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의 액자 속에는 소리가 없다. 그녀의 배경은 어둡다. 남들이 백(百)을 들을 때 삼사십을 듣는 모나리자는 늘상 그렇게 앉아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다. 남들이 손뼉 칠 때 손뼉 치고 일어설 때 일어선다. 모나리자는 봄비 소리와 가랑잎 구르는 소리를 알지 못한다. 눈 오는 소리의 기억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모나리자는 구김살 없는 반달로 자라 모나리자가 되었다. 그녀는 어느 회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안 들리는 귀는 졸음을 몰고 오지만 입술을 깨물망정 흔들거리지 않는다. 그녀의 뒤에는 언제나 네모난 하늘의 조용한 틀이 있다. 모나리자가 듣는다는 것은 읽는 것이다. 그 어리숭한 눈으로, 전신의 세포로 상황을 읽고 덩어리진 소리를 조각한다. 스테레오는 어림없다. 그녀가 옷을 벗으면 온몸이 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살갗이 귀 모양으로 열려 있다. 그녀의 어깨는 어떤 바람에도 능선으로 놓일 뿐이다. 아무도 아는 이 없다. 그녀가 스스로 달팽이관을 열어 보이기 전에는 그저 행복한 모나리자일 따름이다. 그녀의 왼쪽에만이 사람이 있고 언어가 있다. 누구라도, 연인이 아니어도 나란히 앉거나 서서 말하며… 걷는다. 오른쪽 귀는 창세기 이전으로 잠잔다. 왼쪽만이 삼사십 퍼센트의 파도 소리를 듣는다. 삼사십을 들으며 오늘도 모나리자는 모자라는 이마를 가꾼다. 그녀의 그늘을 이렇게까지 아는 사람은 모나리자에서 차단된다. 세상은 모르는 만큼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