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史記 孔子世家 -공자의 일대기 - 번역문 全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다.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양흘(叔梁紇)을 낳았다. 흘은 안씨(顔氏)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이구(尼丘)에서 기도를 한 뒤, 공자를 얻게 되었다. 노 양공(魯襄公)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구(丘)라고 이름하였다. 자는 중니(仲尼)이고 성은 공씨(孔氏)이다.
구가 태어난 후 숙양흘이 세상을 떠나 방산(防山)에서 장사를 지냈다. 방산은 노나라의 동부에 있어서 공자는 아버지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의심하였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숨기었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곧 오보지구(五父之衢)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대개 (부모를 함께 매장하는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추읍 사람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소를 알려주어 그후에야 비로소 방산에 합장하였다.
공자가 아직 상복을 입고 있을 때, 계씨(季氏)가 명사(名士)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공자도 참석하러 갔다. 양호(陽虎)가 가로막고 말하였다. "계씨는 명사들에게 연회를 베풀려고 한 것이지 당신에게 베풀려는 것은 아니오." 이에 공자는 물러나고 말았다.
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대부 맹희자(孟釐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후계자인 의자(懿子)에게 훈계하며 말하였다. "공구(孔丘)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송나라에 있을 때 멸망당하였다. 그 조상 불보하(弗父何)는 원래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아우 여공(?公)에게 양보하였다.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길 때,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鼎)에 새겨놓은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 절을 한 뒤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중앙을 걷지 않고 담장가를 따라 다녀서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고 하였다.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才德)에 통달한 자가 있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희자(釐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이해에 계무자(季武子)가 죽고 계평자(季平子)가 대를 이어 경(卿)의 자리에 올랐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였다. 커서 일찍이 계씨(季氏)의 위리(委吏)로 있을 때, 그의 저울질은 공평하였고, 그가 직리(職吏)의 일을 맡고 있을 때 가축은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공(司空)이 되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노나라를 떠났다. 제(齊) 나라에서 배척되고, 송과 위(衛) 나라에서 쫓겨나고, 진(陳)과 채(蔡) 나라 사이에서 곤궁에 빠지자 이에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키다리'라고 부르고 그를 괴이하게 여겼다. 노나라가 다시 그를 잘 대우하니 이에 노나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하였다. "공자와 더불어 주(周)나라에 가기를 청합니다."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하나, 말 두 필, 시자 한 명을 주어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묻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때에 노자(老子)를 만났다고 한다. 공자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때, 노자가 그를 송별하며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부귀한 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 재물로써 하고, 어진 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 말로써 한다고 합니다. 나는 부귀하지 못하나 인자(仁者)라고 자처하기를 좋아하니 다음 말로써 그대를 전송하겠습니다. '총명하고 깊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험이 따르는데 이는 남을 잘 비판하기 때문이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결점을 잘 지적해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녀된 자는 아버지 뻘 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사람의 신하된 자는 임금 앞에서 자기를 치켜세우지 않는 법입니다.'" 공자가 주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니 제자들이 더욱 늘어났다.
이때에 진 평공(晉平公)이 음탕하였으므로 육경(六卿)이 권력을 잡고 동쪽으로 제후들을 공격하였다. 초 영왕(楚靈王)은 군대가 강하여서 중국(中國)을 침략하였다. 제나라는 대국으로 노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노나라는 약소하여 초(楚)나라에 붙으면 진(晉)나라가 노하였고, 진(晉)나라에 붙으면 초나라가 침공하였고, 제나라를 경계하지 않으면 제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침략하였다.
노 소공(魯昭公) 20년, 공자는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제 경공(齊景公)이 안영(晏?)과 함께 노나라에 갔는데,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 목공(秦穆公)은 나라도 작고 외진 지역에 위치하였지만 패자(覇者)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진(秦)나라는 비록 나라는 작아도 그 뜻이 원대하였고, 비록 외진 곳에 처하였어도 정치를 베푸는 것이 매우 정당하였습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몸소 등용하여 대부(大夫)의 벼슬자리를 내리고 감옥에서 석방시켜 더불어 3일간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면 (목공은) 왕(王)도 될 수 있었는데, 패자가 된 것은 오히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경공은 매우 기뻐하였다.
공자가 35세 되었을 때,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昭伯)과 닭싸움 끝에 노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대를 이끌고 평자를 공격하자 평자는 맹씨(孟氏), 숙손씨(叔孫氏)와 연합하여 3가(家)가 함께 소공을 공격하였다. 소공의 군대는 패해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乾侯)에 거하도록 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경공(景公)과 통하려고 하였다.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토론하였는데 "소(韶)"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워,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경공이 말하였다. "옳은 말이오! 만약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소!" 다른 날 경공이 다시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가 말하였다. "정치의 요점은 재물을 절제하는 데 있습니다. " 경공은 기뻐하며 장차 이계(尼谿)의 땅에 공자를 봉하려고 하였다. 안영이 나서며 말하였다. "무릇 유학자는 말재간이 있고 융통성을 잘 부려 법으로 규제할 수 없으며, 거만하고 제멋대로 하니 아랫사람으로 두기 어려우며, 상례를 중시하여 슬픔을 다한다며 파산까지 하면서 큰 장례를 치르니 그들의 예법을 풍속으로 삼기 어렵고, 도처에 유세 다니며 관직이나 후한 녹을 바라니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도 없습니다. 현자(賢者)가 사라진 이래로 주(周) 왕실이 쇠미해졌고 예악(禮樂)이 붕괴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를 성대히 꾸미고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은 몇 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으며 평생을 다해도 그 예를 터득할 수 없습니다. 군주께서 그를 채용하여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려고 하신다면 이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후 경공은 공자를 공손히 접견하였으나 다시는 예를 묻지 않았다. 훗날 경공이 공자를 붙잡고 말하였다. "내가 그대를 계씨(季氏)와 똑같은 지위로 대우하는 것은 할 수가 없소"라고 하며 공자에게 계씨와 맹씨(孟氏) 중간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공자도 이 소문을 들었다. 경공이 말하였다. "나는 늙었소. 그대를 등용할 수가 없소이다." 이리하여 공자는 드디어 그곳을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의 나이 42세 때, 노 소공이 간후에서 죽고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즉위하였다. 정공 5년 여름, 계평자가 죽고 환자(桓子)가 자리를 이었다. 계환자(季桓子)는 우물을 파다가 흙으로 만든 그릇을 얻었다. 그 안에 양(羊)과 같은 것이 있었는데 공자에게 "개를 얻었다"라고 말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것은 양입니다. 제가 듣기로 산의 요괴는 기(夔)와 망량(罔?)이고, 물의 요괴는 용(龍)과 망상(罔象)이며, 흙의 요괴는 분양(墳羊)입니다."
