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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llok.history.go.kr/id/koa_10005007_002
광해즉위년 5월 7일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였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 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 대중매체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대동법의 창시자는 광해군이 아니라 이원익 정승임. 비록 광해군이 대동법 창시자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대동법 추진에 적극적이였다면 딱히 문제가 아니겠지만 아래 기록들을 살펴보죠.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2005_001
광해 1년 2월 5일
전교하였다.
"일전에 인견했을 때 승지 유공량(柳公亮)이 선혜청(宣惠廳) 작미(作米)의 일이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대략 말하였다. 당초 나의 생각에도 이는 진실로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본청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기에 우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량의 말을 들으니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나라를 소유한 자가 모두 토양의 실정에 맞게 공물(貢物)을 바치게 한 데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방납(防納)으로 교활한 수단을 부리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이 작미의 일이 있었으니, 그 근원은 맑게 하지 않고 하류(下流)만을 맑게 하고자 한 데 가깝지 않은가.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만약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을 편하게 해주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기강을 세우고, 방납하고서 지나치게 징수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자세히 밝혀 혹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려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조종(祖宗)의 헌장(憲章)을 준행해 어기거나 잊지 않는 것이 좋은 계책인 듯하다. 송(宋)나라의 신법(新法)006) 이 그 뜻이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데 있었겠는가마는 마침내 구제하기 어려운 화를 불렀으니, 옛 헌장을 변경하는 것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가령 이 일이 폐단은 없고 유익함만 있다 하더라도 춘궁(春窮)에 쌀을 내게 하는 것은 그 시기가 아닐 듯하니, 조사(詔使)가 돌아가고 가을이 와서 곡식이 많아질 때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 이 뜻을 대신에게 말하여 다시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 이원익의 선혜청 설치 권고를 받아들인지 7개월 정도 지난 후 대동법에 대한 내심을 보이는 광해군. 여기서 광해군은 두가지 이유를 들어 대동법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예로부터 제왕은 토양의 실정에 맞게 백성들에게 공물을 받는 게 맞다는 게 첫번째 이유고 두번째 이유는 대동법 같은 걸 만들어 옛법을 고치기보다는 방납 자체를 단속하면 그만이라는 게 그 이유임.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2028_003
광해 1년 2월 28일
사간원이 〈연계하여 의관(醫官)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에서 건의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한 것은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하는 데 힘써서 백성을 안스럽게 여기시는 성상의 인자함을 몸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방납(防納)하고서 교활한 방법으로 대가(代價)를 곱절로 징수하는 폐단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경기도의 1년 공부(貢賦) 및 온갖 응역(應役)의 대가를 절감해 헤아려서 결수(結數)를 계산하여 쌀로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대개 백성들이 무거운 짐을 벗고 편히 쉴 수 있는 것이 전일 방납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함부로 징수하던 수에 비교하면 몇 갑절이 덜한 정도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시행되기도 전에 논의가 분분하고, 방납하는 사람들은 그 이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따라서 교란시키니, 일이 장차 중도에 폐해지게 될 형편인지라 진실로 한심합니다.
대체로 일의 이해와 편부는 반드시 1년을 통하여 시험해본 뒤에야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반년 동안만 시행하고 그만둔다면 각사에서 공물(貢物)에 대한 값을 줄 때 방애되는 일이 많아 이해의 소재를 미처 알 수 없을 것이니, 금년을 한정하여 선혜청의 사목(事目)에 따라 시행해서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시험해 알아보고 나서 다시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감인관(監印官)은 이미 추고하였으니 잡아다가 국문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선혜청의 일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내수사 노비는 군대로 편성한다 해도 별로 할 만한 일이 없다. 수영패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사간원이 대동법을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을 규탄하고 대동법 시행 1년 연장을 요구함. 여기에 대한 광해군의 반응은 "서서히 결정하겠다"는 건데 어떤 영화에서처럼 대동법 시행에 머뭇거리는 대신들을 다그치고 몰아대던 광해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임.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12025_005
광해 2년 12월 25일
선혜청이, 강원도의 정공(正供)을 경기의 예에 따라 쌀로 하여 민폐를 제거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선혜청이 강원도 공물을 쌀로 하자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상이 특별히 거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본청(本廳)이 재차 아뢰기를, 중략...
