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으면 힘이 난다
(로마서 5:5~8)
코로나19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요즘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매우 어두워보였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경제적 위기가 닥쳐서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몸의 장기가 안 좋으면 우리의 안색이 안 좋듯 우리 마음에 근심이 많으면 표정이 어둡습니다. 여러분 매일 신문을 보면 코로나19와 세계 여러 나라에 일어난 경제적 위기에 대해서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신문에 뭐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좋으련만 좋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디를 봐도 캄캄한 이러한 위기 시대에 이러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있으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목회도 했었는데 하루는 창세기를 공부하는데 어떤 성도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창세기 25:22~23에 야곱과 에서가 태중에서 싸우는데 하나님께서 에서보다 야곱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9:13에 자세히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도의 질문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야곱과 같은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야곱은 택함 받은 믿는 자이고 에서는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질문하기를 봉사를 잘 하고 공부를 잘 하여 성품이 좋아서 사랑받으면 이해할 수 있는데 야곱 같이 그렇게 약삭빠른 사람을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한다는 것이 이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질문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야곱이 좀 치사한 사람입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먹는 음식인 팥죽 가지고 형을 속이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 축복을 받는 야곱이 참 못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야곱을 지렁이라고 부릅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아 명명하는데 지렁이는 매우 징그럽습니다. 제가 그 대답을 하려고 성경을 읽는데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는데 네가 바로 야곱이고 지렁이 같은 자가 아니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려 하지 않고 우리의 꾀로 살려고 헛된 것을 추구한 것을 생각하면 참 내가 야곱이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실 주님께서 용서해주시니까 이 자리에 나왔지 몰래 카메라로 우리의 지난 시절을 동영상에 담아 방영한다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어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으로 야곱처럼 못된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래서 본질상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주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상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 같으면 인간을 박살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시되 마치 사랑할 대상이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리를 나 하나 밖에 없는 존재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사람이 좀 남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또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잘난 사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할 때 대부분 직업도 좋고 능력도 있고 돈도 있고 그런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까?
어떤 기자가 갑부와 결혼하게 된 여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갑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까? 네 두 번째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첫 눈에 반하진 않고요.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부자인 줄 몰랐거든요’ 세상 사랑은 다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로마서 5:7~8에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즉 사람들은 다 의인과 선인 착한 사람을 사랑해서 그 사람들을 위해 혹 죽는 자도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못된 죄인일 때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가 가장 잘 될 때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가장 악랄하고 못된 사람일 때 자신감이 없고 가장 비참할 때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위기의 시대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있으면 세상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애가 의기소침합니다. 인생에 자신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이 두려워 보입니다.
저도 신학교 졸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이 없을 때 세상도 두렵고 목회도 두렵고 교인도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면 모든 것이 따뜻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탕자라고 합니다. 탕자는 늘 열등감과 좌절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남을 자꾸 찌르고 남을 편치 못하게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할 때 형님 부부가 연탄가스 사고로 사망하면서 아이 셋을 남겨 놓고 천국에 갔습니다. 마음 착한 이 목사님은 형의 자녀 셋을 양자 삼아서 자기 자식처럼 키웁니다. 한국에 남아 있으면 애들이 학교에서 괜히 놀림 당할까봐 그 양자를 삼은 세 아이와 자기가 낳은 아이 하나 해서 도합 넷을 데리고 미국 스포케인에 가서 목회를 하며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님 자식 중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이 그렇게 속을 썩였습니다. 그는 학교의 불량 학생으로 사고를 매일 칩니다. 그는 정말 이 양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나 눈치를 봅니다. 아버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매일 사고를 쳤던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학교에 수 백 번 불려갔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위해 목사님 부부가 눈물 흘리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한 번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찬양 집회와 워십 댄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이 사람들 앞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르다가 꼬꾸라졌습니다. 그리고 계속 울었습니다. 집회가 끝이 났는데도 계속 울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계속 죄송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는지 알았는데 이제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아들은 울면서 계속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 반복해서 말하더랍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인생의 모든 위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문장으로 줄이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어로 Jesus loves me 즉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이 가장 연약하고 가장 못되고 나쁠 때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ccm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