오(吳)나라가 월(越)나라를 공격해서 수도 회계(會稽)를 격파하여 수레 하나에 가득 찰 만큼 큰 해골을 얻었다. 오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공자에게 물었다. "해골은 누구의 것이 가장 큽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우(禹)임금이 회계산(會稽山)에서 여러 신(神)들을 불러보았을 때 방풍씨(防風氏)가 늦게 오자 우임금이 그를 죽였는데 그 해골이 수레 하나에 가득 찼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장 큰 해골이오." 오나라의 사자가 말하였다. "누가 신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산천의 신령은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려서 천하에 복을 가져올 수 있으니 그 산천을 지키고 제사를 책임지는 것이 신이며,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을 지키는 것이 공후(公侯)인데 이는 모두 왕자(王者)에 속하오." 사자가 말하였다. "방풍씨는 무엇을 지켰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왕망씨(汪罔氏)의 군장(君長)은 봉산(封山)과 우산(?山)을 지켰는데 그는 성이 희씨(釐氏)였소. 우(虞), 하(夏), 상(商) 나라 때에는 왕망(汪罔), 주(周)나라 때에는 장적(長翟)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대인(大人)이라고 하오." 사자가 말하였다. "사람들의 키는 어느 정도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초요씨(?僥氏)는 3척(尺)으로 가장 작고, 가장 큰 사람이라도 이것의 10배를 넘지 않는데 이것이 가장 큰 키요." 이에 오나라의 사자가 말하였다. "정말 훌륭하신 성인이십니다!"
환자(桓子)가 총애하는 신하 중에 중양회(仲梁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호(陽虎)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호는 중양회를 내쫓으려고 하였으나 공산불뉴(公山不?)가 그것을 말렸다. 그해 가을, 중양회가 더욱 교만해지자 양호는 그를 체포하였다. 환자가 노하자 양호는 환자마저 가두었는데, 더불어 맹약을 한 연후에야 그를 풀어주었다. 양호는 이로 인해서 더욱 계씨(季氏)를 가볍게 여겼다. 계씨 또한 분수를 모르고 공실(公室)보다 지나치게 행동하였기 때문에 배신(陪臣)이 국정을 잡은 꼴이 되었다. 이에 노나라에서는 대부(大夫) 이하 모두가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편찬하였다. 제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글을 배우지 않은 자가 없었다.
노 정공 8년, 공산불뉴는 계씨에게 뜻을 얻지 못하자 양호에게 의탁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켜 삼환(三桓)의 적장자를 폐하고 평소 양호와 사이가 좋은 서자를 세우고자 하여 마침내 계환자를 체포하였다. 환자는 그를 속여 도망칠 수 있었다. 정공 9년, 양호는 계획이 실패하자 제나라로 도망갔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50세였다.
공산불뉴는 계씨의 비(費)에서 계씨에게 반기를 들고, 사람을 시켜 자기를 도와달라고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도를 추구한 지 오래되었고,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 하였으나 아무도 자신을 등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공자는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풍(?)과 호(鎬)처럼 그렇게 작은 지방에서 왕업을 일으켰다. 지금 비 땅은 비록 작기는 하지만 대체로 (풍, 호와) 같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면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로(子路)는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공자를 말렸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것이 어찌 무용한 일이겠는가? 그가 만약 나를 등용한다면 나는 훌륭한 동방의 주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결국 가지 않았다.
그후 정공(定公)은 공자를 중도(中都)의 장(長)으로 삼았는데, 1년 만에 사방이 모두 공자의 통치방법을 따랐다. 공자는 중도의 장에서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정공 10년 봄, 제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그해 여름, 제나라의 대부 여서(黎?)가 경공(景公)에게 말하였다. "노나라가 공구(孔丘)를 중용하였으니 그 세가 반드시 제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이에 노나라에 사자를 보내 친목을 도모하기로 하고 협곡(夾谷)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노 정공은 장차 수레를 타고 아무런 방비 없이 그곳에 가려고 하였다. 그때 공자는 재상(宰相)의 일을 임시로 보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듣기에 문사(文事)에는 반드시 무(武)를 갖추어야 하며, 무사(武事)에는 반드시 문(文)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제후가 국경을 나설 때 반드시 문무관원을 수행시켰다고 합니다. 좌우사마(左右司馬)를 대동하고 가십시오." 정공이 "그렇게 하겠소"라고 말하고 좌우사마를 데리고 갔다. 정공이 협곡에서 제 경공과 만났다. 제사에 쓸 고대(高臺)를 마련하고 흙 계단을 3단 만든 뒤 제 경공과 노 정공은 예에 따라 상견례를 하였다.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대 위에 올라 술잔을 주고받는 예가 끝나자 제나라의 관리가 앞으로 달려나와 말하였다. "사방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옵소서." 경공이 말하였다. "좋다." 그랬더니 깃발과 우불(羽?), 창칼과 방패를 든 무리가 북을 치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나왔다. 공자가 빨리 앞으로 나와 한 발에 한 계단씩 빠른 걸음으로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긴 소매를 쳐들고 말하였다.
"두 군주께서 친목을 위해서 만나셨는데 어찌하여 여기서 이적(夷狄)의 음악을 연주하는가! 물러가게 명하시오!" 관리가 그들을 물러나게 하였으나 그들이 물러가지 않자 좌우의 수행원들이 안자(晏子)와 경공의 눈치를 살폈다. 경공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그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조금 후 제나라의 관리가 앞으로 달려나와 말하였다. "청컨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옵소서." 경공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라." 광대와 난쟁이가 재주를 부리며 앞으로 나왔다. 공자가 빨리 달려나아가 한 발에 한 계단씩 빠른 걸음으로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말하였다. "필부로써 제후를 현혹케 하는 자는 마땅히 처형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처형할 것을 명하시기를 바랍니다!" 관리가 그들의 허리를 두 동강을 내고 말았다. 공자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보자 경공은 도의나 이론 면에서 상대방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면서도 감탄하였다. 돌아와서는 크게 두려워하며 군신들에게 말하였다. "노나라의 신하는 군자의 도로써 그 군주를 보필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이적(夷狄)의 도로써 과인을 가르쳐서 노군(魯君)에게 죄를 짓게 하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한 관리가 나와서 말하였다. "군자는 과오를 범하면 실질적인 물증으로써 사죄하는데, 소인은 과실을 저지르면 허례적인 말로만 사죄한다고 합니다. 군주께서 그 일로 마음이 편하지 않으시거든 실질적인 물건을 내놓고 사과하십시오." 이에 제 경공은 곧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운(?), 민양(汶陽), 구음(龜陰)의 땅을 반환함으로써 노나라에 사죄하였다.
