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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 글로벌 금융사 줄줄이 떠나는데… 싱가포르엔 자산관리社 3년새 2배로
[창간 103주년]
‘리셋 K금용’, 新글로벌스탠더드로
싱가포르의 대표적 금융지구인 레플스플레이스. 이 지역은 굴지의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밀집해 있고 유동인구가 가장 많아 싱가포르 금융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싱가포르=신아형 기자
반중(反中) 민주화 운동과 ‘제로 코로나’ 등으로 홍콩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1등 금융허브로 도약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선 글로벌 금융사가 떠나고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 정부의 친기업 정책과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법·제도, 훌륭한 정주 환경이 시너지를 내면서 글로벌 자금을 빨아들이는 금융업의 천국으로 위상을 다지고 있다. 30일 싱가포르의 금융당국인 통화청(MAS)에 따르면 초고액 자산가들의 자산을 관리해주는 ‘패밀리오피스’는 2020년 약 400곳에서 올 2월 872곳으로 급증했다. 현지 운용사 지코(ZICO)의 셴디 림 개인자문 총괄이사는 “자산가들의 자산관리 문의는 물론 고가 주택, 프라이빗클럽을 찾는 수요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시아 금융허브 도약을 노리던 한국은 반대의 양상이다. 지난해 세계 3대 신탁은행 노던트러스트가 6년 만에 철수했고, 스위스 UBS, 호주 맥쿼리 등 글로벌 금융사들이 최근 한국을 줄줄이 떠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9월 말 국내 진출 외국계 금융사는 167개로, 2021년 말 168개에서 오히려 감소했다.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 높은 법인세와 소득세, 금융사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형사처벌, 정주 여건이 문제”라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제도를 확립하고 금융특구를 만들어 특정 지역만이라도 규제를 확실히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세금-인허가 파격 면제… 홍콩 제치고 亞 1위 금융허브로
〈1〉 해외 자금 빨아들이는 싱가포르
조세회피처 수준의 친기업정책
자본이득-양도소득 과세 없고
‘당신 돈 안건드린다’ 신뢰 깔려
“금융업 하기 좋은 종합 패키지”
“싱가포르는 금융업을 하기 좋은 점들만 모아 놓은 종합 패키지와 같습니다.”
전 세계에 70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투자회사 티시먼스파이어는 지난해 7월 싱가포르에 아시아 본부를 세웠다. 거점을 홍콩과 싱가포르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규제 환경과 정주 여건 등을 종합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본부를 세우는 과정은 간단했다. 싱가포르는 원래 금융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본시장업 인가를 받아야 하지만 일부 부동산이나 인프라 부문은 투자 활성화 차원에서 이 절차를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 본부에서 만난 그레이엄 매키 티시먼스파이어 본부 대표는 “이런 인가마저 면제해준 것은 당국이 얼마나 산업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며 “싱가포르는 좁은 국토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미래를 내다보고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국토나 경제 규모가 작은 싱가포르가 아시아 최고 금융 허브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당국의 기업 친화적인 태도와 높은 해외 개방성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곳에서 만난 현지 금융인들은 “외국 기업에도 차별 없이 동등한 잣대를 적용할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정부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점도 한몫을 했다”고 말한다.
● ‘조세회피처급’ 친기업 정책
싱가포르가 최근 투자 요충지로 급부상한 데는 ‘가변자본기업(VCC) 제도’라고 불리는 금융 활성화 대책의 역할이 컸다. 2020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싱가포르에서 각종 펀드를 운용하는 법인에 법인세, 소득세 등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고 승인 절차나 공시 부담 없이 다양한 금융 섹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싱가포르의 금융 정책이 버진아일랜드, 케이맨제도 등 실제 조세회피처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조세회피처 자금을 빨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자금 유인책이라는 의미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고액자산가 자산을 관리해 주는 패밀리 오피스가 성업할 수 있는 데도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에는 자본이득이나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가 없다. 국외 원천소득에 대한 이중 과세를 방지하기 위해 이중과세방지협약(DTA)을 체결한 국가도 96곳에 달한다. 외국계 기업이나 금융사가 투자하기에 최적의 환경인 것이다. 싱가포르 금융 중심가 래플스플레이스에서 만난 말레이시아 최대 은행 메이뱅크의 학 빈 추아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싱가포르 금융시장에는 ‘내 돈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란 신뢰가 깔려 있고, 정부의 공평하고 투명하며 예측 가능한 정책 집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보니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많은 나라와 사업을 하는 게 순조롭다”고 말했다.
● 영어 통용, 우수한 정주 환경도 한몫
싱가포르 금융당국인 통화청(MAS)에 따르면 2021년 싱가포르의 총운용자산은 5조4000억 싱가포르달러(약 5300조 원)로 전년 대비 16% 증가했고, 이 중 78%는 해외에서 유입됐다. 싱가포르에서 허가받은 자산운용사는 2020년 962개사에서 2021년 1108개사로 15% 늘었다. 고용과 해고가 쉬워 노동시장이 유연한 점, 영어가 통용되고 교육, 의료 등 정주 여건이 우수한 점 등도 이곳 금융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소다.