나라의 큰 근본은 백성에게 있는 법인데 백성이 지탱하지 못하고, 나라의 큰 폐단이 방납에 있는데 그 폐단을 제거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쩔 수 없이 쌀로 세금을 내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전에 민간에서 많은 공물가를 내게 하여 물건을 사서 납부하던 것이 방납인 때문이었고, 지금 민간에서 적은 공물가를 내게 하여 물건을 사서 납부하는 것이 선혜청이니, 공물의 색목(色目)은 줄이지 않고 단지 그 값을 낮추어 받아들여 사주인에게 지급해서 본색을 갖추어 납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익이 방납인에게 돌아가는 것보다는 곤궁한 백성의 병폐를 제거해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옛법을 변경하는 것이겠습니까.
경기의 백성들은 이미 이것을 편리하게 여겨 시행함에 폐단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침 강원도 사민(士民)들이 멀리까지 와서 호소함을 인하여 체찰사가 상세히 물어 계청하였고, 또 관찰사가 찾아다니면서 물어 본 다음 참작하여 ‘본도의 요역(徭役)은 번거롭고 괴롭기가 다른 도의 배나 되니, 경기와 같이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누차 왕복하며 논란하다가 공사로 입계하였던 것인데, 지금 ‘거행하지 말라.’는 전교를 받았습니다. 본도의 백성들이 이미 조정의 덕스러운 조칙을 듣고 나서 큰 기대에 부풀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급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라온 지가 반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도리어 갑자기 그 명을 취소하셨습니다. 민간의 실망은 전보다 더 커지기만 하고 조금도 그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지 못하였으니, 민심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백성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다가 훗날 구애되는 폐단이 보일 경우에 개혁해 나간다면 때에 따라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제왕(帝王)의 도와 합치될 것이니, 어찌 대처하기 어려울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곤궁한 백성이 모두 조정의 혜택을 바라는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 한 가지 일조차도 명을 내렸다가 시행하지 못하고 만다면, 폐단을 개혁한다는 전후의 말은 끝내 빈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들은 주상 전하께서 사사로운 의논에 동조하여 큰 것을 잃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 일의 처치는 강원도 한 곳의 이해와 병폐가 달려 있는 데에 그치지 않으니 본청의 공사대로 시행하소서. 〈신들은 뜻대로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삼공(三公)의 의논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뜻은 알겠다. 다만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는 모두 토질의 형편에 맞추어 공물을 거두었으니, 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는가. 지금 지엽적인 폐단이나 구제하고자 하고 근본을 바로잡는 계책은 도모하려 하지 않으니, 낭묘의 여러 신하들이 친히 이익을 분석해 보인 계책이 어찌 해로움이 없겠는가. 조정은 다만 기강을 정돈하고 법전을 밝혀 방납하는 사주인의 폐습을 엄격히 금지하고, 곧바로 토산물로 상납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옛사람은 무릇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시작할 때에 반드시 끝을 맺을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 온 나라의 세금을 다 쌀로 내게 하는 것이 어찌 먼 훗날까지 헤아리는 일이겠는가. 경기 이외의 다른 도에까지 점차 미치게 하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경들은 다시 강구하여 조종조의 구례를 그대로 따라 시행함으로써 한 번 두 번 변함에 따른 고질적인 폐단을 전부 고치도록 하라."
* 계속해서 "공물" 드립을 치면서 대동법 강원도 확대 시행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광해군. 방납을 강력하게 단속하면 굳이 대동법을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 중임. 신료들의 주장대로 방납 자체가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폐단일진데 무슨 생각으로 결사반대를 하는 걸까.
그러니까 광해군은 아래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v=1AanfmGUvT0
"그대들에게 명하오~
대동법을 즉각 실천토록 하시오~
이를 방해하거나 어지럽히는 벼슬아치가 있다면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릴터이니~
모두 유념하고 실천하기 바라오~"
이런 말한적이 결코 없다는. 오히려 대동법 시행 초기부터 이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가 겨우 신하들의 의견을 받들어 경기도에 한해 시행하는 걸 추인했던 것일 뿐. 그후 강원도에 확대실시하자는 여론이 들끓차 절대적으로 반대했던 게 다름아닌 광해군임.
