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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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기념물 제62호
남해다정리지석묘의 바른 이해
1. 지석묘의 의미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선돌[立石]과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는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도 축조되는 유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이 지석묘는 동북아시아에서 중국 요령성과 일본의 구주지방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하나 우리나라가 중심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무덤방[石室]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卓子式]과 지하에 있는 남방식[基盤式]의 것으로 크게 나누어지며, 지하에 있는 남방식은 받침돌[支石]이 있는 것과 없는 것[蓋石式]이 있다.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대부분 지하에 무덤방이 있는 형식이며, 한곳에 수기 내지 수십 기씩 무리지어 있다. 지석묘의 껴묻거리[副葬品]는 간돌검[石劍], 간살촉[石鏃], 비파형동검 등 무기류나 붉은간토기[紅陶], 장식옥 등이 무덤 안에서 출토되며, 무덤 주위에서는 생활용구나 공구류 같은 석기와 토기 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지석묘는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 또는 종교적 집회장이나 제단으로 알려져 있다.
2. 남해다정리지석묘(南海茶丁里支石墓)의 개관 (출처 : 군청 웹 자료)
다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지석묘는 남방식과 개석식 지석묘로서 논밭 사이에 약 8기가 거의 일렬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지석묘의 간격은 대개 3-4m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분묘(墳墓)도 함께 있다.
개석(蓋石)은 긴 쪽이 4m 정도이고 짧은 쪽은 2m 정도로서 높이는 1.3m~1.8m에 달한다.
재질은 화강암과 안산암, 안산암질 낙암 등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암석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형태도 다양한 편이나 장방형 계통에 가까운 편이 많고 주위에서 무문토기 편들이 채집되고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묘제(墓制) 중의 하나로서 지상에 대석(大石)을 올려 봉분(封墳)을 삼는 형식인데 일명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지석묘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분류 할 수 있으며 북방식은 두 개 내지 세 개의 지석 위에 넓적한 큰 돌을 얹히는 탁자식의 방식이며 남방식은 지하에 냇돌 또는 관석으로 묘실(墓室)을 만들고 머리 크기 정도의 돌로 지석을 한 다음 그 위에 상석을 얹기 때문에 큰 바위가 땅에 놓여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평현리, 야촌리, 심천리, 다정리, 상가리, 죽전리 평산리, 서호리, 대곡리, 당항리, 서대리, 관당리 등 1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는 지석묘는 모두가 남방식 또는 개석식으로 마제석검(磨製石劍), 토기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수정안] - 위 밑줄 친 부분
다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지석묘 14는 남방식의 개석식이며 군집 지석묘 8기는 북두칠성의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군집지석묘는 대개 11~12m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분묘(墳墓)도 함께 있다. 개석(蓋石)은 긴 쪽이 250cm, 짧은 쪽이 180cm, 높이는 1m 정도이다.
(1) 남해지석묘 현황 중 다정리 지석묘 현황 출처 : 군 문화관광과
토지소재지 | 지목 | 지적(㎡) | 소유자 | 비고 |
읍∙면 | 리 | 지번 |
이동 | 다정 | 911-5 | 임 | 3,957 | 박종균 | 5기 ( 〃 ) |
911-9 | 〃 | 936 | 강재운 | 2기(양호, 산림조합) |
1024 | 답 | 1,468 | 박성대 | 1기 ( 〃 ) |
1030-3 | 전 | 840 | 최길천 | 1기 ( 〃 ) |
911-2 | 〃 | 1,564 | 산림조합 | 1기 ( 〃 ) |
911-7 | 임 | 288 | 〃 | 1기 ( 〃 ) |