정공 13년 여름, 공자는 정공에게 말하였다. "신하는 무기를 비축해서는 안 되고, 대부는 100치(雉)의 성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중유(仲由)를 계씨의 가신으로 임명시켜 삼도(三都)를 파괴하려고 하였다. 숙손씨(叔孫氏)가 먼저 후(?)를 허물었고, 계씨가 곧 비(費)를 파괴하려고 하였고, 공산불뉴와 숙손첩(叔孫輒)은 비인(費人)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습격하였다. 정공은 세 아들과 더불어 계씨의 궁으로 피신하여 계무자(季武子)의 누대에 올랐다. 비인(費人)들이 그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정공의 누대 옆에까지 들어왔다. 공자는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에게 명해서 격퇴하도록 하자 비인들이 패퇴하였다. 노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고멸(姑蔑)에서 격파하였다. 공산불뉴와 숙손첩은 제나라로 도망쳤고, 드디어 비를 함락시켰다. 장차 성(成)을 격파하려고 할 때 공렴거보(公斂處父)가 맹손(孟孫)에게 말하였다. "성읍을 격파하면 제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북문까지 쳐들어올 것입니다. 또 성읍은 맹씨(孟氏)의 보루라, 성읍이 없으면 맹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읍의 성을 파괴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월, 노 정공은 성읍의 성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정공 14년, 공자는 56세의 나이로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제자가 물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화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이 찾아와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런 말이 있다. 그러나 '귀한 신분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는 데에 낙이 있다'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얼마 후, 공자는 노나라의 정사를 문란케 한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다. 남녀가 길을 갈 때 따로 걸었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어졌다. 사방에서 읍에 찾아오는 여행자도 관리에게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모두 잘 접대해서 만족해 하며 돌아가게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공자가 정치를 하면 노나라는 반드시 패권을 잡을 것이다. 노나라가 패권을 잡게 되면 우리 땅이 가까우니 우리가 먼저 병합될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먼저 약간의 땅을 노나라에 내주지 않는가?" 여서(黎?)가 말하였다. "먼저 시험삼아 (노나라의 선정을) 방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해해 보아도 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땅을 내놓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미녀 80명을 뽑아 모두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강락무(康樂舞)"를 가르쳐서 무늬 있는 말 120필과 함께 노나라 군주에게 보냈다.
무녀들과 아름다운 마차들을 우선 노나라의 도성 남쪽 높은 문 밖에 늘어놓았다. 계환자(季桓子)는 평복 차림으로 몰래 몇 차례 가서 그것을 살펴보고, 장차 접수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노나라 군주와 각 지역을 순회한다는 핑계를 대고, 실제로는 그곳으로 가서 하루 종일 관람하고, 정사는 게을리 하였다. 자로가 말하였다. "선생님이 노나라를 떠날 때가 왔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노나라 군주는 이제 곧 교제(郊祭)를 지낼텐데 만약 그때 군주가 희생 제물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면 나는 그대로 여기에 남을 것이다." 환자(桓子)는 결국 제나라의 무녀들을 받아들이고는 사흘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교제를 지내고도 그 희생 제물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공자는 드디어 노나라를 떠나 둔(屯)에서 하루를 묵었다. 악사 기(己)가 공자를 전송하며 말하였다. "선생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떠나십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노래로 대답해도 괜찮겠는가?" 공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군주가 여인의 말을 믿으면 군자는 떠나가고,
군주가 여인을 너무 가까이하면 신하와 나라는 망하도다.
유유히 자적하며 이렇게 세월이나 보내리라.
악사 기가 돌아오자 환자가 물었다. "공자는 또 무엇이라고 하던가?" 기가 사실대로 고하였다. 환자는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공자는 내가 제나라의 무녀를 받아들인 것을 가지고 나를 책망하고 있구나!"
공자가 드디어 위(衛)나라에 도착해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 영공(衛靈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노나라에 있을 때 봉록을 얼마나 받았소?" 공자가 대답하였다. "조(곡식) 6만 두(斗)를 받았습니다." 위(衛)나라에서도 역시 조 6만 두의 봉록을 주었다. 공자가 이곳에 거한 지 얼마 안 되어 누가 위 영공에게 공자를 참소하였다. 영공이 공손여가(公孫余假)에게 무장한 채 출입하며 공자를 감시하게 하였다. 공자는 억울한 누명이나 쓰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10달을 머문 뒤 위(衛)나라를 떠났다.
공자가 장차 진(陳)나라로 가려고 광(匡)을 지나갔다. 이때 안각(顔刻)이 말을 몰았는데 말 채찍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전에 제가 이곳에 왔을 때는 저 파손된 성곽의 틈 사이로 들어왔었습니다." 광(匡) 지역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또 온 것이라고 여겼다. 양호는 일찍이 광 지역 사람들에게 포악하게 대하였었다. 광 지역 사람들은 이에 드디어 공자의 앞길을 막았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공자는 5일간이나 포위당해 있었다. 안연(顔淵)이 뒤따라 도착하자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자네가 난중에 이미 죽은 줄로 알았어." 안연이 말하였다. "선생님이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무모하게 죽겠습니까?" 광 지역 사람들이 공자를 향하여 더욱 급박하게 포위망을 좁혀오자 제자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문왕(文王)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려고 하셨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이 문(文)을 전승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공자는 사자를 영무자(寧武子)에게 보내어 위(衛)나라의 신하가 되게 한 후에야 비로소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공자는 광 땅을 떠난 뒤 곧 포(蒲)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한 달 남짓 머문 후 다시 위(衛)나라로 돌아와 거백옥(?伯玉)의 집에 머물렀다. 위 영공에게는 남자(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일렀다. "사방의 군자들은 우리 군주와 친하게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그 부인을 만납니다. 우리 부인께서 뵙기를 원합니다." 공자는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부득이 가서 만났다. 부인은 휘장 안에 있었다. 공자가 문을 들어가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자, 부인도 휘장 안에서 답례하였는데 이때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돌아와서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원래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기왕에 부득이해서 만났으니 이제는 예로 대접해 주어야겠다." 자로는 역시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내가 만일 잘못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위(衛)나라에 머문 지 한달 남짓 되었을 때, 영공은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인 옹거(雍渠)를 시위관으로 옆에 태우고 궁문을 나서서 가는데, 공자는 뒷차를 타고 따라오게 하면서 거드럼을 피우고 뽐내며 시내를 지나갔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이곳의 정치환경에 실망하고 위나라를 떠나서 조(曹)나라로 갔다. 이해에 노 정공(魯定公)이 죽었다.
