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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 오호 십육국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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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민족 여러 국가의 형성
4세기의 화북
81. 화북 중원의 이민족 발호
흉노계의 여러 국가
흉노족의 자립과 그 원인
우리는 앞에서 원래 막북[漠北] 초원 지대에 웅비하고 있던 흉노족의 일부가 만리장성 남쪽으로 이주하고, 더우기 산서성의 각지로 남하해 간 경과를 보았다. 거기서 보았듯이 이른바 이 남흉노는 처음, 지배 부족인 도각종[屠各種]의 연제씨[攣鞮氏]에서 나온 선우[單于]를 수장으로 하고, 후한[後漢]제국의 지배로 부터 반독립된 부족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선우의 권위는 점차 실추되어 부족 연합은 내부로 부터 붕괴되어 갔다. 후한말의 혼란기에 어부라[於扶羅] 선우가 산서성 남부의 평양[平陽]에 머문 것도 실은 흉노의 중핵적인 여러 부족이 선우가 있어야할 본거지였던 산서성 이석[離石]에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조치였던 것이다.
이윽고 산서성을 제압한 조조[曺燥]는 내부에서 붕괴한 흉노의 여러 부락을 지역 마다 좌·우·남·북·중의 다섯부[五部]로 분할하여 통치했다. 각부는 각각 수천에서 1만에 이르는 「락[落]」으로 이루어지고, 그 중에서 「수[帥]:「진대[晉代]에서는 도위[都尉]라고 개칭된다」를 뽑아 이를 통솔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흉노인들의 자치를 인정한 것이 아니었고, 「수」의 곁에는 한인인 「사마[司馬]」가 감시자로서 두어졌으며 또 산서성 장관[병주자사[幷州刺史]」라고 한다]이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 직을 겸하여 5부 전체를 감독하는 구조였다. 위[魏]에서 서진[西晉]에 걸친 3세기에 흉노 여러 부락은 이러한 5부 분할 지배 체제 아래에 두어져 있었다.
그것은 선우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결국 선우가 완전히 뼈대만 남게 되어 버린 상태와 다름 없는 것이었다. 흉노족의 부족연합체와 함께 그 속에 보장되어 있던 흉노인 고유의 부락생활이 한인[漢人]의 증대하는 지배력에 의하여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일찌기 부락 결합 속에서 자유신분을 누리고 있던 흉노인은 한인과의 경제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그 노예나 소작인으로 전락해 가는 자가 많아졌다. 그 전형적인 예가 「흉노의 별종」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갈족의 석륵[石勒]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륵은 산서성의 갈실[羯室] 출신으로, 그 지방의 갈족 부락장의 집에 태어나 실제로 청년시절 부터 아버지를 대신하여 부락장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락장의 집조차 경제 생활은 결코 풍족하지 못하였다. 그는 14세 때 동향의 한인과 함께 낙양으로 장사하러 갔다고 한다. 그것은 한인과의 경제 관계가 깊어진 증거인데 그 한인들로 부터 모멸찬 눈길을 받았다. 단 그 중에서 곽경[郭敬]과 영구[寧驅]라는 한인 만은 평생 동안 물질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석륵도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며 은의를 보답했다고 한다. 은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경제적인 보호·봉사 관계는 이윽고 소작의 고정화를 낳아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윽고 302-3년 무렵, 산서성은 기근에 처해졌다. 석륵은 동류의 호인[胡人]들과 향리를 떠났으나, 곧 멀지않아 영구에게 의지하여 돌아왔다. 당시, 북부도위인 유감[劉監]은 유망하고 있는 호인을 잡아서 팔아치우고 있었다. 석륵은 영구의 덕분으로 그것을 피할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산서성 장관의 강제적인 인신매매 조치의 대상이 되어 많은 호인들과 함께 2인 1조로 족쇄에 묶여 산동성의 사환[師歡]이라는 사람의 노예로 팔려갔다.