[수정안] - 위 (1)의 현황
소재지 | 지목 | 지석묘 (기수) | 비 고 |
읍∙면 | 리 | 지번 |
이동 | 다정 | 911-5 | 임 | 5기 | 지번(911-5)의 임야 외 지번은 최근 경지정리로 모두 지번이 변경되어 현재 지번의 기록을 요함 |
1001 | 사 | 3기 |
988 | 사 | 1기 |
1193 | 사 | 1기 |
1028 | 사 | 1기 |
1117 | 대 | 1기 |
945-1 | 도 | 1기 |
899-1 | 전 | 1기 |
계 | 14기 |
(2) 금석마을 소개
| 다정리 (금석마을) [자료 : 남해군청 웹] 금석마을은 옛날 이곳에 김석(金石)이란 부자가 살았다 하여 그 이름을 따서 금석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들판 한곳에 돌무덤(돌탑)이 있으며, 신석기시대의 지석묘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귀한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을 바위에 팔고 바우라는 이름을 지어 주면서 바위와 같이 영원한 장수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금석마을 일대에는 16기의 청동기 시대 지석묘가 있는데 마을입구에 있는 3기의 작은 지석묘는 개석식, 나머지 대형 지석묘는 모두 기반식이다. 이 소형 지석묘에서 15m쯤 전방에 다시 대형 지석묘 9기가 밀접해 있고, 거기서 약 100m쯤 되는 논에 각각 4기가 있다. |
또한 금석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해마다 정성껏 동제를 지낸다. 산이 좋고 물이 좋아 외지 사람들이 매우 부러워한다. 오염이 될 수도 없어 마을 주민들은 이것 하나만은 대한민국 어디서든 자랑하고픈 대목이다. 금석마을은 원예시험장 남해출장소, 기상대, 남해농업기술센터가 있다. (1) 마을 당산제 : 야제, 음력10월 15일 24시, 마을의 재앙을 몰아내고 풍년을 기원 (2) 주요지명 및 유래] ① 납산모 (3 반) : 납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려짐 ② 용쏘 : 납산골 하류에 자리 잡고 있는 깊이 3.5m 너비 약 16m 가량의 물이 괴 인 늪으로 예전에는 기우제를 지냈 고 용이 살았다하여 용쏘라고 불려짐 [ 수정안] - 위 밑줄 친 부분 다정리 지석묘 중 군집 8기의 지석묘는 현재 들판의 농로를 따라 11~12m의 간격을 두고 북두칠성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사방 1km 이내에 6기의 지석묘가 있다. 외형상 모두 바둑판식 지석묘로, 덮개돌의 규모는 긴 쪽이 250cm 짧은 쪽이 180cm 높이는 1m정도이다. |
(3) 남해다정리지석묘(南海 茶丁里 支石墓) 안내판 자료 : 안내판
■ 지정번호 : 도 기념물 제62호 ■ 지정일자 : 1983. 7. 20 ■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911-5 번지 외 4필 ■ 규 모 : 11기. 평균 상석 2~4m ■ 부속물 : 안내판, 민묘 ■ 시 대 : 청동기시대 ■ 관리자 : 남해군 | 남해다정리지석묘(南海 茶丁里 支石墓) 경상남도 기념물 제62호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지석묘(支石墓)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가운데 하나로, 고인돌 또는 돌멘(dolmen)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蓋石]을 올려놓은 탁자식[北方式]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南方式]으로 구분된다. 이곳 다정리 지석묘들은 현재 들판의 논둑을 따라 3~4m의 간격을 두고 모두11기가 자리하고 있다. 외형상 모두 바둑판식 지석묘로,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3m 너비 2m 정도이다. 땅속에 마련된 하부 구조는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이와 유사한 지석묘의 하부 구조로 볼 때 상자 모양의 돌널[石棺]일 가능성이 크다. 이 주변 일대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이 청동기 시대에 남해 지역의 주요 생활 근거지 중의 하나였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밖에도 남해군에는 남변리 평현리 심천리 등 관내 각지의 해안 평야와 창선도에 이르기까지 지석묘들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어 청동기 시대의 남해 지역 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수정안] 위 밑줄 친 부분 ■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911-5번지 외 7필 ■ 규 모 : 14기. 평균 상석 180cm~250cm --------------- 이곳 다정리 금석마을 지석묘 중 군집 8기의 지석묘는 현재 들판의 농로를 따라 11~12m의 간격을 두고 북두칠성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사방 1km 이내에 6기의 지석묘가 있다. 외형상 모두 바둑판식 지석묘로, 덮개돌의 규모는 긴 쪽이 250cm, 짧은 쪽이 180cm, 높이는 1m정도이다. |
