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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층서 내던지고 “경찰이죠, 사람이…”
‘쿵!’
1971년 6월 30일 오후 11시 30분경. 서울 중구 충무로에 소재한 대연각호텔에 정체불명의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텔 관계자들은 소리의 출처를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그 시각 112에는 한 건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한 여성이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출동한 경찰은 잠시 후 호텔 5층 베란다에서 한 젊은 여성의 사체를 발견하게 된다. 신원조회 결과 여성은 OO여대에 재학 중인 윤숙희 양(가명·21)으로 밝혀졌다.
조사결과 윤 양은 그 해 OO여대 메이퀸으로 선발돼 학내에서 화제가 됐던 인물로 사건 당일엔 이 호텔 17층 13호실에 투숙 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차 조사결과 윤 양은 자신이 머물던 17층 객실에서 몸을 던진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졌다.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의 여성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서 투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사결과 드러난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71년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일명 ‘OO여대 메이퀸 살인사건’이다.
당시 관할서인 중부경찰서 형사들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윤 양은 객실 창문을 통해 추락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17층 높이에서 윤 양이 떨어진 5층 베란다까지는 무려 36m나 됐다.
의문의 추락사를 두고 수사팀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수사팀이 품은 가장 큰 의문은 윤 양이 투신한 이유였다. 이는 윤 양의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조사결과 윤 양은 사건이 발생하기 약 세 시간 전에 한 20대 남성과 함께 호텔 객실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윤 양과 함께 객실로 올라간 남성은 임준혁 씨(가명·26)로 유일한 목격자이자 최초 신고자였다. 수사팀은 즉시 임 씨를 불러 당시 상황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임준혁은 윤 양을 데리고 호텔 객실로 들어간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윤 양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대해서는 자신의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했다. 임준혁은 그 곳에서 윤 양에게 청혼을 했으나 윤 양이 거절하는 바람에 기분이 몹시 상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윤 양이 갈증을 호소해서 물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그때 말릴 틈도 없이 윤 양이 열린 창문을 통해 스스로 뛰어 내렸다고 했다.”
사체를 검안한 당시 경찰공의는 윤 양의 죽음에 대해 ‘추락으로 인한 두부좌상내출혈사’라는 의견을 냈고, 이에 따라 수사팀은 이 사건을 임 씨의 일방적인 청혼협박 및 정조유린에 대한 위협에 윤 양이 투신자살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윤 양의 가족들은 경찰 수사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윤 양의 평소 성격 등으로 볼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윤 양의 가족들은 재수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고 7월 3일 서울지검 A 검사의 지휘 하에 현장에서부터 전면 재조사가 이뤄졌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실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추락사가 아닌 질식사의 흔적이 짙게 보였다. 국과수에서는 사체의 목 두 군데에 손으로 졸린 흔적이 뚜렷하게 있고 허벅지 부분에도 예리한 흉기로 찔린 상처가 있다고 통보해왔다. 타살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의 경찰 수사결과가 완전히 뒤집혔다.”
유력한 용의자는 사건 직전까지 윤 양과 함께 있었던 임 씨였다. 타살의혹을 밝혀낸 A 검사가 임 씨를 불러 직접 신문했지만 임 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결국 중부경찰서 B 경감이 임 씨를 상대로 재신문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건발생 6일 만에 임 씨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윤 양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창 밖으로 던졌다’는 것이었다.
임 씨가 당시 자백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임 씨는 놀랍게도 윤 양 오빠의 친구였다.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지인과 양복점을 경영하던 임 씨는 1970년 4월경 윤 양 오빠의 친구들로부터 윤 양을 소개받게 된다. 윤 양에게 한눈에 반한 임 씨는 이후 윤 양에게 적극적인 구애공세를 펼치며 10여차례 정도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검사신문에서 임 씨는 “윤 양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다. 단둘이 만날 때마다 결혼하자고 졸랐다. 하지만 그때마다 윤 양의 대답은 ‘NO’였다. 윤 양은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고 단지 오빠로만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외교관이나 대학교수를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임 씨의 열렬한 구애에 부담을 느낀 탓일까. 윤 양은 그해 11월경부터는 임 씨를 일절 만나주지 않았다. 이듬해 2월 윤 양의 생일에도 만남을 제안했으나 임 씨는 거절당하고 만다.
