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이사 32편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대흥사’편에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 선생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대흥사에 걸린 원교의 글씨를 보고 추사는 “그는 우리 글씨를 망친 인물”이라고 화내며 초의선사에게 현판을 떼라고 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다시 달라”고 했습니다. 사가(史家)들은 이 일화를 “자기 필체를 최고로 여겼던 추사가 귀양살이 후 겸손해졌다”고 평가하는데 당시 그 글에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짐작하듯 ‘동국’은 우리나라, 즉 당시의 조선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체’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왕희지체니 뭐니 하는 중국의 서법(書法)을 모방했습니다. 17세기 후반들어 조선에도 ‘우리 식의 독자적 서체’가 나옵니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옥동(玉洞) 이서(李緖·1662~1723) 선생을 선구자로 꼽습니다. 이서는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사설’의 저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벼슬이 낮았지만 서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글씨가 보고 싶다면 전남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에 가볼 것을 권합니다. 윤선도 선생의 집안인 녹우당은 뒤 덕음산에 빼곡한 비자나무가 바람이 불 때 비오는 것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 붙은 이름인데 ‘녹우당’이라는 글씨가 이서의 것입니다.
그가 남긴 ‘필결(筆訣)’이라는 책은 최초의 글씨 비평서이자 이론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서맥(書脈)은 이후 공재 윤두서(1668~1715),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원교(円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게 이어졌습니다. 더 정확히 계보를 따지는 이들은 동국진체의 전수를 공재 윤두서와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외증손 다산 정약용, 방산 윤정기, 춘계 윤홍혁의 줄기와 윤두서윤순이광사로 내려오는 줄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첫째 줄기는 해남 윤씨 계열이지요.
역사가들은 대체로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원교 이광사를 꼽습니다. 원교 이광사는 명문집안 자손이었습니다. 그의 선조가 조선의 두번째 임금 정종의 왕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李眞儉)이었으며 원교는 넷째 아들이었지요. 호는 원교, 혹은 수북(壽北)을 썼습니다.
원교의 일생은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열일곱되던 해 아버지 이진검은 노론(老論) 4대신을 탄핵하다 임금의 미움을 받아 경남 밀양으로 유배됐습니다. 이진검은 거기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서 ‘노론 4대신’이 누구인지를 살펴봅니다.
노론 4대신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말합니다. 그들은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아들없이 병치레를 자주하자 국본(國本), 즉 세자를 빨리 정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세자로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밀었다는데 있지요. 그러자 노론과 반대편인 소론측은 반대 상소를 올리는 한편 “노론 4대신이 경종을 시해하려했다”며 무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노론 4대신은 역모죄로 처형됩니다. 훗날 노론 4대신 무고사건은 당시 승지였던 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이라는 사람에게 사주했음이 드러납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김일경 부자(父子)와 훈련대장 윤취상 등 수백명이 노론의 반격을 받고 제거됩니다.
이때 훈련대장 윤취상의 아들이었던 윤지가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전남 나주로 옮겨 귀양살이를 계속했습니다. 윤지는 부친의 죽음을 복수하기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755년 나주괘서사건, 나주벽서사건, ‘윤지의 난’이라 불리는 ‘을해옥사’를 일으킵니다. 나라를 비방하는 격문을 벽에 붙인 일이 발각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소론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습니다. 이때 50살이던 이광사는 큰아버지 이진유(李眞儒)가 나주 괘서사건으로 처벌을 받게되면서 연좌돼 이듬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됩니다. 원교는 그때 죽임을 당할 뻔 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의금부에 끌려가자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요”라고 애원했다는 것입니다. 영조는 그 이야길 듣고 그를 살려줬습니다.
이광사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치던 것이 ‘선동죄’로 몰려 이번에는 전남 완도군 신지도(薪智島)라는 곳으로 다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때 이광사의 나이는 58세, 그는 거기서 15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이광사가 죽은 다음해 2월 원교의 아들 형제가 유해를 경기도 장단 송남(松南)으로 옮겨 어머니 류씨와 합장하지요. 원교의 무덤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사람들이 갈 수 없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불운하게 살았으면서도 그는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하 윤순에게 글씨를 배운 그는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통달했고 마침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습니다. 글씨뿐 아니라 산수화, 인물화 등에도 능했습니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유배할 때 길러낸 제자가 많습니다. 이가운데 해남 대흥사에 그의 필법이 전해지게된 것은 즉원(卽園·1738~1794)스님, 아암(兒庵)스님같은 제자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아암스님이 다산과 교우하는 훗날의 혜장스님이며 그 제자가 추사와 친교를 맺은 초의선사였습니다. <中편에 계속>
50살이던 李匡師는 큰아버지 李眞儒가 나주 괘서사건으로 처벌을 받게 되면서 연좌돼 이듬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됩니다.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치던 것이 ‘선동죄’로 몰려 이번에는 전남 완도군 薪智島라는 곳으로 다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때 李匡師의 나이는 58세, 그는 거기서 15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신기한 자료 즐감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50살이던 李匡師는 큰아버지 李眞儒가 나주 괘서사건으로
처벌을 받게 되면서 연좌돼 이듬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됩니다.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치던 것이 ‘선동죄’로 몰려
이번에는 전남 완도군 薪智島라는 곳으로 다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때 李匡師의 나이는 58세, 그는 거기서 15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李眞儉(1671-1727)
1721. 10. 12 密陽府로 귀양
1722. 1. 28 平安道 監司
1723. 5. 11 大司憲
1724. 5. 6 禮曹判書
1725. 6. 25 康津縣으로 絶島安置
1727. 7. 5 석방 그리고 그 해 사망
이상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이진검의 행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