3. 남해다정리지석묘의 위치도 자료 : 지번 중심 항공사진, ○(지석묘 위치)
자료 : 항공사진, 지석묘, 의 위치와 사진
※ 군집지석묘(①~⑧)
(1) 북두칠성(북두팔성)형으로 배치된 군집 지석묘 8기
이름 (북두팔성) | 동양 이름 | 바이어 목록 | 겉보기 등급 | 거리 (광년) | 지석묘의 배치 간격 |
① | 두베(Dubhe) | 천추(天樞) | α UMa | 1.8 | 124 | 1~2 | 7m 50cm |
② | 메라크(Merak) | 천선(天璇) | β UMa | 2.4 | 79 | 2~3 | 10m 15cm |
③ | 페크다(Phecda) | 천기(天璣) | γ UMa | 2.4 | 84 | 3~4 | 8m 66cm |
④ | 메그레즈(Megrez) | 천권(天權) | δ UMa | 3.3 | 81 | 4~5 | 11m 70cm |
⑤ | 알리오츠(Alioth) | 옥형(玉衡) | ε UMa | 1.8 | 81 | 5~6 | 7m 56cm |
⑥ | 미자르(Mizar) | 개양(開陽) | ζ UMa | 2.1 | 78 | 6~7 | 6m 10cm |
⑦ | 알코르(Alcor) | 기수(騎手) | ζ UMa | 3.9 | 78 | 7~8 | 13m 68cm |
⑧ | 알카이드(Alkaid) | 요광(搖光) | η UMa | 1.9 | 101 | 4~1 | 13m 8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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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석묘 14기의 실태
① 군집 지석묘 8기
① 두베(Dubhe) | ② 메라크(Merak) | ③ 페크다(Phec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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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263cm | 200cm | 120cm | 230cm | 175cm | 140 | 160cm | 135cm | 40cm |
위치 : 다정리 911-5 |
④ 메그레즈(Megrez) | ⑤ 알리오츠(Alioth) | ⑥ 미자르(Miz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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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240cm | 150cm | 100cm | 160cm | 195cm | 70cm | 275cm | 225cm | 80cm |
위치 : 다정리 911-5 | 위치 : 다정리 911-5 |
⑦ 알코르(Alcor) | ⑧ 알카이드(Alka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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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293cm | 135cm | 87cm | 410cm | 165cm | 75cm |
위치 : 다정리 1001 |
*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북두칠성의 별자리(북두칠성 등)를 나타낸 지석묘의 예
ㄱ> 바위에 직접 별자리를 새김 : 황남 은천군 정동리, 함남 함주군 지석리, 함남 함주군 원화리.
대전 비래동, 등
ㄴ> 바위 자체를 하나의 별로 간주함 : 창녕군 계성면 광계리, 전주시 완산구 교동 7-1, 화순군
도아면 대초리, 사천시 신벽동 494번지 등
② 외곽 지석묘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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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330cm | 190cm | 140cm | 230cm | 230cm | 140cm | 240cm | 190cm | 130cm |
위치 : 다정리 988 | 위치 : 다정리 1193 | 위치 : 다정리 1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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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길이 | 너비 | 높이 |
230cm | 180cm | 140cm | 230cm | 180cm | 93cm | 175cm | 110cm | 65cm |
위치 : 다정리 1117 | 위치 : 다정리 945-1 | 위치 : 다정리 899-1 |