하지만 임 씨는 윤 양을 포기하지 못했다. 윤 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임 씨는 그해 6월 윤 양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결국 임 씨는 비뚤어진 소유욕으로 위험한 일을 꾸미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임준혁은 6월 28일 자신의 양복점 직원 김만구(가명·22)에게 현금 30만원을 주면서 윤 양을 납치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김만구는 자신의 친구 2명을 끌어들였다. 김만구 등 3명은 이틀 후인 6월 30일 크라운 승용차를 빌려 윤 양을 납치해 연희동에 있는 임준혁의 하숙집으로 데려갔다. 이 소식을 전화로 보고받은 임준혁은 ‘워커힐 호텔로 데려오라’고 했다가 계획을 바꿔 ‘대연각호텔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대연각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윤 양을 기다리고 있던 임준혁 앞에 윤 양이 나타난 시각은 그날 오후 6시 30분경. 이 자리에서 임준혁은 ‘메이퀸 당선축하가 늦었다’며 함께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윤 양에게 ‘애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이에 윤 양이 ‘친척 소개로 만난 사람이며 약혼할 사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검사 심문에서 임준혁은 ‘약혼한다는 말을 들은 후 그날 밤 같이 지내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임 씨는 김만구 등이 예약해놓은 17층 13호실 객실로 윤 양을 데리고 올라가 감금시켰다. 그리고 납치에 가담한 일당 3명은 윤 양을 감시하기 위해 13호실 맞은 편 객실에 투숙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호텔 객실에 윤 양과 단둘이 있게 된 임 씨는 본격적으로 윤 양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구애에 들어갔다. 임 씨는 윤 양에게 “나와 결혼해달라”고 졸라댔다. 하지만 윤 양의 마음은 확고해 “이미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할 뿐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윤 양이 자신의 청혼을 한사코 거절하자 임준혁은 윤 양을 강제로 욕보임으로써 자기 여자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윤 양은 거세게 반항했고 화를 억누르지 못한 임준혁은 소지하고 있던 잭나이프로 윤 양의 허벅지를 찌르며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혼인을 강요했다. 그러나 윤 양은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결국 임준혁은 윤 양의 목을 졸라 실신시키기에 이른다. 임준혁은 윤 양의 호흡이 잠시 멈춘 것을 보고 죽었다고 판단,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창문 밖으로 윤 양을 던져버린 것이었다.”
수사팀은 옆 객실에 투숙했던 손님으로부터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진술도 확보, 임 씨의 죄명을 살인으로 변경해 검찰에 송치했다.
1971년 11월 10일 서울형사지법 합의7부 정기성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검사는 임 씨에게 살인죄를 적용, 사형을 구형했다. ‘피고인은 윤 양을 욕보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17층 높이에서 떨어뜨린 뒤 사체가 산산조각이 난 줄 알고 교묘히 자살로 꾸몄다. 타살임이 발각된 후에도 피고인은 추호의 뉘우침과 반성이 없이 비열하게 자신의 죄책을 피하려 하는 등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임 씨는 이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며 자신의 혐의를 완전히 부인했다. 임 씨는 윤 양을 호텔 방으로 데려간 이유에 대해 “좋아하는 듯하다가 살짝 도망가려는 윤 양의 콧대를 꺾기 위해서였다. 강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범행을 자백한 부분에 대해서도 “중부경찰서 B 경감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죽도록 사랑한 윤 양을 죽일리 있겠나. 칼로 찌르지도, 목을 조르지도 않았다”고 강변했다.
임 씨 측 변호인은 살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맞섰다. 변호인은 그 증거로 △강간을 시도했다는 침대가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점 △침대나 바닥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윤 양을 찔렀다는 잭나이프가 발견되지 않은 점 △사체에 방어흔이 없고 임 씨의 몸에도 할퀸 흔적 등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제시했다. 또 변호인 측은 “사체의 상처도 예리한 흉기에 의해 생긴 자상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열창으로 투신 당시 부러진 골반뼈에 의해 생긴 상처”라는 법의학자의 증언을 근거로 내세우며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검사는 “윤 양의 목에서 발견된 멍은 살아있을 때 생긴 것이고 허벅다리의 상처는 가사상태에서 생긴 것이라는 국과수의 감정결과에 따라 목을 졸라 실신시킨 뒤 죽은 것으로 잘못 알고 창 밖으로 던진 것이 분명하다”고 반박했다. “질식사의 흔적이 뚜렷하고 하반신 상처에 나타난 강한 생활반응으로 볼 때 피해자는 추락직전 이미 사망했거나 가사상태였다”는 법의학자의 소견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사건은 치열한 법정공방을 거치며 최종심까지 갔는데,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무려 일곱 차례나 파기환송을 거듭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법원이 임 씨에게 내린 최종형은 징역 10년이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