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민주의거와 4.19혁명 기념일를 지나면서,
4.19 혁명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추구도 반미도 아니며. 좌파적 맹종주의 와는 거리가 멀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바로 4.19혁명정체성이기 때문이다.
4.19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4.18 고대학생의거의 선언문에는 ‘멸공전선’이란 용어가 나온다.
“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 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었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70여전 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쓰 왔던 민족과 통일이란 상투적인 명제를 내세워 4.19 혁명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후대들에게 “ 4.19 혁명 정체성‘을 확실히 알리고 싶다. - 당시 4.18. 4.19대열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하기내용은 4월의 활화산(4월혁명고대발간), 4월민주혁명(418민주의거기념사업회발간)
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 4.19 혁명의 정체성을 지키자.( 그 정체성은 무엇인가)
4,19혁명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존립과 증진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숭고한 419혁명정신을 정치적 어용적 활용과 정체성을 외면하는 사태가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우린 보아 왔다. 바로 이것은 419혁명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본은 자유, 민주, 정의이다 그것은 반미도 아니고 친 공산주의도 사회주의 추구도 아니다. 더구나 좌파적 사고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419세대는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남측 대한민국을 북측 공산주의가 구소련을 업고 민족통일을 앞세운 적화통일전략에 따른 침략전쟁을 뼈저리게 겪은 세대들이다.
1960년 4,19당시 자유당 부정선거 주모자 고 이기붕씨 서대문사저를 분노한 시민 대모대가 진입하여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졌지만 시민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파손된 기물속에서 찾아내어 높이 흔드는 장면이 동아일보에 크게 실렸음을 오랜세월이 지났으면서도 생생히 기억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4,19혁명은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정의를 표방한 것이며 유엔 63개국(참전 16개국,의료지원5개국 물자지원39개국) 으로서 남침한 공산 북한 격퇴를 주도한 미국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미국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이땅에서 14만명의 사상자를 내었다(사망 3만7천명‘부상9만3천명). 대부분의 참여군인들은 “Korea”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남의 나라 침략에 대한 응징과 자유와 침범된 땅을 찾아 주기위하여 많은 생명을 희생하였던 것이다.
어쩐 사람은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사대주의라고 어설픈 논리를 펴기도 한다.
시대가 어느때인데 19세기나 있을벗한 사대주의 용어를 쓰고 있으니 그 유치성에 말문이 막힌다. 미국과 전통적 유대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노년세대가 겪어온 역사속에서 바로 안보와 결합된 확실한 실리주의적 경제정책을 국민은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4,19혁명과 자유 민주 정의 정신을 마치 특정 정치단체가 계승한듯한 착각을 주는 일도 벌어지기도 한다. 그 당시 야당은 바로 오늘 정치양상에서 쓰고 있는 보수 야당이라고 불리어졌다. 처절한 625침략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전체가 공산주의로 오판될 수 있는 사회주의 및 진보주의개념은 배제 되였기 때문이다.어쩌면 그당시 이념투쟁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19혁명은 당시 어떤 정치적 단체와도 사전 상관이 없다. 그것은 대학생들이 주도하고 시민이 호응한 자유민주주의 시민혁명이기 때문이다. 권력쟁취를 전제하지 않은 독재,부정,부패에 대한 순수한 민주항거였기에 선거 부정부패에 피해를본 당사자 야당이 자연스럽게 절차에 따라 정권을 인수한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하야를 계기로 혁명에 성공한 학생과 시민들이 “조건없이 잘 해보십시오. 하고 정권을 맡긴것이다. 헌데 정권을 인수한측은 구파다 신파다하고 밤낮 싸우고 각종 생활 시위는 이곳 저곳에서 소규모로 일어나고 심지어 당시 어느 초등학교생들 마져 생활 데모를 하여 온통 세상은 연일 시끄러우진 상태이며, 일부이긴 하지만 처우개선을 위한 경찰데모도 일어났다는 보도가 기억이 난다. 얼빠진 어느 시위대는 민족통일 한답시고 유엔군과 국군이 지키고 있는 전선에 가자고 떠들던 시대상이였다. 이내용이 개인적 생각과 판단이라고 하실분은 당시 신문을 찾아보기 바란다. 이모든 기술내용이 당시 신문에서 우려스러운 보도내용이기 때문이다.
