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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의 전략적 가치
번호 : 4527 글쓴이 : 산중호걸
조회 : 294 스크랩 : 0 날짜 : 2007.02.12 00:32
고당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면 당과 고구려 모두 안시성에 운명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당 태종은 안시성을 점령하기 위해 50만을 동원해 60일 동안 안시성 보다 높은 토산을 쌓았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고구려 전체병력의 2분의1 내지 3분의1에 해당하는 15만 대군을 보냈다. 이는 안시성이 그만큼 전략적으로 요충지 였기 때문이다.
안시성의 전략적 가치는 요동도행군 대총관인 이세적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이세적은 안시성을 우회하자는 이세민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 건안은 남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으며 우리군으의 양식은 모두 요동성에 있는데,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고구려군이 우리 보급로를 끊으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해 이를 함락시킨후, 건안성을 취해야 합니다."
이세적의 말처럼 안시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당군은 보급로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었다. 무턱대고 평양성으로 진격하다가 보급로가 차단되어 전멸당한 우중문의 전례를 이세민과 이세적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군은 전력을 기울여 안시성을 점령하고자 했다. 같은 이유로 고구려 역시 이곳 안시성 만큼은 지키고자 했다.
안시성전투는 3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수나라 백만대군도 점령 못한 요동성을 12일 만에 점령한 이세민과 당군이었지만 안시성 만큼은 쉽게 점령 못했다. 이세민은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높은 곳에서 안시성을 공격하게 했다. 50만대군이 60일동안 쌓아 올린 토산이었지만 양만춘과 고구려군은 기습공격을 통해 이 토산을 점령했다.
토산까지 빼앗기자 이세민은 안시성 점령을 포기했다. 이것은 곧 고구려 정복의 포기를 뜻했으며 당과 고구려의 첫 대결에서 고구려가 승리했음을 뜻했다. 안시성이 당의 총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가? 첫째, 안시성주 양만춘의 능력이었다. 이세민은 양만춘이 재능과 용맹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둘째, 안시성을 지키는 고구려 병사들의 투혼이었다. 주필산 전투에서 패해 당에 항복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안시성 사람들은 병사 한 명 한 명이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싸우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점령하기 어렵습니다." 고 했다. 그들의 말 처럼 안시성 군사들은 자신이 무너지면 가족이 노예가 된다는 생각에 더 치열하게 당과 싸웠던 것이다. 셋째,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온 15만 대군의 활약이었다. 이 활약 상 속에 주필산 전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출처 : 발해를 꿈꾸며 원문보기 글쓴이 : 대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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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호걸 김용만님의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을 읽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07.02.12 00:32
답글 돌부처 그 책에서 안시성전투를 재조명한 이유가 있는데 호걸님이 쓰신 글은 오히려 기존의 주장들과 다름이 없군요. 이세적이 언급한 바는 안시성의 가치를 말해주는게 아니라 오히려 건안성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07.02.12 00:54
답글 추모왕 글쎄요. 안시성의 전략적 가치는 645년 당시에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645년 전쟁은 주필산전투에서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이때 이미 당나라는 2개월 이상 주필산근처에서 포위당한 상태였습니다. 신성과 건안성, 요택, 천산산맥에 포위된 상태였죠. 그래서 어쩔수 없이 당나라는 안시성을 공략했어야 했습니다. 전략적가치가 있었던것 아니라 당나라가 포위된것이죠. 당시 기록을 보면 요동성 역시도 당나라로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07.02.12 16:51
답글 淸風溪 글 자체의 방향성은 근거가 뚜렷하다면 크게 관계가 없을 듯 합니다...글 게시하신 분께서 이야기 하셨듯 자신이 받아들인 의미대로 재구성하는 일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안시성 전투에 고구려와 당나라 모두 '운명'을 걸었다. '안시성 만큼은' 지키려고 했다. 고구려 정복의 '포기'를 뜻했으며... 등등의 표현은 성급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조금 더 다양한 자료들을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 합니다...^ㅡ^ 07.02.12 18:26
답글 산중호걸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 표현은 멋있게 써볼려고한 술수 였습니다. ^^;; 공부하는 과정에서 정리 목적으로 쓴글입니다. 보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07.02.12 19:28