공자는 조(曹)나라를 떠나 송(宋)나라로 갔다. 공자는 제자들과 큰 나무 아래에서 예의에 대해서 강습하였다. 송나라 사마(司馬) 환퇴(桓?)가 공자를 죽이려 하였고 그 나무도 뽑아버렸다. 이에 공자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말하였다.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이을 사명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공자가 정(鄭)나라에 갔는데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서 홀로 성곽(城郭)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子貢)에게 말하였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요(陶)와 닮았고, 그 어깨는 자산(子産)과 닮았어요.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禹)임금보다 3촌(寸)이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은 이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고하였다. 공자는 흔쾌히 웃으며 말하였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고 하였다는데, 그것은 정말 그랬었지! 그랬었구말구!"
공자는 드디어 진(陳)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머물렀다. 1년 남짓 되었을 때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진(陳)나라를 쳐서 세 읍을 빼앗아 돌아갔다. 진(晉)나라의 조앙(趙?)은 조가(朝歌)를 공격하였다. 초나라는 채(蔡)나라를 포위하였고, 채나라는 오나라의 땅으로 옮겨가서 오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오나라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회계(會稽)에서 패배시켰다.
어느날 매 한 마리가 진(陳)나라 궁정에 떨어져 죽었는데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몸에 꽂혀 있었고 그 화살촉은 돌로 되어 있었으며, 화살의 길이는 1척 8촌이었다. 진 민공(陳?公)이 사자를 보내어서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매는 멀리서 왔습니다. 이것은 숙신(肅愼)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한 후에 여러 소수민족들과 교통하고 각각 그 지방의 특산물을 조공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직책과 의무를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에 숙신은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는데 길이가 1척 8촌이었습니다. 선왕께서는 그의 미덕을 표창하고자 숙신의 화살을 큰딸 대희(大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후 장녀를 우(虞)의 호공(胡公)과 결혼을 시키고, 우 호공을 진(陳)나라에 봉하였지요. 동성 제후들에게는 진귀한 옥을 나누어주어 친척의 도리를 다하게 하였고, 이성 제후들에게는 먼 지방에서 들어온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무왕에게 복종할 것을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陳)나라에게는 숙신의 화살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 진 민공이 시험삼아 옛 창고에서 그 화살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것이 있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머문 지 3년, 때마침 진(晉)과 초(楚) 나라가 강함을 다투며 서로 차례로 진(陳)나라를 침범하였고, 오나라가 진(陳)나라를 침범할 때까지, 진(陳)나라는 항상 침공을 당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단지 일을 함에는 소홀함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취성이 있고, 그들은 초지를 잊지 않고 있다." 이에 공자는 진(陳)나라를 떠났다.
포(蒲)를 지날 때, 때마침 공숙씨(公叔氏)가 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포의 사람들이 공자의 앞길을 막았다. 제자 중에 공양유(公良孺)라는 자가 있어 개인의 수레 다섯 대를 가지고 공자를 따라 주유하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사람됨이 어질며 용기와 힘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였다. "내 이전에 선생님을 모시고 광(匡)에서 난을 당했었는데, 오늘 또다시 여기서 위험에 부딪히니 실로 운명인가보다. 내 선생님과 함께 다시 위험에 빠지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싸움이 심히 격해졌다. 포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공자에게 말하였다. "만일 위(衛)나라로 가지 않는다면 그대를 놓아주겠소." 공자가 맹약하자 그들은 공자 일행을 동문(東門)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공자는 끝내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말하였다. "맹약을 저버려도 됩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강요된 맹약은 신(神)도 인정하지 않는다."
위 영공(衛靈公)은 공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교외까지 나가 영접하며 물었다. "포(蒲)를 공격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있습니다." 영공이 말하였다. "우리 대부(大夫)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포는 위(衛)나라가 진(晉)과 초 나라를 방어하는 요지인데 위나라가 직접 그곳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그곳의 장정들은 모두 위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의지가 있으며, 부녀자들도 그들의 서하(西河) 땅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토벌하려는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우두머리 4-5명에 불과합니다." 영공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그러나 영공은 포를 공격하지 않았다.
영공은 늙어 정사에 태만하였고, 또한 공자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공자는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만약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으면, 그 나라는 단 일년 동안에 자리가 바로잡힐 것이요, 3년이면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날텐데." 공자는 위나라를 떠났다.
불힐(佛?)은 중모(中牟) 고을의 지방장관으로 있었다. 진(晉)나라의 조간자(趙簡子)가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격파하려 하자 중모에서 조간자에게 불복하였으므로 간자는 이 지역을 공격하였다. 불힐이 이에 중모를 근거지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협조를 구하고자 공자를 초빙하였다. 공자는 이에 응하려고 하였다. 자로가 말하였다.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는 '스스로 좋지 못한 일을 한 자에게 군자는 가지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불힐은 친히 중모에서 반기를 들었는데도 선생님께서 가려고 하시니 이는 어찌 된 연유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또한 진정으로 강한 것은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진정으로 하얀 것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 어찌 쓸모없는 박[匏]이 되란 말이냐? 어찌 매달려 있기만 하고 사람에게 먹히지 않을 수 있는가 말이다."
