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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스크랩 동아시아 [한국사전]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광해군" (이거슨 본격 고혈압 주의 요망 글ㅋ)
크릭스마리네 추천 0 조회 687 10.02.13 13:40 댓글 2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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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2.13 21:36

    첫댓글 실리외교에 약간 가려진거지만, 광해군 또한 무리한 궁전건설등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했죠. 또한 광해군은 혁신적이라고 하기는 힘든 상당히 보수적인 임금이었죠.

  • 10.02.14 03:09

    광해군이 혁신적이라;; 현실적이라면 모를까...

  • 10.02.13 23:26

    반대하는글도 있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군주 였다고 생각합니다. 시조가 가슴에 시려오네요,,,,,,,,,,,,,
    음악도 좋고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 10.02.14 00:09

    광해는. 사실. 영창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건 아니죠. 밑의 애들이 줄창. 달달달달 볶는데. 어쩔수 없었던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왕권이라는게 우스운게 어떨땐 사람을 파리목숨 죽이듯 찍어내기도 하지만. 또 어떨땐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드문경우도 많았으니 말이죠.

  • 10.02.14 02:33

    임해군이 대표적인 희생양

  • 10.04.28 02:13

    그렇죠.......

  • 10.02.14 03:08

    선조가 방계혈통이라 왕되고 난 뒤에도 신하들 등살과 누가 자기 왕권 뒤집을까봐 평생 피해의식에 쩔어 살았죠. 선조가 속이 좁아 망조스런 일을 많이 남겼지만, 다소 불쌍한 인물이기도 했죠. 영창대군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른 정통성이 떨어지는 왕들도 비슷했는데, 적자를 왕위에 올릴려고 혈안이 되었죠.

  • 10.02.14 13:10

    광해군이 있어도 청은 내려왔습니다. 인조의 외교정책, 광해군 때와 바뀐적이 별로 없어요. 양대 호란은 조선의 외교정책 변화가 아니라 후금의 상황변화에 기인한 게 더 큽니다. 영원성에서 가로막히면서 산해관을 넘어가질 못하고, 내몽골이 귀순하면서 부양해야 할 인구는 증가했는데 만주에는 흉년이 거듭되었습니다. 식량부족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였으며, 이때문에 병자호란 직전 조선에 보낸 국서를 보면 아사하는 자들이 속출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죠. 산해관을 넘어가지 못하는 시점에서 후금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속된 말로 '조선에서 최대한 삥을 띁는 것' 외엔 없었으며, 광해군이라 해도 대응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집니다.

  • 10.02.21 01:17

    그런데 무비면 에서는 광해군이 인조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연려실기술을 보면 인조때 방비를 강화하자는 건의를 재정 문제로 묵살한 경우가 많이 나오나 광해군때는 궁핍한 가운데에도 대포 주조가 더 늘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 10.02.14 13:14

    양대 호란을 피할 방법은 청의 요구에 전적으로 호응하는 것인데, 그 요구조건 중에는 대규모 수군 징발과 막대한 군량 제공 등이 있습니다. 이걸 광해군이 해결할 수 있었다? 어렵습니다.
    윤민혁님은 홍타이지가 집권한 시점에서 양대 호란은 피할수 없었다고 했지요.

  • 10.02.21 01:17

    피할 수 없지만 그처럼 처참하게 발릴 전쟁도 아니였습니다. 조선의 화약무기 체계는 동시대 최첨단이었습니다.
    운용을 잘하면 오히려 쳐발랐을지도

  • 10.02.21 11:39

    반정공신에 대한 보상 실수로 서북 방면부대를 상실해 버린 게 흠이고 전쟁지도부의 삽질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참하게 안발렸는데요;;;

  • 10.02.22 18:50

    왕이 대가리 박은게 쳐참하게 쳐발린게 아닌가요 ^^;;

  • 10.02.14 14:24

    인조는 분명 강경한 척화론자는 아니었죠. 척화론자와 주화론자. 그리고 점증하는 청나라의 위협사태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만 하엿을 뿐.. 하지만 당시 조정을 돌아보았을때. 척화론자 다수가 조정내부에 있었고 이들은 사사건건 청나라와의 관계에 깽판을 놓아. 전란을 크게 부채질한 책임을 피하긴 어렵다 생각합니다. 청의 요구도 사실 애초에는. 우리나라가 감당할만한 차원의 온건한 것이었으나(최소한. 나라의 존립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차원은 아니었죠.) 뻗대기. 및 모문룡에 대한 막무가내 옹호. 양다리 걸치기 등으로 인해. 청나라 조정을 격분시켯고 결과로 요구가 점점점 커지게 만들었으니.

  • 10.02.14 14:37

    최소한 1차. 조청전쟁때 된통 뚜드려맞은다음에. 정신줄을 잡았다면. 2차전은 없었을 공산도 꽤 되었을거라 생각하는데. 이럴땐 김부식의 신속한 사대주의 정신이 부럽긴 합니다. 금에 바싹 신속하게 엎드린건. 후대에. 신채호선생등에 의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최소한 백성들을 전란의 위협에서 해방시킨 공은 있었죠.

  • 10.02.21 01:19

    김부식하고 조선 애들하고 대면 김부식을 모욕하는 거죠. 막상 금하고 전쟁이 났다고 해도, 그 시대 고려는 훗날 보다 기강이 있었습니다.
    무신정권으로 망가진 체제로도 몽고와 전쟁을 수행했는데 그전에 금하고라면 충분히 할만했습니다. 인조와 그 병신들하곤 다르죠

  • 10.02.21 11:36

    ...기강? 어디가요.
    고려의 국방정책은 까야 제맛입니다. 생각해보면 조선보다 못해요.
    몽골 전쟁이요? 섬에 들어가서 백성이 어떻게 되든지 신경 끄고 '안보여안들려안나갈거야' 상태로 틀이박혀 있는건 전쟁수행이 아닙니다. 국가와 백성들에 대한 방기죠.
    금에게 할만, 이라... 전혀요. 금나라에서 신종할 것을 요구하자 거기에 순응할 것을 주장한 인사들 상당수는 동북 9성에서 구른 장군들입니다.

  • 10.02.22 18:55

    윤관 시절 동북9성 정벌 시절 적게 잡아도 8만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었고, 지휘 체계가 잡혀잇었는데, 그때 부터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절이 김부식이 잘나가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무신정권으로 인하여 막장으로 치달았던 시절에도 몽골 1차 침입때 중앙군이 3만이상 꾸려져서 영격을 나갔습니다(물론 개발렸지만)
    그리고 북방성들이 시간을 잘 벌어주었지요. 그리고 고려를 제외하고 적도 없던 시절이었고 패퇴하는 적들을 요격하러도 나갔고요.

  • 10.02.22 18:58

    고려의 개막장 무신정권 시절에도 이정도 였고, 그 후에 줄을 제대로 대서 국체를 보존하죠. 그에 반해 인조시절 청의 침입은 절대 장기전이 될 수 없었습니다.
    청은 배후에 명이 있거든요. 절대 단기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앙에 상시 대비 병력이 불과 14000이었지요. 걍 미친짓을 한겁니다. 이괄의 난도 그렇고
    그리고 쌍령에서 개쳐발리고 왕이 삼전도에서 대가리 박은 치욕을 당했지만, 고려의 김부식은 그런건 없지요.

  • 10.02.22 19:06

    갠적으로 광해군 복권시키길 원하는데....이 나라가 지금 왕조가 아니니...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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