돌부처 자신이 받아들인 의미대로 재구성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건 충분히 공감은 가지만...최대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독자의 예의이자 의무가 아닐까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스스로의 의미를 만든다면 독자의 오만이 아닐까요. 별 의미 없으니 혹여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07.02.13 00:18
율리우스카이사... .... 전쟁과역사 삼국편에서 본건데... 물론 제생각은 다르지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이후 지방세력을 약화시키기위해 군사들을 재배치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에게 이롭지만 전체적으로 보면은 해롭다. 즉 단결성을 헤쳐 수성전을 하는 군대에게는 거의 치명적이다. 하지만 안시성은 연개소문에게 항복도. 함락도 당하지 않아서 순수 고유성을 유지할수 있었고 이말은 단결성이나 이런 면에서 기타 먼저 함락당한 성이 갖지 못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성이 함락당하지 않았다. 07.02.12 22:20
답글 돌부처 그 책을 본적이 없지만...지방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군사를 재배치했다는 근거로 든 기록이 뭔가요? 순수고유성을 유지해서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참으로 순수하신 말씀을 책에서 서술하셨군요. 07.02.13 00:12
율리우스카이사... 물론 버티기만 한다고 될수 없죠. 그리고 제가 해줄수 있는 말은 실제적으로 요동성은 수양제에게 수십번 함락당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단지 지휘체계가 이상하게 되서 그런게 불가는 했던거죠. 만약에 수의 군사지휘 시스템에 당과비슷했다면 아니... 작전권이 일선지휘관에게 있었다면... 요동이 과연 버텨낼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의 군사력을 폄하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고구려의 군사력도 폄하하는것이라것을 마하고 싶군요. 수의 강력한 대군을 맞아 분전해서 승리한 고구려군.입니까? 아니면 그냥 백성을 끌어온 군대를 맞서 승리한 고구려군입니까? 07.02.12 22:23
답글 돌부처 고구려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외국에서 많은 기술자를 데려와 공성무기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준비도 많이 했고 군사도 강력했죠. 김용만선생님께서 예전에 지휘시스템문제에 이유가 있다는 언급을 잠깐 하셨는데...구체적인 말씀을 아끼시네요.^^;; 궁금~ 07.02.13 00:14
율리우스카이사...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수군은 실질적으로 정말 베테랑급입니다. 수양제의 진정벌 돌궐토벌 때부터 함께 했던 양소부대가 주축이된... 당시 양소부대는 거의 51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07.02.12 22:24
답글 티얼 그나마 저는 여기서 김용만 선생님의 논리를 가장 잘 표현하신 추모왕님의 말씀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다른 의견들은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제시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연개소문이 지방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도리어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취했다고 하셨는데 당시 연개소문 자신이 신흥무장세력을 중심으로 한 대외강경파인데다가 연개소문은 집권 후 바로 전쟁에 돌입해야 하는 등의 전후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전해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보이는군요. 07.02.13 03:52
답글 티얼 그리고 무엇보다 안시성이 그렇게 대단한 성이라면 왜 이세민은 계속 안시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건안성과 신성으로 한 눈(?)을 팔았던 걸까요? 게다가 이세민 자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안시성은 공격해서는 안 돼는 성이라고. 즉 함락시키기도 어렵고 침략군인 당나라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전략적인 비중이 큰 성이 아니라는 뜻인거죠. 07.02.13 03:54
답글 티얼 여기에 제 개인적인 사견을 하나 달자면 요동성이 함락되고 백암성이 항복한 것을 저는 연개소문이 적을 안시성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준비한 하나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아직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연구하는 중입니다만 실제로 안시성에서 일어났던 주필산 전투를 비롯한 다소 낮은 안시성의 전략적인 위치등을 고려한 포위전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07.02.13 03:57
답글 조조 요동성이 함락되고 백암성이 투항한 것이 고구려의 계략이었다.... 한단고기에서 백암성주 손대음이 적을 속이기 위해 거짓 투항을 했다는 내용은 잠깐 봤습니다. 이건 한번 파볼 가치가 보이네요. 하지만 요동성은 주몽의 창과 갑옷이 있던 곳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요동성을 일부러 내줄 가능성은 낮아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요동이 무너지자 백암성주 손대음을 거짓투항시켜서 당군을 안시성으로 유인한 것은 아닐까요? 07.02.13 04:13