비고 | ① 다정리 988의 지석묘 : 목동자리(아르크투루스)의 성좌 ② 다정리 1117의 지석묘 : 경지정리 및 농로 확장으로 땅에 묻었다가 마을의 우환이 두 려 1995년경 인력(人力)으로 복원했지만 기반을 바로잡지 못해 32°쯤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 음. 별자리 암각이 있음 ③ 다정리 945-1의 지석묘 : 보존의 시급성이 요망됨 ④ 다정리 899-1의 지석묘 : ‘보물섬마늘나라’ 센터 건립 시 개석이 바뀌면서 방향(남서 ↔북 동)도 바뀜 ⑤ 다정리 796-4의 지석묘 : 국도 확장으로 훼철(毁撤) |
③ 지석묘 14기의 규모 (단위 Cm)
| 길이 | 너비 | 높이 |
군집 지석묘 (8기) | 다정리 911-5(임) | 5기 | ❶ | 263 | 200 | 120 |
❷ | 230 | 175 | 140 |
❸ | 160 | 135 | 40 |
❹ | 240 | 150 | 100 |
❺ | 160 | 195 | 70 |
다정리 1001(사) | 3기 | ❻ | 275 | 225 | 80 |
❼ | 293 | 135 | 87 |
❽ | 410 | 165 | 75 |
외곽 지석묘 (6기) | 다정리 988(사) | 1기 | 330 | 190 | 140 |
다정리 1193(사) | 1기 | 230 | 230 | 140 |
다정리 1128(사) | 1기 | 240 | 190 | 130 |
다정리 1117(대) | 1기 | 230 | 180 | 140 |
다정리 945-1(도) | 1기 | 230 | 180 | 93 |
다정리 899-1(전) | 1기 | 175 | 110 | 65 |
평 균 | 247.6 | 175.7 | 101.4 |
4. 보호 및 정비의 시급성 지석묘 3기
(1) 다정리 1117(대) 1기
(지석묘 앞의 표지판) 마늘나라▶고인돌▶돌팍걸▶마을회관 1321걸음. 22분 | 금석마을의 고인돌은 남해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집단화되어 있다. 총 16기가 보고되었으며 지금은 논둑을 따라 3~4m의 간격을 두고 모두 11기가보존되어 있다. 땅속의 하부구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와 유사한 지석면의 하부 구조로 볼 때 상자 모양의 돌널(석관)일 가능성이 크다. 주변에서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조각들이 발견되어 금석마을 일대가 청동기 시대의 주요 생활 근거지임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은 고인돌이 놓아진 형태가임금왕(王)자와 닮았다하여 고인돌을 신성하게 생각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4일 고인돌에 제사를 지낸다. [수정안] - 위 밑줄 친 부분 * 농로를 따라 11~12m의 간격을 두고 모두 8기가 * 북두칠성을 닮았다하여 |
불규칙한 반 퇴적암 개석의 지석묘 위쪽과 측면(북쪽)에 헌원 중심의 성좌로 확인할 수 있는 봄철의 별자리 25성수와 태양 상징의 암각이 있음 --- (자료 : 천상열차분야지도) * 헌원(軒轅) : 성수(星宿). 사자, 살쾡이(3579,3612,38,α,Lyn,-,15,κ,λ, ε,μ,ζ,γ1,η,α,ο,ρ Leo). 중국신화의 용맹한 왕. 17수 * 관(爟) : 귀수(鬼宿). 게(ψ,λ,φ,15 Cnc). 봉화. 4수 * 내평(內平) : 성수(星宿).작은사자(22,21,13,20 LMi). 법관. 4수 * 귀(鬼) : 귀수(鬼宿)와 같음. 게(θ,η,γ,δ Cnc). ◎. 귀신이 탄 가마. 5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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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경지정리 및 농로 확장으로 땅에 묻었다가 마을의 우환이 두려워 1995년경 인력(人力)으로 복원 했으나 기반을 바로잡지 못해 32°쯤 남쪽으로 기울려져 있음 2.재 복원 요망 - 기반과 측면(북쪽)에 성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반을 바로 복원할 경우 측면(남쪽)에도 성좌(또는 성혈)가 있을 것으로 추측됨 |
++=
(2) 다정리 945-1(도) 1기
|
암각(반석 위쪽) |
* 고추의 실물 사진 |
[참고] | 다남 기원 및 상징의 암각이 개석 위쪽(북동쪽)에 있는 본 지석묘는 남녀노소의 쉼터 또는 행인의 유락물로 이용되어 훼손이 우려되며 개석의 균열마저 심해 보호가 시급함 |
(3) 다정리 899-1(전) 1기
| [참고] 본 지석묘는 ‘보물섬마늘나라’ 건축 시 개석이 바뀌었고(‘보물섬마늘나라’ 조경석과 석질이 같음) 방향(북동↔남서로)도 변경됨. |
이미지 - 답사 장면 |
● 다정리 796-4 (도) 1기 -------- 국도 확장 및 경지정리로 훼철
● 지석묘 1기 확인(발견) : 초음리 1624-3
1) 규모(대형)
높이(3m 90cm) 너비(3m 90cm) 길이(6m 65cm) 둘레(13m 95cm)
2) 상태
국도에 접해있는 본 지석묘는 국도 확장 및 과거 소유주의 경작 등으로 지반이 약해져 동남 쪽으
로 5~10°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추측됨. 대숲[밭]과 담쟁이덩굴에 싸여 방치된 상태.
3) 부속물
지석묘 개석에는(군수 2명, 현령 1명, 직원 1명 - 도로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음) 4명의 마애각 (磨崖刻)
불망비가 새겨져 있고 지석묘 왼편에 참봉 1명의 시혜비가 따로 있음.