418의거, 419혁명전 어느정치단체도 학생들과 사전 접촉한 흔적은 없다.
유일하게 당시 반공의 최선두에서 싸운 故 이철승 국회의원 선배님이 418의거와 419혁명당시 태평로 전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한 고대생들에게 격려와 후배들의 안전을 걱정하던 모습이 오랜세월후에도 뜨오른다. 그분이야 말로 당시 고대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아닌가 싶다.
때론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완의 혁명 의미가 419세대들과 후대들의 추정이론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후대들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 났기 때문에 미완이라고 이론을 펴는분도있다 허나 그것은 당시 사회적 환경을 전혀 경험치 못하는 것에 기인한다.
419혁명후 들어선 민주당 정권은 구파 신파의 치열한 내부 싸움으로 적과 대치하고 있는 국가안보를 잊어버린 듯 착각을 할 정도였다.
516군사혁명이 일개 대대규모로 한강을 넘어 무혈군사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집권 정권의 군사장악력과 전국정보력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516 군사쿠테타를 당연한 탄생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는다.어떠한 군사적 조직혁명을 막을 수 없는 정도의 정권이 문제였다는 점이다.그러한 정권의 빈약성은 516군사혁명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된것이다.더구나 남북 군사적 대치하에서 중앙집권력이 약한 내각책임제라는 헌법개정으로 탄생된 정권은 쉽게 무너진 요인도 되었을 것이다.
516군사정권은 반공을 제1 국시로 내걸자 경제적으로 열세인 우리에게 북한의 재침략을 우려한 국민은 일단 안도의 숨을 내린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이 419이후 재침략을 하지 못한것에 천추의 한을 품었다는 풍문이 후에 나돌았지만 한미 방위조약으로 국군과 미군이 철조망을 함께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무모한 재침략을 김일성이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이유는 북측 지도자는 섯부른 판단으로 미국과 유엔군에 의하여 쑥대밭을 겪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419세대는 516군사혁명을 사실상 인정치 않고 총칼진 군사혁명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 군사혁명이 서서히 합법적 절차상으로 제 3 공화국을 성립시키면서 전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할려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군사적 급진방법으로 진행되자419세대는 “잘 살아보자” 그 대열에 주저없이 참가한것이다. 어쩌면 그대열에 동참하면서 빠른 경제적 성공에 자유 민주적 사고의식을 망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급진적이고 먹고 살기위한 경제우선정책이 진행되면서 기본적 인권문제와 민주적 절차 등이 문제된것도 사실이다. 남북대치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북한에 도움을 주는듯한 자에게는 가차없는 법적제재가 내리진 것도 사실이며 그러한 정책으로 어굴하게 희생되였던 사람들이 발생하였고 일부조작된 사실도 그후 역사 판가름에서 밝혀진것도 사실이다. ,때론 정권 과욕으로 문제가 생긴것도 부정 할 수 없는 일들이다.
516군사혁명을 정당한 군사쿠테타로 보는 사람은 없다. 훗날 준엄한 역사가 판명할 것으로 본다. 민주라는 하나의 잣대로만이 평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구테타는 결과적으로 국민의 먹는 것을 해결하였고 사상유례없는 번영과 성장으로 오늘날 무역수지 7위라는 경제대국으로 치닫게한 초석이였다는점을 어느누구도 부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19혁명이 “미완의 혁명”이라는 의미는 당시 참여한 老 논객들은 한결같이 북한지역에 자유 민주 정의가 구축될시에 미완의 혁명이 완성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는점을 상기하고 싶다.
자유,민주,정의라는 419혁명 이념에 제일 먼저 등장한 자유란 용어가 문서로 표시하기까지 사람들은 1800여년이 걸렸다. 그것은 1776넌 미국독립혁명 선언서에 자유(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그리고 90여년후 1863년 노예해방선언으로 인종의 평등과 자유가 겨우 이루어 졌다
그 자유가 무엇이길래 오랜역사를 들지 않아도 바깥에선 보트피플 100만명이 탈출하였고,우린 35,000명의 탈북자를 기록하였다.모두 자유를 위해 생명을 담보 하였다.
그것은 바로 자유를 쟁취하기위한 인간의 위대한 족적으로 남을 것이다.
'419혁명의 자유,정의 민주라는 정체성을 지키자.
글쓴이 : 조정현(당시 정외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