공자가 경(磬)을 연주하였다. 그때 망태를 메고 문 앞을 지나가던 자가 듣고 말하였다. "깊은 생각에 빠졌구나, 경을 연주하는 이여! 쨍강쨍강,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공자가 사양자(師襄子)로부터 거문고 타기를 배웠는데 열흘 동안 진전이 없었다. 사양자가 말하였다. "이제는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이미 그 곡조는 익혔으나 아직 그 연주하는 술수는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사양자가 말하였다. "이제는 그 연주하는 술수를 익혔으니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그 곡조의 뜻을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사양자가 말하였다. "이제는 곡조의 뜻을 익혔으니 다른 곡조를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이 곡중인(曲中人)의 사람됨을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공자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깊이 생각하였고, 또 유쾌하게 원대한 뜻을 바라보게 되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는 그 곡중인의 사람됨을 알았습니다. 피부는 검고, 키는 크며, 눈은 빛나고 멀리 바라보는데 마치 사방 제후국을 다스리는 것 같았으니, 이는 문왕(文王)이 아니면 그 누구겠습니까!" 사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며 말하였다. "원래 나의 은사님께서도 이것은 "문왕조(文王操)"라고 이르셨습니다."
공자는 위(衛)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하자 장차 서쪽으로 가서 진(晉)나라의 조간자를 만나려고 하였다. 황하에 이르러서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피살된 소식을 듣고서 탄식해서 말하였다. "아름답구나 황하여, 넓고 넓도다! 내가 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는 것은 또한 운명이로다!" 자공이 달려나아가 물었다. "이제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아직 뜻을 얻지 못했을 때 모름지기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정치를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뜻을 이루자 도리어 그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내가 듣기로 배를 갈라 어린 것을 죽이면 기린(麒麟)이 교외에 이르지 아니하고, 연못을 마르게 하여 고기잡이를 하면 교룡(蛟龍)이 운우(雲雨)를 일으켜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등지를 뒤엎어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군자는 자기와 같은 무리가 상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대저 조수(鳥獸)도 그 의롭지 못한 것을 오히려 피할 줄 아는데 하물며 이 공구(孔丘)에게서랴!" 이에 추향(?鄕)에 되돌아가 쉬면서 "추조(?操)"를 지어 두명독과 순화를 애도하였다. 후에 공자는 위(衛)나라로 돌아가 거백옥(?伯玉)의 집에서 살았다.
어느날 위 영공(衛靈公)이 군대의 진법(陣法)을 물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제사 지내는 일은 일찍이 들었으나, 군사의 일은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 영공이 공자와 더불어 이야기하다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자 그것을 우러러보며 공자의 말에는 열중하지 않았다. 공자는 드디어 그곳을 떠나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
이해 여름 위 영공이 죽자 손자 첩(輒)을 세웠는데, 그가 위 출공(衛出公)이다. 6월, 조앙(趙?)이 태자 괴외(??)를 척(戚)으로 받아들였다. 조앙의 명을 받은 양호(陽虎)가 태자에게 문(?)을 입히고, 여덟 명에게 최질(衰?)을 입혀 위(衛)나라에서 온 영접자로 가장하여 울며 척으로 들어와 드디어 거기에서 머물러 살게 되었다. 겨울에 채(蔡)나라는 주래(州來)로 천도하였다. 그 이듬해는 노 애공(魯哀公) 3년으로 이때 공자의 나이는 60세였다. 제나라의 도움으로 위나라는 척을 포위하였는데, 그것은 위나라의 태자 괴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여름, 노나라의 환공(桓公)과 희공(釐公)의 묘에 불이 났다.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불을 껐다. 그때 공자는 진(陳)나라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재해는 틀림없이 환공과 희공의 묘에서 났을 것이다." 과연 뒤에 알아보니 그러하였다.
가을에 계환자(季桓子)가 병이 들었는데, 마차에 올라 노나라의 도성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전에 이 나라는 거의 흥성할 수가 있었는데 내가 공자를 등용해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까닭에 흥성하지 못하였다" 그는 또 후계자인 강자(康子)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노나라의 정권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거든 반드시 공자를 초청해 오도록 해라." 그후 며칠 지나서 계환자가 죽고 강자가 대를 이었다. 장례가 끝난 뒤 강자는 공자를 부르려고 하였다. 공지어(公之魚)가 말하였다. "지난날에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고자 하셨으나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여 결국 제후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또 그를 등용하려다가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면 이는 또다시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강자가 말하였다. "그러면 누구를 초빙하면 좋겠소?" 공지어가 말하였다. "반드시 염구(?求)를 부르십시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염구를 불렀다. 염구가 초빙에 응하려고 하자 공자가 말하였다. "우리 노나라 사람이 구(求)를 부르는 것을 보니 이것은 작게 등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크게 등용하려는 것이리라." 이날 공자는 또 말하였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행하는 것에서는 소홀하고 거칠며, 문장은 훌륭하니 나는 어떻게 그들을 지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자공(子貢)은 공자에게 노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있음을 알고 염구를 전송할 때 부탁하여 말하였다. "곧 등용되면 선생님을 모셔가도록 해주시오."
염구가 가고 다음해에 공자는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옮아갔다. 채 소공(蔡昭公)이 장차 오나라에 가려고 하였는데, 이는 오나라 왕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소공이 신하들을 속이고 주래(州來)로 천도하였는데, 지금 다시 오나라로 가려고 하자 대부들이 또 천도할까 두려워하였고 마침내 공손편(公孫翩)이 소공을 쏘아 죽였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침공하였다. 가을에는 제 경공(齊景公)이 죽었다.
