묻기를 "왜 매일같이 왔다가 5분도 못되어 돌아가곤 하십니까?" 라고 재차 물었더니 기도하러 왔다 가는 겁니다. 그런데 왜 금방 가십니까? 했더니, 자기는 기도할 줄을 몰라서 그냥 "주님 나 왔다 가요"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말만해도 다 들어주실 것 같아서 그렇게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난 다음에 이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입원한 이후로 그 병실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병실에 웃음이 꽃피고 아주 분위기가 좋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간호사가 보기에는 할아버지가 좋은 음식 먹는 것도 아니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무엇이 그렇게 좋으세요". 할아버지 말씀이 12시가 되면 찾아오는 분이 계셔 그 분이 찾아오셔서 "나야 나 예수야" 그러고는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사고로 교회에 찾아가지 못하게 되어 이제는 예수님이 병실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너무 짤막한 이야기지만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하나님과 교제가 바로 된 사람이 이웃과의 교제도 바로 됩니다. 그래서 교제가 깊어지고 교제의 폭이 넓어집니다. 이 교제에 성공한 사람이 인생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혼자 못사는 사교적인 존재입니다. 교제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이드로가 바로 교제의 흑자를 낸 사람입니다. 누구와 교제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의 가족을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모세는 마음을 놓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드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결과가 되었고 하나님을 봉사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선민의 대열에 합류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섬기던 우상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봉사의 흑자, 믿음의 흑자, 교제의 흑자를 내고 자기의 가정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도 흑자 성도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