답글 티얼 그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군요. 그런데 환단고기에 그런 구절이 있었나요? 보고싶은데 좀 올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07.02.13 06:29
티얼 그래도 일단 저는 아직까지는 요동성 함락-백암성 항복은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사실 얼마되지 않았는데 왜 연개소문 드라마 하기 전에 SBS에서 연개소문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해주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나온 기록 중에 요동성 함락 때 [성주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과, "그 남아 싸우던 자들이 다 죽었다."라는 기록을 보고 이런 확신을 하게됐습니다. 백암성주 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명백히 자신들의 패전인 고당전쟁의 승리를 부풀리기 위해 혈안이 된 당나라가 성주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큐멘터리에 나온대로 요동성이 그 전에 07.02.13 06:33
티얼 연개소문의 지시로 '소개'된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참고로 저는 마찬가지로 성주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현도, 개모성도 미리 신성방면으로 소개된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뭐, 일단은 저도 나름대로 연구 중입니다만;;; 07.02.13 06:34
티얼 그리고 왜 연개소문이 요동성에서 적을 막지 않고 굳이 안시성으로 적들을 유인했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을 해봤는데 저는 이에 대해 요동성이 평지성이고 안시성이 산성이라는데에 단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정의가 말한대로 고구려의 전략은 당나라를 완전히 포위하여 지구전으로 끌고가 적들을 지치게 만드는 건데 주필산 전투의 고구려 지원군에 숫자는 삼국사기에는 15만, 신당서에는 25만, 구당서에는 20만이라고 각각 기록되있어 아무리 많게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30만 이상이 넘어가는 당나라군대에 비해서는 숫적으로 열세인 상황이기에 요동성과 같이 주위가 탁 트인 평지에서 적의 대군을 포위하는 것은 무리이기 07.02.13 06:43
답글 티얼 에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홈그라운드의 장점을 최대로 살릴 수 있는 장소를 택했고 그렇기에 주위가 온통 험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적은 군대로도 적의 대군을 쉽게 포위할 수 있는 장소를 찾던 연개소문이 선택한 곳이 안시성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해봤습니다. 뭐, 계속 강조하지만 아직 연구해볼 곳이 많은 가설인데다가 요동성을 함락한 당나라가 왜 궁장령을 넘지못했는지도 여전히 의문이군요. 07.02.13 06:45
답글 티얼 솔직히 연개소문이 이런 작전을 구사한 것을 저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연개소문의 집권 방식 및 그의 파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연개소문은 온건파인 영류왕과 대귀족들을 참살하고 정권을 잡았죠. 고구려를 지키겠다는 모토 아래 말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연개소문의 신정권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예정된 적들의 대규모 침공 앞에 백성들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 즉 한마디로 적들의 공세를 요하-요동방어선에서 막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야만 백성들이 이 과격한 정권에 믿고 의지해 민심의 이반을 막을 수 있을거고 그래야 이들이 장기집권을 할 수 있을테니까요. 07.02.13 07:00
답글 티얼 그런데 이전 을지문덕처럼 만약 전 요동방어선을 방어하게 된다면 또다시 당나라 군대가 수양제가 그랬던 것처럼 전선은 교착될 것이고 결국 상대적으로 군대의 숫자에서 우월한 당나라 군대가 모든 성을 틀어막은 후 또 별동대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곧 물질적인 면을 제외하더라도 내지의 백성들에게 적들의 침공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을 던져줄 수도 있고 이는 곧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집권한 연개소문 정권에 타격을 줄 수 있고 더불어 연개소문 정권은 내지로 침공한 적의 대군을 살수대첩처럼 최단 시간내에 몰살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게되지요. 즉 자칫하면 적들의 물량 공세에 고구려가 오히려 적의 전략 끌려다닐 수 있는 상 07.02.13 06:56
답글 티얼 황이 벌어질 수 있고 연계소문이 이를 경계해 이런 전략을 내놓은 게 아닐까 합니다. 저는 그리고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비사성 함락 또한 보고 있습니다. 즉 일단 요동반도-압록강 방면으로 넓게 산개해있는 고구려 수군을 일단 압록강으로 집결시켜 일단 적의 대규모 선단을 피한 후 적들이 비사성을 함락해 안심하는 틈을 이용해 적의 동진을 막고 역포위를 한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저는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했던 구효충의 수군선단이 행방불명되고 장량의 평양도행군이 더 전진을 못하고 오히려 뒤에 있는 건안성 방면으로 후퇴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07.02.13 07:04
답글 돌부처 전략의 대전제는 보급로압박이 맞겠으나 요동성을 내주는 것이 전략의 일부라 보기에는 무리입니다. 당군을 몰아넣고 압박하게된 것은 요동성함락에 따른 약간의 수정?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백암성 또한 무리가 있는 것이 만약 손대음 항복이 계략이라면 그쪽으로 원군을 보낼 이유도 없고 원군이 입성할 이유도 없죠. 07.02.13 14:09
