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기문 생가마을.2 – 찾아가 둘러보기
2019년 08월 10일 08시 45분. 대전역에서 너무 덥고 더워서 미처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도 잊었는지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없이 출발시간이 되자 철거덕철거덕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면서 곧 탄력을 받고 힘차게 내닫는 무궁화호 철마다. 시끄러운 것이 너무 싫어 조용히 떠나나 보다. 승무원도 없고 잡상인도 없고 입석도 없고 대전이 출발역으로 좌석이 절반 이상 텅텅 비어 썰렁하다. 오늘 같은 무더위에 실내는 시원하니 우선 피서하는 기분으로 나쁘지는 않다. 목적지 음성까지는 1시간 20분이 소요된다. 창밖은 녹음으로 푸르다 못해 시커멓다. 가마솥 열기처럼 쏟아지는 폭염에 농작물은 무성하게 자랐으며 벼꽃이 피어오르고 일부는 고개를 숙인 곳도 보인다. 충북 음성군 원남면 행치길의 반기문 생가마을로 봄이면 산 주변에 온통 살구꽃이 피어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냈다는 행치(杏峙)마을이다. 마을은 들녘이 넓은 것도 아니다. 반씨(潘氏) 집성촌으로 20여 호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으로 소박한 풍경에 한적하기 그지없다. 마을 뒷산이 보덕산(큰산 509m)이다.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에서 갈라져 나와 충청북도 북부를 동서로 가르며 안성의 칠장산까지 이어져 70km를 힘차게 뻗어나간 한남금북정맥으로 한강과 금강의 분수산맥을 이룬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맥산행을 하며 거쳐야 하는 코스이다. 서북쪽으로는 김포 문수산까지의 한남정맥과 서남쪽으로는 태안반도 안흥까지 금북정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이 마을에서 반기문의 부모는 신혼살림을 차리고 6년여를 살다가 청주로 이사를 하여 2년여 살다가 다시 교육문제로 충주로 옮겨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반기문은 충주에서 초등하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사실 이곳은 어찌 보면 출생지에 지나지 않는 곳으로 큰 추억이 담겨있지 않다. 음성과 충주는 이웃해 있다. 학연의 충주와 혈연의 음성이 암암리에 다툼을 하다가 끝내는 조상들의 숨결이 대대로 묻어 있는 이곳 음성에 기념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제3자적인 입장에서는 충주면 어떻고 음성이면 어떠랴. 거기가 거기 같지만 이해관계에 얽매여 반기문에게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역대 유엔사무총장과 출신대륙 및 국가를 참고해 본다. 1대 리 (유럽 노르웨이), 2대 함마슐드 (유럽 스웨덴), 3대 우 탄트 (아시아 버마), 4대 발트하임 (유럽 오스트리아), 5대 케야르 (남미 페루), 6대 브트로스갈리 (아프리카 이집트), 7대 코피아난 (아프리카 가나), 8대 반기문 (아시아 대한민국), 9대 구테흐스 (유럽 포르투갈)이다. 반기문은 제8대 사무총장으로 2회에 걸쳐 2007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31일까지 10년간 재임을 하였다. 반기문 평화 기념관은 유엔의 정신과 반기문 8대 유엔사무총장의 활동과 업적을 기리고 더 나아가 미래의 글로벌 리더들이 될 청소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설립되었다고 그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반기문 제8대 유엔사무총장의 어록이랄 명언 몇 개를 적어본다. 인간관계는 금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맥이다. 실력은 실력이 있어야 행운도 따라 온다. 설득은 대화로 승리하는 법을 배워라. 소통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벽이 아닌 다리를 건설하라. 비전은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비전을 가져라. 협동은 함께하면 어떤 도전도 두렵지 않다. 함께하면 불가능은 없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지혜를 배워라. 공부는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도전은 잠들어 있는 도전 DNA를 깨워라. 소신은 당신의 생각이 옳다면 생각을 굽히지 마라. 긍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라. 그리고 절제는 헛된 이름을 쫓지 마라. 자기 개혁은 자신부터 변화하라고 한다.