①불망비
○ 行郡守成侯斗植不忘碑 檀紀四二五四年五月 日 ○ 行郡守徐侯基殷不忘碑 檀紀四二四七年二月 ○ 行縣令蔡侯翼永不忘碑 嘉慶十二年季夏 ○ 前直員李時鳳不忘碑 檀紀四二八四年辛卯四月 | 군수 성두식 단기 4254년(1921.05. .) 군수 서기은 단기 4247년(1914.02. .) 현령 채익영 가경 12년(1807. 여름) 직원 이시봉 단기4284년(1951.04. .) |
②시혜비
4) 확인(발견) 동기 : 암각화 조사 연구 및 남해다정리지석묘 조사 연구 과정에서 개석과 받침돌 확인.
남해다정리지석묘와 동일 방향. 주변 평지.
5) 지석묘 확인 자료 및 답사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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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국도변에 접해 있는 지석묘 | 불망비, 시혜비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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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석 남쪽의 지석(받침돌) | 개석 북쪽의 지석(받침돌) | 답사 장면 |
5. 조사 연구의 성과
○ 다정리(지번 911-5, 지번1001)의 군집 지석묘 8기는 북두칠성 형태로 배치되어 있음
○ 다정리 (지번 1117)의 1기에는 헌원성좌도(별자리. 서양 별자리로는 사자자리인 레굴루스 에 해당)
의 암각이 있음
○ 다정리 (지번945-1) 1기에는 다남 기원 및 상징의 암각이 개석 위 북동쪽에 있음
○ 899-1의 지석묘 1기는 ‘보물섬마늘나라’ 건축 시 개석이 바뀌었고 방향(북동↔남서로) 도 변경
됨.
○ 지석묘의 형태, 배치, 규모, 군집 지석묘의 간격 확인
● 초음리(1624-3)에 위치한 지석묘 1기 확인(발견)
6. 맺음말
청동기시대의 문화유적인 남해다정리지석묘 중 군집 지석묘 8기는 현재 들판의 농로를 따라 평균 11~12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북두칠성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어 한반도의 군집 지석묘와 맥을 같이하며 그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그러나 사방 1km 이내에 있는 외곽 지석묘 6기 중 3기는 그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며 훼손마저 우려된다. 외곽 지석묘 6기도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위치로 보아 성좌의 유관하다, 현존 남해다정리지석묘는 14기이다.
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된 남해다정리지석묘의 군청 문화재 관계 홍보 자료 및 웹 자료나 현지 홍보 안내판 등에는 지석묘의 기수, 형태, 지번, 간격, 규모, 위치와 현황이 사실과 판이하게 기록 설명되어 있다.
요목 | 군청 문화재 관계 홍보 자료 및 웹 자료나 현지 홍보 안내판 등의 기록과 내용의 오류 | 수정안 (바르게 고쳐야할 사항) |
기수 | 안내판 : 11기, 웹 자료 : 15기, 16기, 17기 | 14기 |
형태 배치 거리 | 다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지석묘는 남방식과 개석식 지석묘로서 논밭사이에 약 8기가 거의 일렬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 다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지석묘 14는 남방식의 개석식이며 군집 지석묘 8기는 북두칠성의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
지석묘의 간격은 대개 3~4m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분묘(墳墓)도 함께 있다. 개석(蓋石)은 긴 쪽이 4m 정도이고 짧은 쪽은 2m 정도로서 높이는 1.3m~1.8m에 달한다. | 지석묘의 간격은 대개 11~12m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분묘(墳墓)도 함께 있다. 개석(蓋石)의 규모는 긴 쪽 이 250cm, 짧은 쪽이 180cm, 높이는1m정도이다. |
소재지 | 남해 지석묘 현황 중 다정리 지석묘 현황 | 남해 지석묘 현황 중 다정리 지석묘 현황 |
최근 농로 확장, 경지정리, 기관산업 시설에 의한 외곽 지석묘 3기에 대한 무관심과 훼손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나 현존 지석묘 14기의 영원한 보호와 대책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중대한 책임과 과제이다.