답글 돌부처 그리고 장량이 비사성 함락 후 건안성으로 간 것은 후퇴가 아니라 진군입니다. 장검이 건안성공략에 실패했기 때문에 장량이 투입된 것이죠. 여기서 한달간 공략이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비사성으로 물러갔습니다. 07.02.13 14:11
답글 티얼 글쎄요, 제가 알기로 당시 구효충이 압록강 방면으로 진출했다가 행방불명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의 기본 전략대로라면 당나라해군은 압록강 방면으로 진출해 고구려 장안성을 위협해야하는데 구효충의 수군이 행방불명 된 후 그러지를 않지요. 게다가 건안성은 요하하구에 위치하고 비사성은 요동반도 끝에 위치하기에 때문에 장량의 수군은 결과적으로 뒤로 전략적 후퇴한 것이 된다고 봅니다. 일단 첫번째 전략이 실패하고 두번째 차선책을 쓰게된 것이니까요. 07.02.13 18:03
돌부처 책을 보시면 당군의 전략에서 중점을 둔 부분이 보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육로를 통한 보급을 위해선 영주에, 수로를 통한 보급을 위해선 고대인성에 군량기지를 설치했는데, 고대인성에서의 보급이 이루어지려면 건안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장검이 건안성을 공격한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기에 장량을 투입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세민이 건안성을 언급한것, 그에 대해 이세적이 일단 안시성공략후 건안성으로 가자는 것, 장손무기또한 건안성 방향을 언급한 것 모두가 신성로를 통한 보급이 끊겨 수로를 통한 보급에라도 의존하려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07.02.13 19:44
돌부처 수로를 통한 보급이 비사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게 아니냐 착각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넘어야 할 성들이 많습니다. 또 그렇게 된다면 보급로가 전방에 가있는 모양새가 되구요. 건안성으로 간 것은 차선책이 아니라 전략의 핵심중 하나입니다. 07.02.13 19:47
조조 지금 미국이라서 한단고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네요... 다음기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목은 상당히 생소한 부분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님의 의견을 보니 그 때 그냥 스쳐갔던 부분이 갑자기 떠올라서 말씀드렸습니다. 07.02.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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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645년 당시 요동성함락 후 요동성은?
번호 : 4529 글쓴이 : 추모왕
조회 : 164 스크랩 : 0 날짜 : 2007.02.13 10:14
참으로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구려에서 요동방어망에서 요동성은 중추중에
중추입니다. 요동성이 뚫리면 당나라는 그대로 천산산맥을 넘어서 오골성-압록강전선
or 국내성-평양성 루트로 고구려심장부로 들어갈 염려도 있고 티얼님이 말씀하신대로
백성들의 안전까지도 위협받게 되고, 정권의 지지도 잃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략적
으로 상당히 가치가 높은 성입니다. 그런데 645년 요동성이 함락당합니다. 고구려가
전략적으로 요동성을 내주었던 아니었던것을 떠나서 요동성은 중요한 성입니다. 그러므
로 꼭 되찾어야 하는 성입니다. 그렇다면 요동성 함락 후 요동성은 어찌되었다고 보시는
지요? 카페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나라는 요동성을 함락시킨 후에 천산산맥을 넘지
못합니다. 분명 무언가 강력함에 부딪혔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누군가 요동성을 공격
하였던가 아니면 산발적인 테러가 있었던가, 마지막으로 천산산맥을 막는 누군가가 있었
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당시 당나라군의 병력은 대총관급이 4명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아사나사미(맞나요 ㅡㅡ?), 강하왕 이도종등 왕족급들도 많이 참가한 전쟁이었습니다.
4개대총관급 외에도 많은 도행군을 이끌만한 정치적으로 높은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
었습니다. 즉 4개도행군 이외에도 많은대군이 참가했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이죠. 그렇다면
고구려는 요동성을 어떤식으로 재탈환작전을 세웠으며, 요동성의 상황은 어때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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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를.... 아.......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중에서 제가 가장 유심히 본것은 고구려가 요동성을 전략적으로 당나라에게 내주고나서 그후 보급로를 게릴라식으로 괴롭히면서 요동성을 다시 빼앗 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07.02.13 11:19
답글 돌부처 계필하력이 천산산맥 넘으려다 막힌바 있죠. 하지만 요동성을 탈환했을 가능성은 없어보입니다. 당군의 모든 식량은 요동성에 있었고 퇴각할 당시에 요동성으로 돌아와 그 지점에서 요하를 건넜으니까요. 신성주변은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했다고 보이지만 요동성은 당군이 퇴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고 봄이 맞을듯 싶네요. 07.02.1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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