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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2月 ☞영적 성숙의 달☜
삼상23:1-14절) 그일라 사람을 도움
사람은 어느 곳에 갔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공격받으면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쫓기고 있고. 힘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마음은 있다 해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돕는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떤 청년은 도쿄 지하철에서 한 일본인이 술에 취해 철로에 떨어진 것을 보고. 뛰어들어 살리려다가 자기도 죽었습니다.
우리나라 어떤 청년은 아파트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자기는 얼마든지 살 수 있었지만, 한밤중에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느라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문을 두들기다가 유해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서 죽었습니다.
내 고향 서해 태안 앞바다에서 큰 유조선이 다른 배와 충돌해서 기름이 흘렀을 때, 많은 사람이 시간을 내어 직접 기름범벅이 된 바닷가에 가서 바위에 있는 기름을 닦아냈습니다.
그때 외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바다는 기름에 오염이 되어서 물고기나 조개류 같은 것이 일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가 될 줄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참 미련한 것 같은 행동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기름이 묻은 바위에 붙어서 일일이 기름을 닦아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름 냄새가 나지 않고. 물고기와 조개들이 살 수 있는 깨끗한 바다가 된 것을 보고 많은 외국인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유가 있어서 남을 돕는 것은 좋지만, 나도 있을 곳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설사 내가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실제로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 잘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정말 열심히 살고 노력을 하지만. 어려워서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맨날 놀기만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도움만 청하고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때 연대보증 망국론이란 말이 나왔던 때가 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고 하면, 누군가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의 연대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주로 부모나 형제나 아주 친한 친구들이 보증을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증을 서 달라고 한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부도를 내거나 망해버리면, 그 사람을 믿고 보증을 섰던 부모나 형제나 친구들이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情)이 많아서 누군가가 어려운 사람이 보증을 서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당장 돈이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장을 찍어 줬다가 IMF가 오니까 수많은 사람이 집을 날리고. 빚쟁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과연 나부터 먼저 살아야 할까? 아니면 남을 도우면서 살아야 할까? 그리고 정말 저 사람이 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분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할 수 있는 한 땀을 흘리지 않는 수입을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재테크 같은 것을 너무 좋아하다 보면. 속을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되고. 속지 않기 위해서 늘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Ⅰ.동족의 도움 요청
다윗이 아둘람 굴에 숨어 살 때는 그런대로 지역이 험하고. 사울 왕이 있는 곳에서 멀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갓 선지자가 찾아와서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접경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경계가 불분면한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이라면, 즉 *이스라엘이면. 이스라엘, 블레셋이면 블레셋* 이렇게 소속(所屬)이 분명한 곳에 있어야지.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애매한 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이런 책망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계3:16절)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온천물이면. 뜨거워야 하고, 시냇물이면. 시원해야 사람들이 마시거나 목욕할 수 있는 것이지, 미지근하면. 아무데도 쓸데없는*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사상적으로 미지근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즉 *기독인도 스님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교수이면서 사회학이나 심리학으로 접근하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갓 선지자의 말에 순종해서 유다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유다에는 숨을 만한 큰 굴(窟)도 없고, 양식도 구할 수 없고, 너무나 쉽게 사울 왕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윗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인 그일라 사람들이 일 년 농사를 다 지어놓고. 추수할 때인데, 블레셋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은 일종의 곡식도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남이 농사를 다 지어놓으니까 무기(武器)를 들고 쳐들어와서 곡식을 모두 다 빼앗아가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아예 소 같은 가축이나. 수레를 가져와서 곡식을 훔쳐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일라 사람들이 일 년 농사지은 것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두 다 빼앗겨버리면, 그들은 일 년을 굶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블레셋 사람들이 계속 도둑질하러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는 다윗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다윗 역시 거처(居處)가 없는 사람이었고. 무기(武器)도 없었고. 같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어중이떠중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속에는 성령의 뜨거운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중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일라 사람들을 도와서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힘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돕고 싶은데, 내 힘으로 도울 수 있을지, 돕는 다면. 어느 선(線)까지 도와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제사장이 입는
*에봇* 이었습니다. 즉 사울 왕이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죽일 때, 그 아들 아비아달이 가까스로 피했는데, 그는 도망치면서 제사장의 *에봇*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에봇*은 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지는 못하고 *예스* 와 *노*의 단답형의 말씀으로만 응답할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즉시 하나님께 *우리 처지도 비참한데. 그일라 사람을 도와야합니까? 포기하고 못 본체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23:1-2절)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그 당시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집이 있고. 밭이 있고. 곡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추수하려고 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도둑질하러 온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힘을 합쳐서 블레셋을 물리쳐야 하는데, 이들은 힘이 없어서 약탈(掠奪)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다윗은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가드에 갔다가 죽을 뻔했었기 때문에 그 후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도 참 무모(無謀)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즉 *네 형편이나 처지야 어떻든지 간에 그일라 사람들을 구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출동하려는데, 같이 있는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23:3절)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다윗의 계획을 들은 다윗의 사람들은 이것은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려운 사람들이었고. 생계(生計)도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과 같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우리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주제에 남을 돕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즉 그일라를 지키는 일은 군인이나. 경찰이 해야 할 일이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반대하는 사람이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즉 400:1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았다고 해도 *우리 400명의 목숨을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맡길 순 없다*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400명의 말이 옳을까? 아니면, 다윗 한 사람의 말이 옳을까? 아마 사울 왕 같으면. 틀림없이 400명의 말을 따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부하 나. 백성들의 지지(支持)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마음의 영감(靈感)을 부정하지 않고, 또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23:4절)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두 번째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의 대답은 전과 똑같았습니다. 그것은 *예스* 였습니다. 성경에는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고 되어있지만, *에봇*은 이렇게 길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도 보석으로 *예스*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일어나 내려가서 그일라를 도우라. 내가 이기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두 번째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었을 때는 더 이상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즉 그일라로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Ⅱ.틀림없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다윗의 질문에 음성으로 대답하신 것이 아니라,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보석의 빛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보석이 빛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다윗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로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승리를 주셨습니다.
