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눈과 눈을 마주쳐 가며 관계를 맺고 서로를 어느 정도까지 알아 가면서 조직을 리드할 수 있는 최대 단위가 아홉 명에서 열한 명 사이라고 한다. 그 숫자가 넘으면 한 눈에 구성원들을 다 집어넣은 채 무슨 일을 도모하기는 벅차다는 이야기다. 심리학자들이 용의주도하게 연구한 결과라는데, 그러고 보면 야구팀이 아홉 명, 보병 일개 분대도 아홉 명, 그리고 축구팀이 열한 명이다. 예수(耶酥,耶蘇)의 제자들이 축구팀처럼 열 하나이기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쓸데없이 열 둘을 스카웃 하는 바람에 마지막 '가롯 유다'가 사고를 쳐버렸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장악이니 통제니 할 때 그 대상과 정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겠다. 한 명이든 아홉 명이든 바깥 모양새만 챙겨서 될 일이 아니고, 조직원 개개인의 내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인간의 마음에 흐르는 강물은 어떤 모습으로 굽이치는가, 어떤 외부의 자극이 가해졌을 때 제각기 어떤 양상으로 반응하는가 하는 것 등을 챙겨야 한다는 뜻이겠다. 마키아벨리(馬基雅維利)는 은둔생활을 하던 중, 황폐해진 조국 이탈리아(意大利)가 옛 로마의 영광을 되찾기를 바라는 절실한 충정으로 '군주론'을 썼다고 한다. 현실정치를 종교적 이상으로부터 분리시킨 획기적 고전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고, 군주가 권세 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마키아벨리즘'의 효시로 무수한 곡해를 받은 슬픈 저작이다. 하지만 정작 마키아벨리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을 똑바로 보고 정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조직 내에서의 인간은 솔직히 말해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존재가 못 된다. 개인으로 존재할 때는 착할지 몰라도 조직 내에 몸담고 있는 이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비겁하게 속이기도, 또 배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묻는다. 군주는 사랑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을 받을 것인가? 둘 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게 완벽할 수야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두려움을 받는 편이 좋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 왜? '인간이란 원래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요, 염치를 모르고, 몸을 아끼고, 물욕에 눈이 어두운 속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나가는 상사 휘하에서 자신의 위험이 멀리 있는 상황에서는 "형님" 어쩌고 하면서 달려들지만, 그 상사가 별 볼 일 없어지면 "그때는 그때고" 하면서 등을 돌리는 일이 많다. 그런 녀석의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다른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던 군주는 배신을 끝으로 몰락하고 왕국은 멸망한다. 게다가 '인간은 두려운 자보다 애정을 느끼는 자를 더 쉽게 배반한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은 사악하여 매인 정 같은 것은 이해관계가 얽히면 언제나 서슴없이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운 자 앞에서는 처형의 공포로 꽉 얽매여 있기 때문에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생각들을 접하면서 입맛이 씁쓸해지는 이유는 그 말들이 전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적 도덕률과 '인간은 실제로 어떠하다'는 사회학적 사실명제가 맞부딪쳤을 경우, 전자가 후자에게 여지없이 무너지는 예는 도처에 널려 있다. 조직의 효율적 운용이라는 목표 앞에서 우리가 기댈 언덕이 정녕 노자의 '도덕경'은 아니더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난 아직은 이러한 내 생각이 틀렸기를 진정으로 기원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즘을 신봉하며 따를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방법론일 뿐 결코 전천후 대안은 아니라는 것, 굳이 통제니 장악이니 따질 것 없이 기본적 리더십만으로도 질서정연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가운데 인간과 인간간의 '마주보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갈 데까지는 가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