실록을 조사해보면서 느끼는 게 당시 신하들과 관료들은 대부분 대동법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음. 오히려 처음부터 소극적인 반대로 일관하다가 강원도 확대시행을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했던 건 광해군임. 즉 저 영화에서처럼 모든 신하들은 반대하는 가운데 오직 훌륭한? 광해군만이 백성을 소중히 여겨서 대동법 시행을 닥달한게 결코 아니라는 말씀. 저 영화와는 반대로 대동법의 적극시행을 주장했던 건 오히려 이원익 이하 조정 관료들이었음.
그럼 대동법의 창시자인 이원익은 어떤 사람인가.
선조, 광해군, 인조를 세명의 임금을 내리 섬겼던 명재상이자 청백리.
당시 황해도 감사였던 율곡 이이의 막하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행정 실무를 배웠다고 함..그후 안주 목사로 부임하여 양곡 1만 여석을 풀어 기민을 구호하였음.
광해군이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적극 간하여 반대하였음. 여기에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귀향을 갔는데 소일거리로 돗자리를 손수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함.
그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인조가 이원익의 실무 행정 능력을 훌륭히 여겨 다시 영의정으로 임용했는데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죽이려는 걸 벼슬직을 걸고 반대하였음.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리 역임하면서도 사사로운 재물 치부를 하지 않아 그가 평생 지냈던 곳은 비가 오면 천장에 물이 새는 허름한 초갓집 한칸에 불과했다고 전해짐. 훗날 인조가 대신이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불쌍히 여겨 좋은 집채를 하사하자 이원익은 "이것도 역시 백성의 수고를 부담시키는 일"이라며 바로 받지는 않았다고 함
그는 남인에 속했지만 당색을 초월한 소신파였는데 당론과는 달리 훗날 서인 김육이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대동법에 대해 적극 지지했음.
또한 이순신을 평소에 높이 평가했으며 훗날 이순신이 선조의 노여움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하자 유성룡조차 포기했던 이순신을 적극 변호한 일도 있음.
실로 역사적으로 추켜 세워줘야 하는 인물이 정작 사람들이 전혀 모르거나 관심 밖에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네요.
첫댓글 대동법이... 뭐 방납의 폐단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이었던 건 맞습니다만... 그건 저희가 지금 시점에서 돌아봤을 때 그런 것이고 실제 조선 중기-후기 공물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할말이 많죠.
공물의 폐단에 대해 조선 후기 관료들은 크게 두 입장을 취합니다. 하나는 공부를 재작성하고 그 부담을 감하자는 측과 공물을 미곡이나 삼베, 동전으로 바꾸자는 얘기가 다른 한 측입니다. 초반에는 전자가 우세하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후자의 견해가 우세해지면서 대동법이 전국에 시행됩니다.
전자가 꼭 잘못된 것이냐.. 라는 걸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면 공부상 통상 납부할 공물의 가액은 대동법상 가액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통상 1결 12두가 대동법상 세액인데, 공물은 그의 1/3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은 처음에는 반대의견이 있응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공부상 공물을 경정한 가액에는 운송비용이나 위험비용, 행정비용이 가산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공부상으로는 그 부담이 크지 않아 보이니 당연히 임금 입장에서야 대동법을 실시해서 세액을 늘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건 일반 부민의 부담만 늘어난다고 볼 수 있었으니 임금은 대동의 폐단도 생각했을 것이라 보입니다.
이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어떤 입장이 합리적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할 뿐입니다. 누가 대동을 해서 더 낫네 마네라는 건 가능하겠지만 왜 그 대동에 소극적이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김육, 이원익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광해의 판단에 합리적 근거가 전혀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한계로는 말입니다.
@다음연금술사 댓글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대동법 자체도 폐단이 있을 수 있고 합리적인 반대이유도 있을테지만 원래 개혁이라는 게 모든 게 다 들어맞거나 바람직하게 진행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그리고 갠적으로 광해군이 백성의 복리에 부합하는 어떤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서 유독 대동법 추진에 소극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당시 신하들과 관료들 대부분은 대동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군요 광해군은 강원도에 대동법 확대시행에 반대했군요
하지만 폐지하자는 안도 딱히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스까 형태로라도 꾸준이 유지되게 해 줌 으로 대동법의 확장에 관성은 실어주었지요. 리플에서 말씀하신대로 대동법의 확장은 결국 시장경제(특히 화폐경제)의 확대와 궤도를 같이 하는것이었기 때문에 화폐경제가 안착되며 대동법도 같이 안착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