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 [47] 일본인이 세운 한국은행
1909. 8. 29.~1910. 8. 29.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강제 병합을 1년 앞둔 1909년 8월 중순, 이태 전 대한제국 탁지부 차관으로 부임한 아라이(荒井賢太郞)는 부관연락선을 타고 동경으로 가고 있었다. 그의 가방 속에는 보름 전 우리 정부 이름으로 발표된 '한국은행조례'와 함께 근 1년 이상 끌어오다 두 달 전에 타결을 본 '제일은행 권리의무승계각서'가 들어 있었다. 동경에 도착한 아라이는 8월 14일 동경국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일 설립위원을 임명할 한국은행은 대만은행 같은 식민지은행과 유사하고 형식상으로만 한국은행이다. 임원에 한국 사람을 넣지 않더라도 아무 불평이 없고 도리어 한국 상하가 함께 환영할 것이며 그 사업은 제일은행의 명칭만 바꾼 데 불과하다."
▲ 한국은행
그의 동경행은 한국은행 설립을 실행에 옮기려는 것이었다. 조선이 자체적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보다 6년 전인 1903년 초, 황성신문은 '탁지부에서 중앙은행을 설치할 차로 은행조례를 의정하여 일간 정부회의에 제출한다'고 보도했다. 설립될 은행은 자본금 300만원(당시 정부재정의 3할에 해당)으로, 국고금 출납과 태환지폐 발행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그해 8월 출자금을 모집할 예정이었지만, 정부도 백성도 가난한 터라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한제국은 차관 도입을 위해 러시아와 교섭했으나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 지지부진하였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한국은행 설립의 주도권마저 일본에 넘어갔다.
아라이 도착 이후 일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어 설립위원회가 열리고 바로 주주모집을 공고하였다. 공모는 9월 6~12일이었지만 수익이 보장된 주식이었기에 개시 첫날 10시에 모집수를 초과하여 오후 1시에 마감되었다. 경쟁률은 292 대 1이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한국은행 주금을 모집하는 날인데 당일 오전까지 모집된 것이 많은 고로 오후 한 시에 즉시 모집을 정지하기로 각처 취급은행에 전보하였다.'(대한매일신보 1909.9.7.)
1909년 10월 29일 동경상업회의소에서 창립총회가 열리고 총재에 제일은행 한국 총지점 지배인이던 이치하라(市原盛宏)가 임명되었다. 제일은행은 1878년 이 땅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 민간은행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확장해가는 금융 첨병이었다. 설립자 겸 은행장 시부사와(澁澤英一)는 일본인들이 재계의 선각자로 자랑해 마지않는 자였고 한국에서 전기 철도 광산 등 각종 이권을 획득한 자였다. 이치하라는 그의 심복이었다.
경성 본정 3정목(남대문로 3가 현 화폐금융박물관)에 본점을 둔 자본금 천만원의 한국은행은 그렇게 탄생했다. 명색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인데 설립위원 34명 중 한국인은 친일 인사인 한성은행 이사 한상룡과 한호농공은행장 백완혁뿐이었다. 총 10만주 중 한국정부 인수분을 제외한 7만주가 일반 공모주였는데 한국인 주주는 전 주주의 2%에 불과했고 그중 9할이 1주 주주였다. 임원과 직원도 죄다 일본인이었다. 그것은 식민지 통치기구의 하나에 불과했다.
조선일보 입력 : 2009.11.04 03:21
[출처]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 [47] 일본인이 세운 한국은행 |작성자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