이와 같은 4세기 초의 기근은 갈족을 포함한 흉노인의 일반적인 부락 생활을 파멸시키고, 그들 대부분을 노예와 같은 형편으로 떨어뜨렸다. 실제로 그 무렵 태원[太原]에는 노예 시장이 성립되어 있었고, 그 공급원은 태원을 중심으로 하여 산서성에 거주한 흉노인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3세기 아니, 그 이전 부터 시작된 것으로 흉노족의 자주성 상실과 그에 따른 생활의 곤궁화 현상에 도달한점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개막 -유씨[劉씨] 한국[漢國]의 성립
이제, 이러한 흉노족의 괴로움과 약소 종족으로서 한인으로 부터 멸시당하는 상황 등에 대하여 흉노인이 자주성 회복을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것일게다. 그들이 5부로 분할 지배 당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한인 정부가 일반 군현과는 별도로 5부라고 하는 특별 행정 구역을 설정한 것 자체가 흉노족 고유의 부락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는 증거이고, 그들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잠재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부라 선우의 아들인 유표[劉豹]는 5부 분할과 함께 좌부수[左部帥]가 되었다. 선우 일족이 유씨를 칭한 것은 일찌기 한대[漢代]에 황실 유씨와 통혼한 관계로 인하여 모계의 성을 취해 중국식으로 한 것이었다. 유표의 아들인 유연[劉淵]은 아버지의 사후, 그 좌부수를 이었고, 나아가 280년대 말경, 북부도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형법을 명확히 하고 간사한 것을 금지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겨 베푸는 것을 좋아하며, 진심으로 사람들을 접했으므로 5부의 뛰어난 인물은 모두 그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고 진서[晉書]에 기술되어 있다. 그의 신망은 좌부[左部]라든가 북부[北部] 등의 테두리를 넘어서 5부 전체에 이르고 있었다. 그의 후임 북부도위인 유감이 유망중인 동족을 잡아서 팔아치워서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한 일과 같은 흉노족 내부의 분열 현상이 있었던데 반하여 유연과 같은 인물에게 주목하는 분위기는 한층 강화되었음에 틀림 없다.
그 무렵 진[晉]왕조에서는 어리석은 혜제[惠帝] 아래에서 황실 일족이 어지러이 다투는 사태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른바 「팔왕[八王]의 난[亂]」인데, 그 팔왕 가운데 한사람인 성도왕[成都王] 영[穎]은 유연을 막하의 장군으로 그 근거지인 업에 끌어들여 흉노의 군사력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한편 산서의 흉노 5부 가운데 있던 유연의 증조부인 유선[劉宣]은 곧 약소 종족으로서 한인으로 부터 멸시당하고 있는 흉노족의 자주성을 회복할 호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몰래 유연을 대선우[大單于]로 받들고 흉노족의 자립을 꾀하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유선은 선우 일족의 인척에 해당하는 흉노 귀족인 호연유[呼延攸]를 업으로 보내어 그 계획을 유연에게 알렸다.
유연은 장례식에 참가하고 싶다고 하여 성도왕에게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한다. 그래서 우선 호연유를 돌아오게 하여 성도왕에게 호응한다는 명목으로 흉노 5부를 소집하도록 유선 등에게 의뢰했다. 마침 304년 선비족[鮮卑族]의 응원을 얻은 하북성 북부의 왕준[王浚]이 남하하여 성도왕의 군사를 무너뜨려, 성도왕은 혜제를 옹립하여 낙양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 유연은 성도왕으로 부터 왕준의 선비병과 다른 적대 세력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귀국하여 흉노 5부의 병사를 통솔하도록 허가를 얻은 것이다.
이리하여 유선 등 흉노 귀족에게 환영받은 유연은 우선 대선우를 호칭하여 산서성 이석에 모였던 흉노족 병사 5만명을 장악한다. 그리고 유선 등의 계획에 따라 같은 해인 304년 10월, 한왕[漢王]의 자리에 올라 독립을 선언했다. 그 나라를 한[漢]이라고 칭한 것은 한왕조의 인척으로 그 피를 잇는 자로서 현재의 진왕조를 타도하고 한제국의 재흥을 표방한 것으로 유선을 승상으로 한 것을 비롯하여 한왕조풍의 백관 형식을 따른 중앙 정부를 설치한 것이다.
304년의 이 흉노족 유씨의 한국[漢國] 성립은 같은 해에 저족[低族] 이씨[李씨]가 사천성에서 성국[成國]을 세운 것과 더불어, 여러 이민족이 중국 내지에서 나라를 건국하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중국 내지에 이주한 이민족의 자립 운동의 개시였는데,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만리장성 밖에 있어서의 이민족 국가의 재현일 수는 없었다. 흉노족 유씨가 한제국의 재흥을 표방했듯이, 중원에 건국하는 자로서는 필연적으로 호족[胡族]·한족[漢族]의 양세계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국가의 건설을 지향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이후의 화북은 그로 인하여 길고 험한 모색의 과정을 걷게 된다.
한[漢]에서 전조[前趙]로
140. 한(전조 유씨) 계보
독립 행동을 개시한 유연은 그 후, 산서성 남부 일대를 거의 세력 범위로 수습하고, 308년 평양[平陽 :山西省 臨汾縣]에서 제위에 올랐다. 그 무렵까지 석륵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후, 팔왕[八王]이 서로 다투는 대혼란 속에서 마적이 되었고 동료인 18기[十八騎]와 함께 점차 세력을 넓혀가며, 성도왕 영[穎]측의 여러 세력 아래를 전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유연에게로 귀속했다.
