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례 신문에서 퍼온글입니당
마지막에
욕이 하나 나오는데....
걍 읽어주세여~
[문학속의공간]
포장마차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몸보다는 마음이 더 추워, 잔뜩 웅크린 어깨로 두 손은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종종걸음을 치지만, 맵찬 바람은 목이며 귀때기며 종아리며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겨울 밤의 어느 한 순간, 길 모퉁이의 불 밝힌 포장마차는 얼마나 유혹적인가.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그 더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안도현 <숭어회 한 접시>).
포장마차는 길과 집의 중간에 놓인 존재이다. 길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으며, 길 위의 집이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것은 그러하다. 길의 유동성과 집의 정주성을 두루 갖춘 물건. 포장마차는 길을 향한 그리움과 집에 대한 갈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준다. 포장마차에서 우리는 길 위에 있으면서도 집에 든 것 같은 편안함을 맛보고, 집 안에 들어와 있으되 여전히 길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젖을 수 있다.
포장마차는 미련을 먹고 산다. 힘든 하루 일과가 끝난 뒤, 또는 한 차례의 술자리가 파한 뒤에 식구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약한 마음에 그것은 슬쩍 발을 건다. 사람들은 짐짓 성가시다는 듯 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지만, 포장마차의 그런 수작이 정녕 싫지는 않은 기색이다. 그것을 뿌리치고 곧장 집으로 향해 보았자 포장마차의 매혹적인 자태는 좀체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포장마차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매혹적일까.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그런 풍경이? 물론 길을 가다가 불 밝힌 포장마차를 보게 될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은 소설 속 정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포장마차에 사로잡히는 것이 그런 외형 때문만이 아님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포장마차에는 분명 찬바람을 막아 주는 포장이 있고 시린 속을 데워 주는 국물이 있지만, 그런 `물적 조건'만으로 그에 대한 우리의 매혹이 충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언어학에서 말하는 기표(記表, signifier)라면 그것이 가리키는 속내로서의 기의(記意, signified)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따스한 인정, 낯선 사람들끼리의 의기투합,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의 재확인…, 뭐 이런 정도가 아닐까.
“좋은 소식 기다려서/연탄불 위에 모이는 손가락들,/이 시린 절망 위에 기다림 위에/제 손도 포개면서/뜨신 국물로/이 속떨리는 밤을 가라앉히거니.//(…)/짠 물 가시내도/가다가는 더러/모르는 사내에게 소주를 권하거니.//허리 굽혀 들어가 저를 달래고,/금세 세상이 트이면서/또 막혀 버리면서/이 하루 굴욕의 위장을 씻어내는,”(이성부 <포장마차에서>)
임영태의 단편 <포장마차>의 주인공 사내가 새벽 두 시라는 늦은 시각에 집으로 가는 택시에 오르는 대신 주황색 포장을 들치고 들어선 것 역시 그런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가슴 밑바닥의 이야기, 혼자 견뎌내는 이야기, 아무한테나 툭 털어놓게 되지 않는, 친구에게만 할 수 있는, 서로의 생을 묵묵히 인정할 수 있을 때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상대로 그가 고른 것은 다름아니라 포장마차의 주인인 청년이다. 매직펜으로 큼직하게 쓰여진 메뉴 글씨들에서 그가 “갓 개업한 이의 신선한 열정”을 읽어내고 까닭없이 호감을 품을 때부터 파국적인 결말은 예비된 것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청년에 대한 갖은 환상을 키워 가며 그를 “쓸 만한 친구”의 자리에 올려놓은 그가 네 시가 가까워서야 포장마차에서 나온 뒤 우연히 엿듣게 된 청년의 말(“어떤 xx놈이 술 한 병 시켜놓고 계속 죽치잖아”)은 막연한 기대가 확실한 환멸로 바뀌는 순간을 증언한다. 그것은 또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일치라는 현대 언어학의 통찰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박완서의 초기 단편 <내가 놓친 화합>의 주인공은 가난한 대학생 시절 단골로 삼던 포장마차를 찾은 대기업 수습사원이다. 주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신사 차림으로 나타난 그를 포장마차의 주인 부부는 처음엔 잘 알아보지 못한다. 더 큰 오해는 다른 손님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한다. 중동에 취직이 되어 나가게 되었다는 중년 남자와 대학생 청년이 초면임에도 오랜 친지처럼 구는 모습을 주인공은 아니꼬운 심사로 지켜본다. 중년 사내가 중동에서 버는 돈을 대학생에게 부치겠노라며 명동의 시뭔 다방에서 만날 약속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속으로 혀를 찬다: `촌스럽게 시뭔이 뭐야. 시몽이지, 시몽.' 그러나 소설의 결말에서 실제로 `심원(深原)' 다방을 확인한 이 헛똑똑이는 그제서야 그들끼리의 화합을 인정하고 축복한다: “이 세상에 그런 화합도 있다는 건 이 아니 살맛나는 일인가.”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초면인 세 사람이 포장마차에서 만나 일행이 된다.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한다”는 데에 합의한 스물다섯 동갑내기 안과 김, 그리고 병으로 죽은 아내의 시신을 해부용으로 막 처분한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그들이다. 아내의 시신을 판 대가로 사내가 받은 돈을 그날 중으로 써 버리기 위한 기행과 소란 끝에 세 사람은 여관에 드는 것인데, 혼자 있기 싫다는 사내를 안은 억지로 각방에 들게 한다. 싸락눈이 내리는 다음날 아침, 사내가 자살한 것을 확인한 안과 김은 도망치듯 여관을 빠져나오고, 안은 김에게 말한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김승옥의 포장마차가 권태와 소외, 소통불능의 실존적 공간이라면, 박노해의 포장마차는 노동자들의 울분이 투쟁의 의지로 승화하는 계급적 각성과 결단의 공간이다.