다음해 공자는 채나라에서 섭(葉)으로 갔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정치란 먼 데 있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있습니다." 훗날 섭공은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을 물었으나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유(由)야, 너는 왜 그는 사람됨이 도를 배우는 데 권태를 느끼지 않고, 사람을 깨우치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으며, 일에 열중하여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으면서, 늙어가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공자는 섭(葉)을 떠나 채나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같이 밭을 가는 것을 보았다. 공자는 그 사람들이 은자(隱者)라고 생각하여 자로로 하여금 그들에게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물어보도록 하였다. 장저가 자로에게 물었다. "수레 위의 고삐를 잡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공자이십니다." "그가 노나라의 공자입니까?"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루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걸익이 자로를 향하여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중유(仲由)입니다." "당신은 공자의 제자입니까?" "그렇습니다." "천하가 온통 어지러운데, 그 누가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장저와 걸익은 이렇게 말하고 계속해서 자기네들이 하던 흙으로 씨를 덮는 일을 하였다. 자로가 이들이 한 말을 공자에게 알리니 공자가 실망해서 말하였다. "사람이란 인간 사회를 피해서 짐승들과 무리를 같이하여 살 수는 없다. 천하에 도가 통한다면 나도 이를 바꾸려고 여러 나라로 쫓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후 어느날 자로가 길을 가다가 다래끼를 메고 있는 노인을 만나 물었다. "우리 선생님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 노인이 말하였다.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구별하지 못할 터인데, 당신의 선생이 누군지 내가 어찌 알겠소!" 그는 계속 지팡이를 세워두고 풀을 뽑았다. 자로가 이를 고하자 공자가 말하였다. "그는 은자임에 틀림없다." 다시 가보았으나 그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공자가 채나라로 옮긴 지 3년이 되던 해에 오나라는 진(陳)나라를 공격하였다. 초나라는 진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진보(陳父)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초나라에서는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 지역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빙하였다. 공자가 가서 예를 갖추려고 하자,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공자는 현인이다. 그가 비난하는 바는 모두 제후들의 잘못과 들어맞는다. 지금 그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에 오래 머물고 있는데, 그간 여러 대부들이 한 행실은 모두 공자의 뜻에 맞지 않는다. 오늘의 초나라는 큰 나라인데 공자를 초빙하려고 한다.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되면 우리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일하는 대부들은 모두 위험해질 것이다."
이에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각각 노역자들을 보내어 들판에서 공자를 포위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초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어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학술강의도 하고 책도 낭송하고 거문고도 타면서 지냈다. 자로가 화가 나서 공자에게 말하였다.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곤궁해도 절조를 지키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탈선한다." 자공이 화가 나서 얼굴 색이 변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사(賜)야, 너는 내가 박학다식하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나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을 가지고 전체의 지식을 통찰한 것뿐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마음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곧 자로를 불러서 물었다. "『시(詩)』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자로가 말하였다. "아마도 우리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게지요. 아마도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게지요."
공자가 말하였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중유(仲由)야, 만약에 어진 사람이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는다면 어째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또 만약에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장애 없이 실행할 수 있다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심장을 해부당하였겠느냐?" 자로가 나가자 자공이 들어와 공자를 뵈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사(賜)야,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자신의 도를 약간 낮추지 않으십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사야, 훌륭한 농부가 비록 씨 뿌리기에 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곡식을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고, 훌륭한 장인(匠人)이 비록 정교한 솜씨를 가졌을지라도 반드시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군자가 그 도를 잘 닦아서 기강을 세우고 잘 통리(統理)할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세상에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너는 너의 도는 닦지 않고서, 스스로의 도를 낮추어서까지 남에게 수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야, 너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회(顔回)가 들어와서 공자를 뵈었다. 공자가 물었다. "회야,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안회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도를 추진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후에 더욱 군자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치욕입니다. 그리고 무릇 도가 잘 닦여진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수치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후에 더욱더 군자의 참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공자는 기뻐서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던가, 안씨 집안의 자제여! 자네가 만약 큰 부자가 된다면 나는 자네의 재무 관리자가 되겠네." 그리하여 자공을 초나라에 보냈다. 초 소왕(楚昭王)이 군대를 보내 공자를 보호하고 맞이하자 비로소 공자는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왕이 장차 서사(書社)의 땅 700리로 공자를 봉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초나라의 재상 자서(子西)가 말하였다. "왕의 사신으로 제후에게 보낼 사람 중에서 자공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을 보필할 신하 중에서 안회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 "왕의 장수 중에서 자로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의 장관 중에서 재여(宰予)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서는 이어서 말하였다. "하물며 초나라의 선조가 주(周)나라로부터 봉함을 받았는데 그때 봉호는 자남작(子男爵)이었고, 봉지는 50리였습니다. 지금 공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치국방법을 말하고 주공(周公), 소공(召公)의 덕치를 본받고 있으니, 왕께서 만약 공자를 등용하신다면 초나라가 어떻게 대대로 당당하게 다스려온 사방 수천리의 땅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문왕(文王)은 풍(?) 땅에서 일어났고, 무왕(武王)은 호(鎬) 땅에서 일어났지만 백리밖에 안 되는 작은 땅을 가진 군주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공자가 근거할 땅을 얻고 저렇게 많은 현명한 제자들이 그를 보좌한다면 이것은 우리 초나라에 결코 좋은 일이 못 될 것입니다."
소왕은 이 말을 듣고 본래의 계획을 취소하였다. 그해 가을, 초 소왕은 성보(城父)에서 죽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接與)가 공자 앞을 지나가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했니!
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
두어라, 그만두어!
지금 정치하는 자 다 위험하니까!
공자는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하였으나 그가 급히 피해버려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때 공자는 초나라에서 위(衛)나라로 돌아왔다. 이해 공자의 나이는 63세였고, 때는 노 애공 6년이었다.
그 다음해 오나라는 노나라와 증(繒)에서 회합하고 노나라에게 제사에 쓸 백뢰(百牢)를 요구하였다. 태재(太宰) 비(?)가 계강자(季康子)를 소환하였다. 강자(康子)는 자공을 초나라로 보내어 응대케 함으로써 비로소 가축을 바치는 일을 모면하게 되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처럼 비슷하다." 이때 위나라의 군주 첩(輒)의 부친 괴외(??)는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국외에 망명중이었는데, 제후들은 위나라 군주에 대해 부친에게 양위해야 한다고 수 차례 책망하였다.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위나라 군주는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싶어하였다. 자로가 말하였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께 정사를 맡기고자 하는데 맡으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슨 일을 제일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하겠다." 자로가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을 절실하지 못하고 우원(迂遠)하다 하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무슨 명분을 바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정말 거칠구나, 유(由)야! 대저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성취되지 않으며, 일이 성취되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않고, 형벌이 적중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그래서 군자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명분에 부합되어야 하고,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군자의 말에는 경솔함이 없어야 한다."
