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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 살던 사람의 서러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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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우리 시대의 전사(戰士) 시인이자 민중 시인이던 고 김남주 시인의 24주기 문학제가 열렸습니다. 고향이자 생가가 있던 해남의 김남주문학기념관에서 행사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도 바쁜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살아 있던 시절, 형님 아우라 칭하며 그렇게 가깝게 지냈던 인정으로 보거나, 그런 위대한 시인의 문학제에는 반드시 참석하여 그의 시를 기리고 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를 추모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졌어야 했건만 그러지 못한 죄스러움을 이기기 어려웠습니다.
꽁꽁 묶여 광주교도소에서 다른 교도소로 이감 가던 버스에서 읊었던 시로 보이는데, 갇힌 사람의 서러움이 이 이상 더 절실한 시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요.
유배살이가 지겨워 바람에 흘러가는 흰 구름처럼 세상으로 훌쩍 떠나고 싶던 다산, 유배살이 초기 포항 곁의 장기에서 읊었던 시인데, 그런 마음으로 18년의 귀양을 살았으니 그의 닫힌 생활은 얼마나 비참하고 서러웠을까요. 박석무 드림 |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 반발하여 2학년 때 자퇴했다. 1969년 검정고시로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에서는 최초로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는데,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하였다.
8개월간 복역한 후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자, '시'와 '돌멩이를 든 데모대'로는 한국사회 지배계급의 벽을 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의 조직'을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광주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 카프카를 열었으나 경영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를 결성한 뒤 같은 해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다가, 사상성 문제로 1978년 서울로 피신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하였다.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 시기 그는 철학과 문학, 사회과학, 경제학 등 폭넓은 독서와 고민, 그리고 연구를 바탕으로 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문학과 사상, 세계관을 완성해갔다. 1984년 수감 중 첫 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은 그가 감옥 안에서 우유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서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었다.
1988년 12월 그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는데, 수년에 걸친 문인들의 구명운동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곳곳의 문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과 서한을 노태우 정부에 발송하여 얻어낸 결과였다. 이듬해 그는 옥바라지를 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이 악화되어 사퇴한 뒤 췌장암으로 고생하다 1994년 사망하여,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가 스스로를 '시인'이 아닌 '전사'라고 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는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며, 유장하면서도 강렬한 호흡으로 반외세와 분단 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및 노동 문제 등 현실의 모순을 질타하고 참다운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시집 〈나의 칼 나의 피〉(1987)·〈조국은 하나다〉(1988)·〈사상의 거처〉(1990)·〈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 등과 시선집 〈사랑의 무기〉(1989)·〈학살〉(1990), 산문집 〈시와 혁명〉(1991),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1978) 등이 있다.
2000년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안치환의 헌정앨범 〈Remember〉가 발매되었고, 같은 해 5월 광주 중외공원에 〈노래〉가 새겨진 시비가 제막되었으며,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신동엽창작기금(1991)과 단재문학상(1992), 윤상원문학상(1993), 민족예술상(1994)을 받았다. 고은·신경림·김지하·박노해·백무산 등과 함께 1980년대 민족문학의 기수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