반기문은 대한민국의 외무부장관을 거쳐 제8대 유엔사무총장을 역임한 후에는 기후변화문제와 빈곤퇴치, 질병예방 등에 힘을 쏟으며 인류평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행치마을에는 반기문 생가를 비롯해 기념관, 평화랜드 및 선영과, 사당, 돌로 만든 세계도(족보), 기념시비, 연못 등이 있다. 당초 생가는 초가삼간 흙벽 집이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슬레이트지붕으로 개조되었다가 2002년 3월경에 철거하였다. 다시 예전의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2010년에 복원하였다. 시골 중에 시골인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 세계인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오뚝이 같은 삶을 살아왔음을 눈여겨보면서 감동을 넘어 불굴의 도전정신에서 감탄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반기문의 부모님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시댁의 부엌이려니 하고 나갔다가 주인집 부엌임을 알고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충주에서는 지인의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어 쪽박을 차면서 끼니가 걱정이었다. 반기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중학교에 다니면서 일거리를 찾아 돼지 똥을 과수원에 퍼 날라 주고 옥수수를 얻어 연명하여 항간에서는 옥수수 학생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래나 부모님도 본인도 공부를 하여야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기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즈음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도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건장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있기에 직접 몸으로 부딪쳤다.
때마침 충주지방에 100% 미국의 원조로 비료공장이 설립되면서 미국의 엘리트 부인들이 남편을 따라 왔다. 이에 반기문은 고등학생으로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관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영어를 익혔다. 처음에는 수없는 거절을 당하였지만 그의 끈기와 진심에 감동을 받았는지 개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으며 하반기에 미국적십자사에서 주관한 세계 43개국 비스타 장학생선발에서 장원을 하여 당당히 한국 대표로 선발되었다. 1961년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그러나 117명의 선물을 준비하여 교환을 하여야 한다는 통보에 준비할 돈이 없어 포기하려 하였다. 지역사회에 알려졌고 영광스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돕기 운동에 나섰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다. 이웃한 충주여고에서 학생들이 실업시간에 복주머니 117개를 만들었다. 이를 전달하고자 생면부지의 학생회장인 유순택이 대표로 나왔다가 인연이 되어 그 후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10년간 교제 끝에 지금의 부인이 되어 일생동안 내조자가 되어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반기문은 복주머니를 가지고 미국에 잘 다녀왔으며 백악관에서 대통령인 케네디를 만나 장래 포부를 묻는 말에 당당하게 외교관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려는 듯 실제로 외교관의 길로 나섰다. 여기에는 담임선생님이 “너는 외교관의 자질이 풍부하니 그길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이 큰 몫을 하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다. 크게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다름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반기문 총장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기도 하다. 가지고 있는 재주나 실력이 남보다 뛰어났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우수함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만한 열정을 쏟아 부은 것이다. 그냥 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분석과 뚜렷한 목표에 추진력을 지녔던 것이다. 그것이 헛되지 않게 앞길이 풀려나간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37년 외교관에서 유엔의 수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대충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반기문은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며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일찍 우물 안 개구리에서 너른 세상으로 뛰쳐나간 셈이다. 능력이 특출하다고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성실해 신뢰를 받으면서 좋은 조력자를 만나고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운명이라고도 한다. 반기문은 가세가 어려운 중에도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열을 볼 수 있고 담임선생님의 애정 어린 보살핌이 있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비료공장의 건립과 영어를 직접 배울 수 있는 여건에 비스타 장학생으로까지 선발되고 이를 계기로 인생 동반자가 될 학생 유순택을 만나게 되었다.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첫 근무지 인도에서 노신영 영사를 만나 그림자처럼 되었으며 승승장구하였다. 성공한 사람은 그냥 성공한 것이 아니라 남이 포기할 때 도전한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 2019. 08.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