유연은 이 석륵과 같은 산동 방면에서 군사를 일으켜 귀항해 온 한인인 왕미[王彌] 등에게 동쪽을 경략하게 하여, 그 세력은 산서 남부를 중심으로 하북·하남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310년 유연은 일을 끝맺지 못한 채 병사[病死]하게 된다.
유연의 사후, 그 아들인 유화[劉和]가 제위를 이었으나 형제사이의 다툼이 일어나 대사마[大司馬]·대선우의 지위에 있었던 그의 동생 유총[劉聰]이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대선우의 지위에는 유총의 동생인 유예[劉乂]가 임명되었고, 또 황태제로서 유총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서의 지위도 차지하게 되었다.
유총은 그의 아들 유찬[劉粲], 동족인 유요[劉曜] 나아가 왕미와 석륵 등을 장군으로 하여 하남성의 각지를 공략하게 하여, 진[晉]의 수도 낙양에 까지 공격해 갔다. 진왕조측에서는 이 위기속에서도 회제[懷帝]·동해왕[東海王]·월[越] 사이에 반목이 생겨나고 있었으며 월과 함께 낙양에서 나온 진왕조의 고관 및 군인들은 월의 사후, 귀족인 왕연[王衍]에게 통솔되어 하남성 녹읍현[鹿邑縣] 서남의 영평성[寧平城]까지 왔는데 석륵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섬멸되고 말았다. 이것은 311년 4월의 일로서, 왕공[王公] 이하 10만명 이상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한편 수도 낙양은 그해 6월, 유요·왕미 등의 연합군에게 함락되어 궁전과 민가는 재와 먼지가 되어 버렸다. 이 때 왕공 이하의 사망자는 3만명 정도이며, 회제는 포로가 되어 평양으로 끌려가서 다음해인 312년 평양에서 살해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영가[永嘉: 307-312년의 연호]의 난[亂]」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유요 등은 또 311년에 장안을 함락했으나, 다음해 진군[晉軍]에게 빼앗기고, 진왕[秦王]인 업[業]이 한때 서진[西晉]의 제위를 계승한다. 이자가 민제[愍帝]인데, 316년 다시 유요는 장안을 함락하였고 민제를 비롯한 진왕조의 문관·무관을 포로로 함에 서진은 완전히 멸망했다.
이리하여 유씨의 한국은 낙양에서 부터 관중 일대를 장악하고 또 동쪽으로는 석륵 등이 세력권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석륵 등은 명목상 한[漢]으로 귀부했다고는 하나 나중에 보듯이 실질적으로는 독립 세력이어서, 실제 한의 세력권은 사서 남부를 중심으로하여 새로이 하남성의 일부 및 섬서성의 관중 까지 미치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 무렵 평양에 있던 유총의 조정에서는 이미 정치적 혼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유총은 국력을 능가하느 궁전을 새로 크게 건립하는 일을 강행하고 후궁의 규모를 확장하였으며 그와 함께 외척과 환관의 권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조정 대신들은 압박당했고, 살해당하는 자도 속출했다. 외척과 환관들은 유총의 아들인 유찬을 부추겨, 317년 황태제인 유예 일파를 주멸하고 유찬은 황태자가 되었다.
318년 7월, 유총이 죽고 유찬이 즉위하자, 외척인 근씨와 환관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였다. 황실 유씨는 주멸당하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황제인 유찬 까지도 살해당하여 외척인 근준이 정권을 빼앗기에 이르렀다. 근씨는 유씨와 마찬가지로 도각종[屠各種]에 속하는 흉노 귀족이다.
이 정변에 즉시 응하여 장안에 있던 유요와 동쪽의 석륵 등은 각각 병사를 이끌고 수도인 평양으로 공격해 왔으나, 한[漢]의 조정 대신들은 유요에게로 도망가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유요는 그해 10월, 장안에서 즉위하였고, 다음해 국호를 조[趙]라고 고쳤다. 한[漢]이라고 하는 국호가 한민족의 의향을 고려하여 진왕조의 타도를 표방한 것이었는데 반해 이미 서진이 멸망한 후, 그 의미도 퇴색하면서 분명히 북족의 국가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어서 사실상, 동쪽에서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석륵도 또한 319년에 조왕[趙王]의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유요의 나라를 전조[前趙], 석륵 쪽을 후조[後趙]라고 불러 구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