“2차 가자 집에 가자 고고장 가자는 걸/알뜰꾼 신씨가 눌러앉히고 한 병 두 병 더할수록/거나하게 취기가 올라/좆같은 노무과장, 상무새끼, 쪽발이 사장놈,/노사협의회 놈들 때려엎자고/꼭 닫아둔 울화통들이 터져나온다”(박노해 <포장마차>)
그러나 세상이란, 그리고 삶이란 그처럼 단순 명쾌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실존과 투쟁이 둘이 아니며, 실존이 곧 투쟁이요 투쟁 속에 실존이 있다는 사실을 김기택의 포장마차 시에서 확인해 보자.
“칼자국 무늬로 나이를 먹은/늙은 도마 위에서/산낙지 한 마리/내리치는 식칼과 싸우고 있네/희고 말랑말랑한 살로/맹렬한 꿈틀거림으로/모가지에서 뿜는 피처럼 싱싱한 비린내로”(김기택 <포장마차에서> 전문///).
--글 최재봉 기자 <한겨레신문>(2000.12.26)
포장마차에서 엿들은 이야기
#1.
“어느새 연말이네. 와이투케이입네 뉴 밀레니엄입네 떠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 말야. 1년 사이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 아이엠에프 졸업이니 닷컴 열풍이니 하는 말들은 다 어디로 가고 경기가 이 모양인가, 이 모양이.”
“요즘 지하철 역엘 가 보면 노숙자들이 부쩍 늘었더라고, 날도 추운데. 그나저나 자네 회산 괜찮은가?”
“모르지. 윗사람들은 잔뜩 인상 찌푸리고 협박성 발언이나 일삼고 그러는데.”
“우리도 연말 보너스 받긴 틀린 모양이야. 젠장할. 수틀리면 나도 이런 포장마차나 차릴까 봐.”
“아서, 아서. 포장마차 만만하게 보다가 큰코 다친 사람이 한둘 아니라던데.”
#2.
“너 요즘 걔하고 잘되냐?”
“형, 그렇지 않아도 상담 좀 할려구 했는데. 여자들은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문젠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어느 날은 나한테 꽉 잡힌 것처럼 굴다가 또 어느 날은 영 썰렁한 게 아직도 진도 한참 더 나가야 될 것 같고 말야.”
“그러길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했잖냐.”
“형수도 연애할 때 그랬수?”
“당근이지.”
“그러니 그걸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거야?”
“뭐 뾰족수가 있겠냐? 은근과 끈기로 기다리는 거지. 너무 초조하게 굴지 말고, 그때그때 여자의 컨디션을 잘 살펴서 적절하게 대처하는 거야.”
#3.
“아쥬머니, 아쥬머니 보시기엔 어때요? 제가 그렇게… 무능해 보임미까?”
“아니요. 전혀 안 그러신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죠? 아, 그런데 우리 부장 쇄끼는 왜, 날 가지고… 끅, 그렇게 못살게 구는 거죠, 도대체?”
“그 부장님 이상한 분이신 모양이네요.”
“맞아여. 사람을, 아주, 들들 볶는 게 취미라니깐요, 끅. 아쥬머니, 여기 한병 더 쥬세여.”
“많이 드신 거 같은데, 이제 그만 하세요.”
“아니예여어. 저 술 안 취했어여. 끅, 한병만… 더 마시고 갈게여. 한병 주세여, 어끅.”
for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