싱가포르는 최근 홍콩에서 빠져나온 글로벌 자금 덕택에 금융업이 더 큰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홍콩 반중 시위가 한창이던 2019년 6∼8월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흘러간 자금이 약 40억 달러(약 5조2000억 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MAS 대변인실은 본보에 “우리가 아시아의 핵심 금융허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정치적 안정성과 엄격한 법치주의, 탄탄한 규율 체계와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금융중심지로서의 명성 때문”이라며 “앞으로 싱가포르를 선도적인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더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신아형 기자, 윤명진 기자
한국, 수도권 세금혜택 제외… 무늬만 금융중심지
[창간 103주년]
금융공기업 나눠먹기식 지방 이전
한정된 자원 분산… 집적 효과 못봐
부산 남구 문현동의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63층짜리 이 건물의 맨 꼭대기층은 외국계 금융회사를 유치하기 위한 곳으로 모두 10곳의 사무공간이 조성돼 있다. 그러나 30일 찾아간 이곳엔 3개사만 입주해 있을 뿐 나머지는 불이 꺼진 채 텅 비어 있었다. 건물의 다른 층도 자산관리공사, 예탁결제원 등 서울에서 이전한 금융 공기업들이 자리를 채웠다. ‘국제금융센터’라는 빌딩 이름이 무색할 지경인 것이다. 금융 중심지로 지정된 지 14년이 지난 부산은 올 3월 국제금융센터지수(GFCI) 평가에서 37위로 집계돼 지난해 9월(29위)보다 8계단이나 하락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며 ‘동북아 금융 허브’ 출사표를 낸 지 20년이 흘렀지만 한국은 아직도 목표 달성이 요원하다. 한국은 글로벌 금융 중심지에 걸맞은 법·제도가 갖춰지지 않은 데다, 오히려 갖가지 규제로 금융산업에 족쇄를 채워놓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이 금융허브 경쟁에서 뒤처지는 요인으로는 우선 사실상 ‘무늬만 금융 중심지’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금융사에 돌아가는 혜택이 거의 없다는 점이 꼽힌다. 가령 싱가포르와 달리 서울 여의도에 입주하는 금융사들은 법률상 ‘금융 중심지’에 해당함에도 각종 세금을 오롯이 부담해야 한다. 금융 중심지는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법인세 면제나 감면 혜택을 받지만, 여의도는 수도권 과밀억제구역으로 분류돼 혜택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법 개정을 추진해 세제 혜택을 주겠다는 계획이지만, 법안이 언제 통과될지 알 수도 없다. 법인세율도 최고 세율이 24%로 싱가포르(17%), 홍콩(16.5%)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정부가 육성하는 금융 중심지가 서울과 부산 등 여러 곳으로 분산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2009년 서울 여의도와 부산 문현지구가 금융 중심지로 지정된 이후 2015년 국민연금공단이 전북 혁신도시에 자리잡으면서 전북에도 제3의 금융 중심지를 조성하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불붙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대선 공약집에서 ‘전북 금융 중심지 지정’을 명시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계획이 한정된 자원과 행정력을 분산시킬 뿐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강다연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서울조차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금융 공기업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등 집적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도 “금융 중심지 지정을 지역 간 나눠 가지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윤명진 기자, 부산=김수연 기자
“이슬람 율법도 포기” 새 금융허브로 뛰는 두바이
[창간 103주년]
두바이, 서양법 적용 금융특구 조성
아일랜드도 런던 대안으로 떠올라
기존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뉴욕과 런던, 싱가포르 외에도 새로운 금융허브 자리를 획득하기 위해 뛰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중동의 싱가포르’라 불리는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는 중동을 넘어 세계 금융 중심지로의 도약을 꿈꾸며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이다. 2004년 두바이국제금융센터(DIFC) 금융특구를 구축한 두바이는 이곳 입주사들에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며 해외 금융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DIFC에 입점한 기업은 4377개사로 1년 전(3644개사)보다 약 20% 증가했다. 미국 골드만삭스, 영국 바클레이스 등 세계 20대 은행 중 17곳, 세계 10대 자산운용사 중 5곳 등이 DIFC에 둥지를 틀고 있다.
두바이는 서방의 사법제도를 그대로 빌려다 쓰는 방식으로 금융업 규율 체계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탈바꿈시켰다. DIFC 바깥 지역은 기존의 UAE 연방법, 이슬람 율법 등을 준수해야 하지만 예외적으로 DIFC 구역에는 영국 보통법을 적용시킨 것이다. 또 DIFC 안에 있는 금융사는 두바이 금융감독청(DFSA)의 감독만 받는 반면에 DIFC 외부에 있으면 DFSA와 두바이 중앙은행 등 복수 기관의 관리감독을 받도록 해 금융회사의 분산을 방지했다.
조세 제도도 기업 친화적이다. DIFC 입주 회사들에는 개인소득세, 관세 등을 100% 면제해준다. 법인세 역시 9%로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도 기존 금융 중심지 런던의 후선업무(back-office)에 집중하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아일랜드는 1987년 국제금융센터(IFSC)를 설립해 글로벌 은행, 보험, 자산운용사를 유치하고 조세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다. 최근에는 브렉시트로 영국의 입지가 약해지자 같은 영어권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런던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금융허브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신아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