23:5절)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여기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사람들의 곡식을 강탈해가려고 많이 몰려왔던 것 같고, 심지어는 소 같은 짐승까지 몰고 와서 곡식을 실어가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가축을 동원해서 그일라의 곡식을 싹쓸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다윗과 그 일행에게 힘을 주셔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많이 죽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거기 있는 줄 몰랐고. 누군가가 자기들을 갑자기 치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으므로 많은 블레셋 사람이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끌고 온 가축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윗과 그 일행들이 서 있는 가축들을 모두 다 끌고 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생각지도 못하게 상당한 가축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가축을 잡아먹으면, 다윗과 그 일행은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먹을 것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반드시 살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딤전5:18절)...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일라 에는 매력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일라가 성(城)으로 되어있고, 성문 빗장이 있어서 성(城)안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집다운 집에서 꿀 잠을 자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일라는 아둘람 굴이나 들판에서 노숙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 살만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만일 사울 왕이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성(城)을 포위하면, 도망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행 중에는 여자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어서 높은 성에서 뛰어내릴 수 없고, 남자들도 잡힐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해서 성문을 열어주면, 다윗은 꼼짝하지 못하고. 사울 왕의 손에 잡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잡으러 와서 성을 포위할지. 안 할지. 또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를 배반할지. 안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즉 다윗은 먼저 사울 왕이 자기를 잡으러 여기로 내려올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를 배반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 대답은 모두 *그렇다* 였습니다. 이것은 사울 왕이 내려온다는 것이고.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3:10-12절)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대답은 모두 부정적이었습니다. 다윗이 이곳이 편하다고 더 있으면 반드시 사울 왕이 내려와서 성을 포위할 것이고, 너희들은 도망치지 못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일라 사람들은 너희를 배반하여 사울 왕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과 인간의 심리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그일라를 떠나는 것이 참 아까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는 물이 있고. 집이 있고. 양식을 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괜찮은 곳을 떠나서 다시 들판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일라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양식을 지켜준 다윗을 배반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 같으면 떠나면서 그일라에 불 지르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남을 배반하는 것도 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을 믿는 것이 잘못입니다. 인간은 모두 약(弱)하기 때문에 자기가 죽게 되면. 다 배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배반도 당해봐야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배반할 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그일라를 떠나서 광야로 피했습니다.
Ⅲ.하나님이 넘겨주지 않으심
우리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우연히 일어나거나, 내가 잘해서 좋은 결과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이기고, 가축을 빼앗았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일분일초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안 터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눈을 부릅뜨고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조금만 무관심하시면, 당장 사고가 터지게 됩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있는 동안 이미 그일라 사람 중의 누군가 사울 왕에게 가서 벌써 다윗을 밀고(密告)했습니다. 즉 다윗이 *여기 그일라에 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엄청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물리쳐서 기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랐는데, 드디어 있는 곳을 알게 되어서 기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일라는 성으로 되어있고. 문빗장이 있어서 다윗은 완전히 집안에 갇힌 꼴이었습니다.(독 안에 든 쥐의 꼴)
사울 왕은 내려가기만 하면, 다윗을 잡는다고 생각해서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왜 저렇게 어리석게 자기 있는 곳을 드러내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군대를 모았습니다.
23:7-8절)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모든 것은 *에봇*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이미 그일라 사람은 다윗을 배신해서 사울 왕에게 가서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다윗을 포위하기 위해서 내려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을 따르던 사람은 2백 명이 합쳐져서 이미 6백 명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6백 명을 데리고 도망갈 수 있는 곳까지 도망쳤습니다. 그러니까 그일라 사람 중에 누군가가 또 잽싸게 사울 왕에게 가서 *다윗이 이미 그일라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사울 왕은 더 이상 그일라로 내려가지 않고. 광야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울 왕은 다윗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 왕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23:14절)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다윗은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 산골에서 이리저리 생쥐처럼 도망*다녔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아무리 다윗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붙들고 계셨기*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시기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자기 집이 아닌 사람은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걱정을 태산같이 합니다. 자기도 먹고 살 수 없는데, 나라 사정까지 어려우면, 미래가 더 불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에봇*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우림과 둠밈*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우림과 둠밈*은 우리의 가슴 속에 있고, 우리의 머릿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즉 *지금 내 사정이 이런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고. 누군가가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물으면 반드시 길이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로 악(惡)한 자의 손에 넘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혹 우리가 도망 다닐 때는 어쩔 수 없이 도망 다녀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는 절대로 우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 마귀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절대로 악(惡)한 자에게 붙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파도를 타셔서 코로나 재앙의 시대, 이 위기를 잘 이기시기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역사서
☞ 자발적인 신청을 수시(隨時)로 받습니다.
▣리더(leader)는 1단계 *필수과목* 자격증을 취득해야 공동체가 안전하고, 직분도 반드시 *필수과목*을 필하고 *세례를 받아야*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천주교인 포함).
딤후3:13-14절)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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