--남-해-신-문-기-사------
다정리 지석묘 기록, “잘못됐다” 주장
조세원 향우, 지석묘 기수·위치 등 사실과 달라
2011년 07월 29일 (금) 박진영 기자 jyp@namhae.tv
이상 작성자/남해군 문화재 연구원 조세원
▲ 이동 다정마을 출신 조세원 향우가 도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된 남해 다정리 지석묘와 관련해 마을 내
설치돼 있는 안내판과 군청 홈페이지 등에 등재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군, 조사내용 객관적 검증 필요성 제기
경남도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된 남해 다정리 지석묘와 관련, 해당 마을 출신 조세원 향우가 마을 내 설치돼 있는 안내판 및 군청 홈페이지 등에 등재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안내판에 기록돼 있는 지석묘의 기수를 살펴보면 모두 11기로 각 지석묘 배치는 들판의 논둑을 따라 3~4m의 간격을 두고 위치해 있고 외형상 모두 바둑판식 지석묘로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3m, 너비 2m 정도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다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지석묘는 14기, 군집 지석묘 8기는 북두칠성의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군집 지석묘의 간격은 대개 11~12m를 유지, 주위에는 분묘(墳墓)도 함께 있으며 개석(蓋石)의 규모는 긴 쪽이 250cm, 짧은 쪽이 180cm, 높이는 1m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덧붙여 군에서 기록, 관리하고 있는 다정리 지석묘 현황 역시 1개 필지 외에는 최근 경지정리로 지번이 모두 변경됐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 외에 그가 이번 연구·조사 결과로 꼽는 것은 다정리 지번 1117 지석묘 1기에는 헌원성좌도(별자리, 서양 별자리로는 사자자리인 레굴루스에 해당)의 암각이 있다는 것과 지번 945-1, 또 다른 지석묘 1기에는 다남 기원을 상징하는 암각이 개석 위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899-1의 지석묘 1기는 ‘보물섬 마늘나라’ 건축 시 개석이 바뀌었고 방향 또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변경됐다는 점, 초음리 1624-3에 위치한 지석묘 1기를 추가로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군 관계자는 “군내 지석묘는 총 53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중 도기념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것은 11기”라며 “안내판에 등재된 내용과 다를 게 없으며 지번은 갖고 있는 자료가 오래된 것이어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지적공사에 의뢰해 문화재 보호구역을 측량한게 정확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집 지석묘의 간격에 있어선 각 지석묘 마다 차이가 있고 이 밖에 제기하고 있는 내용 등은 사견이라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http://www.namhae.tv/news/articleView.html?idxno=16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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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에 수를 놓듯 남해의 보석에 눈이 부시네
[머니위크]민병준의 길 따라 멋 따라/남해 금산민병준 여행작가 | 입력: 2010.05.09 11:55 | 조회 2368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인 경남 남해도(南海島)는 예부터 '한점 신선이 사는 섬'이라 하여 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 부를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조물주는 이 섬 곳곳에 수많은 절경을 펼쳐놓았지만, 만약 남해도에 금산이 없었다면 신선이 사는 섬이라는 찬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엔 섬이 많고 그 섬엔 산도 많지만, 남해 금산(701m)처럼 바위와 숲이 조화를 이뤄 자태가 빼어나며 사방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바위 포인트를 곳곳에 지니고 있는 산은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금산은 산에 얽힌 전설도 풍부하다.
경관도 아름답고 얽힌 전설도 풍부
신라의 원효가 도를 깨달으려 이곳 정상 가까이에 초막을 짓고 보광사(普光寺)라 하면서 산 이름도 보광산이 됐다. 고려 말기엔 이성계가 큰 뜻을 품고 이곳에서 산신께 제사를 올렸다. 그는 산신께 맹세했다. 왕이 되면 온 산을 비단으로 덮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만들어주겠노라고. 결국 이성계는 왕위에 올랐다. 그렇지만 아무리 왕이라 해도 어떻게 비단으로 산을 두른단 말인가. 고민하던 이성계는 산 이름을 바꾸는 꾀를 냈다. 즉 '비단 금'자를 쓴 금산(錦山)이라 한 것이다.
금산의 신비함을 빛내주는 역사적인 사연은 이보다 훨씬 오래됐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BC 259~BC 210년)은 동방의 삼신산에 불로초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서불에게 동남동녀 3000명을 주고 불로초를 구해오게 했다.