그 다음해 염유(?有)는 계씨(季氏)의 명을 받고 장군이 되어 낭(郎)에서 제나라와 싸워서 이겼다. 계강자(季康子)가 말하였다. "그대는 군사에 관한 것을 배웠는가? 아니면 본래 그 방면에 재주가 있는 것인가?" 염유가 말하였다. "공자에게서 배웠습니다." 강자가 말하였다."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염유가 대답하였다. "공자를 등용하면 나라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정치방법은 백성들에게 시행하거나 신명에게 고하거나 간에 아무런 유감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나와 같은 이 길을 걷게 한다면 비록 수천 사(社)를 준다 해도 공자는 그 이익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공자를 초빙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그를 부르고자 하신다면 그를 신임하시어 소인들이 그를 방해하지 못하도록만 하신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이때 위(衛)나라의 공문자(孔文子)는 장차 태숙(太叔)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그 계책을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모른다고 사양하고, 곧 물러나 수레를 준비시켜 떠나면서 말하였다. "새는 나무를 선택하며 서식할 수 있지만 나무가 어찌 새를 택할 수 있겠는가?" 문자는 공자를 한사코 만류하였으나 마침 이때 계강자가 공화(公華), 공빈(公賓), 공림(公林)을 내쫓고 예물을 갖추어서 공자를 초빙하였으므로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노 애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정치의 근본은 신하를 잘 뽑는 데 있습니다." 계강자도 정치에 관해서 질문하자 공자가 말하였다. "정직한 사람을 뽑아서 부정직한 사람 위에 놓으면,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해집니다." 강자가 도적이 횡행함을 근심하자 공자가 말하였다. "진실로 당신 자신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백성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으며 공자 또한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시대에는 주(周) 왕실이 쇠퇴해져 예악(禮樂)은 폐지되었고, 『시』와 『서』가 흩어졌다. 이에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하여 서전(書傳)의 편차를 정하되, 위로는 요(堯)와 순(舜) 임금의 시대부터, 아래로는 진 목공(秦繆公)에 이르기까지 그 사적을 순서에 따라 정리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하(夏)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그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 후대인 기(杞)나라의 것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은(殷)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송(宋)나라의 것에 대해서는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만약에 기나라와 송나라의 문헌이 충분하였다면 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또 은과 하 나라 이래의 예가 손익(損益)된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차후로는 비록 백세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예제(禮制)의 변천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은나라는 질박함을 귀히 여겼고 주나라는 문화(文華)함을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주(周) 왕조는 하와 은 2대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문화는 참으로 풍성하고 화려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그러므로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는 공자로부터 처음으로 편찬되어 나왔다고 한다.
공자가 노나라의 태사(太師)에게 말하였다.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은 이해할 수 있다. 연주를 시작할 때에는 5음이 조화를 이루고, 그 다음으로는 청순하고 잘 어울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여운을 남김으로써 비로소 한 곡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 비로소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雅)」와 「송(頌)」이 각기 제자리를 찾았다."
옛날에는 시(詩)가 3,000여 편이었으나 공자에 이르러 그 중복된 것을 빼고 예의에 응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하였다. 위는 설(契)과 후직(后稷)에 관한 시이고, 중간은 은과 주 나라의 성대함을 서술한 시이며, 아래는 유왕(幽王)과 여왕(?王)의 실정(失政)에 관한 시에까지 이르렀다. 시의 내용은 임석(?席) 등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래서 "「풍(風)」은 「관저(關雎)」 편으로 시작하고, 「소아(小雅)」는 「녹명(鹿鳴)」 편으로 시작하고, 「대아(大雅)」는 「문왕(文王)」 편으로 시작하고, 「송(頌)」은 「청묘(淸廟)」 편으로 시작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정리한 305편의 시에 공자는 모두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부름으로써 "소(韶)", 「무(武)」, 「아(雅)」, 「송(頌)」의 음악에 맞추려고 하였다. 예와 악이 이로부터 회복되어 서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六藝)가 완성되었다.
공자는 만년에 『역(易)』을 좋아하여 「단(彖)」, 「계(繫)」, 「상(象)」, 「설괘(說卦)」, 「문언(文言)」 편을 정리하였다. 그는 죽간을 꿴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만큼 『역』을 무수히 읽었다. 그가 말하였다. "만약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을 더 준다면 나는 『역』에 대해서는 그 문사(文辭)와 의리(義理)에 다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교재로 삼아 가르쳤는데, 제자가 약 3,000명에 이르렀고, 그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안탁추(顔濁鄒)와 같이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받고도 72명의 제자 중에 들지 못한 자도 대단히 많았다.
공자는 네 방면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것은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이다. 그리고 네 가지를 금기시켰는데, 그것은 즉 '억측하지 말 것', '독단하지 말 것', '고집하지 말 것',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가 신중히 생각하였던 것은 곧 재계(齋戒), 전쟁, 질병이었다. 공자는 이익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익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운명과 결부시켜 말하거나 인덕(仁德)과 결부시켜 말하였다. 공자는 제자를 가르칠 때 발분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았고, 또 한 가지 문제를 가르쳐서 이와 유사한 다른 세 가지 문제를 물어오지 않으면, 다시 되풀이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공자는 향당(鄕黨)에서는 공손하여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과도 같았으나, 종묘나 조정에서는 조리 있게 말을 잘하면서도 오로지 신중히 하였다. 조정에서 상대부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태연하면서도 할 말을 능히 다하였으며, 하대부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온화하면서도 즐겁게 대하였다.
공자는 군주의 궁문을 들어갈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하였고, 그 앞으로 빨리 걸어나아갈 때에는 단정하게 예의를 차렸다. 왕이 그에게 손님을 접대하도록 명하면, 정성을 다하는 표정이었으며, 왕의 부름이 있을 때에는 마차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달려갔다.