동방은 우리나라를 말한다. 또 중국 전설의 삼신산인 봉래산돚방장산돚영주산은 우리의 명산인 금강산ㆍ지리산ㆍ한라산을 일컫는 말이 됐다. 하여튼 서불은 불로초를 찾기 위해 산둥반도 해안선을 따라 랴오둥반도로 건너간 뒤 한반도 서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와 불로초를 찾아다녔다.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 거제도, 통영 소매물도, 남해도 서리곶, 고흥 팔영산 등엔 서불이 다녀갔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이중에서도 남해엔 그 흔적이 지금도 생생하다. 진시황의 아들인 부소(扶蘇)가 귀양을 살았다는 부소암(扶蘇岩)이 금산에 있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곳에선 찾기 어려운 흔적이 남아있다. 그건 바로 금산 남서쪽을 흐르는 두모골 거북바위 옆에 있는 석각문이다. 가로 7m, 세로 4m 되는 반석 위에 기이한 모양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 문자가 '서불이 남해 금산을 다녀가면서 남긴 증표'라 한다. 이 문자의 정식 명칭은 남해 상주리 석각(경남기념물 제6호)인데, 서불과 관련지어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 등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문자는 아직 해독이 안 되고 있다. 흔히 진시황 이전의 고문자(古文字)로 추측하는데, 한국 고대문자이거나 고대 거란족 문자, 혹은 산스크리트 계통의 글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외에도 '귀인의 사냥터'라는 그림 표지라는 등, 선계로 가는 입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얼마 전엔 중국의 전문가가 이 문자를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이라는 6개의 글자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서불이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예를 올렸다'는 뜻이다.
이런 사연을 품고 있는 금산은 주봉인 망대를 중심으로 왼쪽에 문장봉ㆍ대장봉ㆍ형사암, 오른쪽에 삼불암ㆍ천구암 등의 암봉이 솟아 있다. 또 이성계가 산신령께 기도했다는 이씨기단을 비롯하여, 문장암ㆍ사자암ㆍ촉대봉ㆍ향로봉ㆍ음성봉 등 금산 38경을 이루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인다. 정상 부근엔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처의 하나로 꼽히는 보리암도 깃들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들머리는 복곡탐방지원센터
금산 산행은 복곡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지원센터 앞 제1주차장에서 보리암 매표소가 있는 제2주차장까지의 거리는 약 3km. 제1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마을버스(편도 1000원)를 이용해 오르는 게 좋다. 제2주차장에서 15분쯤 걸어 오르면 보리암이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엔 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해수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해수관음상 앞엔 고려 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서 있다. 기단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으면 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기난리(磁氣亂離) 현상이 일어난다 해서 관심을 끌고 있는 탑이다.
보리암에서 화엄봉을 거쳐 15~20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 금산 38경의 하나로서 버선바위ㆍ문장암ㆍ명필암 등으로 불리는 바위 바로 옆이 정상이다. 이곳엔 봉수대가 있다. 정상답게 사방으로의 조망이 빼어나다.
정상에서 내려오면 다시 삼거리. 여기서 단군성전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을 따른다. 단군성전 앞 갈림길에서 금산산장과 제석봉을 거쳐 쌍홍문으로도 내려갈 수 있다. 여기서 바위 사이로 곧장 이어진 능선길을 따르다 헬기장을 지나면 부소암 가는 갈림길이 오른쪽으로 나타난다. 이 길로 들어서서 허공다리를 건너면 우람한 바윗덩이가 우뚝 서있다. 진시황의 아들인 부소가 귀양을 살았다는 부소암이다. 바위 뒤쪽으로 돌아가면 작은 암자도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앵강만 조망이 일품이다. 앵강만 입구에 있는 노도는 서포 김만중(金萬重)이 유배 생활을 하며 <사씨남정기>를 집필한 섬이다.
부소암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능선길을 따르면 상사바위, 곧 상사암(相思岩)이다. 상사바위는 남산에서 조망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돌아보면 금산 정상부터 대장봉이 우뚝하고, 가파른 절벽 위엔 보리암이 아슬아슬 앉아있다. 이어 쌍홍문ㆍ만장대ㆍ사선대ㆍ향로봉 등 눈을 놀라게 하는 기암들이 주욱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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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에서 상사바위를 뒷배경으로/난정주영숙
상사바위 바로 아래 구정(아홉개의 샘)이 있다.
금산 27경 : 상사암(想思岩)
[전설 1]
조선조 숙종 때 여수 돌산에 살던 돌쇠라는 총각이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과수댁에 이사를 왔다.
그 집에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과수댁이 살고 있었다.
돌쇠는 매일 아침 일찍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느라 둘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둘은 우연히 서로 마주치게 되었고 돌쇠는 상사병에 걸려 드러눕고 말았다.
두문불출하는 총각을 이상히 여긴 과수댁은 총각의 방문을 열었다.
총각은 상사병에 걸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과수댁은 고민 끝에 상사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뒷산 금산의 상사바위로 총각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자신을 사모하다 죽을 지경까지 이른 총각과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자 돌산 총각 돌쇠의 상사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둘은 상주로 내려와 백년해로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전설 2]
어느 고을에 곱게 자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가 있었다. 돌쇠라는 하인이 주인의 딸을 사모해 마음만 태우다가 죽었다. 하인이 죽은 며칠 후 딸이 자고 있는 방에 뱀 한 마리가 기어 들어갔다.
죽은 돌쇠의 혼이 뱀이 되어 자고 있는 딸의 몸을 칭칭 감았다.
이것을 본 부잣집 부모는 놀라 굿을 하여 뱀을 물리치려 하였지만 뱀은 딸의 몸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어느 날 수염이 길게 난 노인이 나타나 금산의 높은 벼랑에서 굿을 하라고 말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 부모는 금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딸을 데리고 가서 굿을 하자 뱀이 풀어지면서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벼랑을 상사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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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별자리
주 영 숙
몇 년 전 어느 날 나는 ‘진시황과 불로초’ 전설을 검색하다가 뜬금없이 <남해 양아리 석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남해현 낭하리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는데,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삼신께 제를 드리다’라는 기록이 있고, 국어대사전에는 이것이 아예 ‘서불제명석각’이라 되어있기도 하였다. 중국 진시황이 보낸 서불이란 사람이 동정녀 500명을 거느리고 삼신산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왔다가 이곳에 새겨놓고 갔다 하고는, 정인보 선생은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 문자로 추측하여 ‘사냥을 하러 이곳에 물을 건너와 기를 꽂다’로 해독했다고 하는 부연설명을 붙여놓은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암각을 두고 여러 각도의 분석이 난무해왔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입증된 것은 없다. 그러던 차에, 고대문자에 관심이 많으며 고향이 바로 그곳이기도 한 조세원 씨가 여러 해 동안 연구하게 되었고, 결과 이 석각이 고대의 어떤 문자도 아니고 어떤 학설과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가히 혁명적인 발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2010년 8월부터 별자리그림을 들여다보다가 별안간 전율을 느꼈다고 하는데, 화강암에 새겨진 문제의 석각이 바로 가을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와 일치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4월10일부터 열린 남해 튤립축제도 볼 겸 그 석각이 정말 ‘서불과차’가 아니라 별자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조세원 씨에게 연락하였었고, 4월 말경 1박2일의 남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의 주장에 신빙성 있었다. 일명 거북바위인 화강암에 새겨진 동양최고의 그 석각은 그의 말대로 선덕여왕시대에 새겨진 별자리 판각일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공교롭게도 선덕여왕의 업적인 첨성대가 바로 화강암으로 축조된 것 아닌가.
그는 북극성, 페르세우스자리, 양자리, 삼각형자리, 가을대사각형, 안드로메다자리, 물고기자리, 도마뱀자리, 페가수스자리, 케페우스자리, 조랑말자리, 독수리자리, 백조자리에 이르는 가을하늘의 일면임을 알아낸 것인데, 마침 천문, 천체도의 약칭인 하늘 천(天)자까지 왼편 아래에 새겨져 있었다. 이 '천'자가 만약 훨씬 후대에 새겨진 거라면 위의 암각은 더욱더 하늘의 별자리라는 해석을 낳는다. 왜냐면 합천 근처 고령에 가면 석각(주로 별자리)이 많이 있는데 거기엔 누가 일부러 판 것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입니다"라는 표시가 틀림없다. 아무튼 제대로 된 한자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석각이 절대로 문자가 아님을 반증하는 동시에 이 석각이 새겨진 연대가 이미 한자가 통용되고 있었던 시기라는 뜻도 된다. 왜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만, 아무튼 그게 별자리인 게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면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쳐서 구했다는 안드로메다 별자리가 무척 매력적이다. 동양에선 규수 별자리라고도 하는데, 사실 이 안드로메다 성운이 석각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안드로메다은하가 바로 거기에 있다. 지구의 은하와 흡사한 꼴의 은하라니! 그게 또 몇 백 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니! 그렇다면 ‘서불과차’라고 오인되어진 이 별자리 석각은 바로 안드로메다 어느 별에서 온 사람이 고향을 그리며 새긴 것이 아닐까? 그는 바로, 불의 화신 지귀설화를 낳은 신라 선덕여왕 시절에 이 지구에 소풍 나왔던 외계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집필 중인 장편소설 “별에서 온 사람“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신비로운 안드로메다별자리를 집어넣게 되었다.
작성자/난정주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