공자는 생선이 상하였거나 고기가 부패하였거나 또는 아무렇게나 잡아서 멋대로 잘라놓은 고기는 먹지 않았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고, 상(喪)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할 때에는 배불리 먹은 일이 없었다. 곡(哭)한 날은 종일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사람이나 맹인을 보면 비록 그가 어린애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표정을 바꾸어 동정을 표시하였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덕을 닦지 않고, 학문을 강습하지 않고, 의로운 이치를 듣고도 좇아가 행하지 않고,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은 것, 이 몇 가지가 바로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라고 말하였다. 노래를 시켜보아서 잘 부르면 다시 부르게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를 따라 불렀다. 공자는 괴이한 것, 폭력, 문란한 것 그리고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의 시, 서, 예, 악에 대한 가르치심은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의 천도(天道)와 성명(性命)에 대한 가르치심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안연(顔淵)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학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깊이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앞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홀연 뒤에 가 있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사람을 잘 이끌어주시고, 풍부한 전적과 문장으로 나를 박학하게 해주시고, 예의와 도덕으로 나를 절제하도록 하시니, 내가 학문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 재주를 다하여 보았지만, 그러나 선생님의 학문은 탁연히 내 앞에 우뚝 서 있어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달항(達巷)이라는 어떤 당(黨)의 사람이 말하였다. "공자는 참으로 위대하도다. 그러나 아깝게도 박학하면서도 일예(一藝)에도 명성을 세우지 못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나는 어느 예(藝)로 명성을 세울까? 마부가 될까? 사수가 될까? 나는 마부가 되련다." 자뢰(子牢)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나는 등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기예를 배울 수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노 애공 14년 봄에 대야(大野)에서 수렵을 하였다. 숙손씨(叔孫氏)의 마부 서상(?商)이 괴상한 짐승을 잡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공자가 그것을 보고 말하였다. "그것은 기린이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것을 취하여 돌아왔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였다. "옛날처럼 황하에서 다시는 용이 도판(圖版)을 메고 나타나지 않고, 낙수(洛水)에서 다시는 거북이 서판(書版)을 지고 나타나지 않으니, 나의 희망도 이제는 끝나는가보다." 안연이 죽자 공자는 말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곡부(曲阜)의 서쪽에서 잡힌 기린을 보자 공자는말하였다. "도(道)를 행하려는 나의 희망도 이제는 다 끝났구나." 공자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구나!" 자공이 말하였다."어째서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십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래에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명에 이르고자 하였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뿐이 아니겠느냐!"
공자가 말하였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아닌가!" 또 말하였다.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다." 또 말하였다.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은 은거하여 세상사를 논하지 않았고, 행동은 깨끗하였으며, 자리에서 물러나 화를 면하는 방법도 시의적절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다르다.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
공자가 말하였다. "안 되지, 안 돼.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이것은 위로는 은공(隱公)에서 아래로는 애공(哀公) 14년까지 12공(十二公)의 시대를 포괄하였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나라를 종주로 하고 은나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그래서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주가 왕을 자칭하였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본래의 작위(爵位)인 자작(子爵)으로 칭하였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은 실제로는제후가 주나라의 천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수렵을 나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한 폄손(貶損)의 뜻은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하여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하여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하였을 때에도 문사상(文辭上)의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하였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해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 공자가 병이 나서 자공이 뵙기를 청하였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에 의지하여 문 앞을 거닐고 있다가 물었다. "사(賜)야,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그리고 탄식하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기둥이 부러진다는 말인가!
철인(哲人)이 죽어간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또 자공을 보고 말하였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고,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제 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그후 7일이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73세로, 그것은 노 애공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의 일이었다.
애공이 그를 애도하는 글을 지어 말하였다. "하늘도 무심하여 이 한 노인마저 남겨놓지 않고 데려가고, 나 한 사람만 여기다가 버려두어 외로움에 울게 하는구나! 아, 슬프다! 이부(尼父)여, 내 다시는 스스로에 얽매이지 않으리라!" 자공이 말하였다. "군주는 아마도 노나라에서 천명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시기를 '예법을 잃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명분을 잃으면 과오가 생긴다. 의지를 잃는 것은 혼란이고, 당위성을 잃는 것은 과실이다'라고 하셨는데, 살아 생전에 중용하지 못하고서 죽은 후에 애도하는 것은 곧 예의에 합당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또 제후의 신분으로 '나 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은 실로 명분에 맞는 말이 아니다."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의 사수(泗水) 부근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년상을 다 마치고 서로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는데, 헤어질 때 한바탕 통곡하고 각자 다시금 애도를 다하였으며, 어떤 제자는 다시 머무르기도 하였다. 오직 자공만은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6년을 더 지키다가 떠나갔다. 후에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무덤가에 와서 집을 짓고 산 사람들이 100여 가구나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곳을 '공자 마을'이라고 하였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으며, 많은 유생들도 이곳에 모여서 예의를 논하고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활 쏘기를 하였다. 공자의 무덤은 크기가 1경(頃)이나 되었다.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쓰던 내실은 훗날 공자의 묘(廟)로 만들어져, 공자가 사용하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서적 등이 소장되었는데, 그것은 한(漢)나라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고황제(高皇帝)가 노나라를 지나게 되었을 때 태뢰(太牢)로써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후 제후, 경대부,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연후에 정사에 임하였다.
공자는 이(鯉)를 낳았는데, 그의 자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伋)을 낳았는데, 그의 자는 자사(子思)이고,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宋)나라에서 고생을 하였고, 『중용(中庸)』을 지었다.
자사는 백(白)을 낳았는데, 백의 자는 자상(子上)이고, 47세에 죽었다. 자상은 구(求)를 낳았는데, 구의 자는 자가(子家)이고, 45세까지 살았다. 자가는 기(箕)를 낳았는데, 기의 자는 자경(子京)이고, 46세까지 살았다. 자경은 천(穿)을 낳았는데, 천의 자는 자고(子高)이고, 51세까지 살았다. 자고는 자신(子愼)을 낳았는데, 자신은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자신은 부(?)를 낳았는데 부는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진왕(陳王) 섭(涉)의 박사(博士)가 되었고, 진(陳)에서 죽었다.
부의 아우 자양(子襄)은 57세까지 살았는데, 일찍이 효혜황제(孝惠皇帝)의 박사가 되었다가 장사(長沙)의 태수로 옮겨갔다. 키가 9척 6촌이었다.
자양은 충(忠)을 낳았는데, 충은 57세까지 살았다. 충은 무(武)를 낳았고, 무는 연년(延年)과 안국(安國)을 낳았다. 안국은 지금의 황제의 박사가 되었다가, 관직이 임회(臨淮) 태수에까지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안국은 앙(?)을 낳았고, 앙은 환(驩)을 낳았다.
태사공은 말하였다.
"『시경』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라는 말이 있다. 내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항상 그를 동경하고 있다. 나는 공자(孔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禮器)를 참관하였고, 여러 유생들이 때때로 그 집에서 예를 익히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우러나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생존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일단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포의(布衣)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의 육예(六藝)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 공자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출처] 史記 - 孔子世家 -공자의 일대기 - 번역문 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