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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崔濟愚(1824~1864)】 「 시천주(侍天主)와 평등 사상 , 동학의 창시자」
「모든 인간은 몸과 마음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
"人乃天(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1. 한울님과의 문답 및 깨달음
1860년 4월 5일, 경주 용담정에서 한울님(상제)의 성령을 만나 영적 대화를 나누며 동학을 창도할 당시의 어록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吾心卽汝心, 汝何知之)
동학의 가장 본질적인 선언으로,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본래 하나라는 통찰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한울님이 최제우에게 내린 첫 계시로, 내면의 신성을 자각하게 만드는 순간의 기록이다.
"도를 기르는 기운이 오래도록 보존되니 사악함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뭇사람들과 한가지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 용담정 벽에 붙여두고 수도에 정진했던 구절이다.
2. 시천주(侍天主)와 평등 사상
최제우 사상의 핵심은 '모든 인간은 몸과 마음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시천주 사상이다. 이는 후대 교조들에 의해 '사인여천(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다)'으로 발전한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至氣今至 願爲大降)
동학의 핵심 주문으로, "한울님을 내 몸에 모셔 조화를 정하니, 그 은혜를 영세토록 잊지 못하고 세상만사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양반이냐 상민이냐보다 먼저 사람이 있었다."
억압받던 민중, 노비, 여성, 어린이를 통틀어 모두가 한울님을 모신 평등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조선의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자 한 선언입니다.
3. 다시 개벽(後天開闢)과 보국안민
혼란스러운 조선 후기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선포하며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 의지입니다. [1, 2]
"언덕 없이 마냥 평평한 땅이 없고,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으니..."
(无平不陂 无往不復) 세상의 이치는 순환하므로, 지금의 어둡고 불평등한 시대가 지나가고 반드시 정의로운 새 세상이 돌아온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덕을 천하에 펴고, 도탄에 빠진 세상 사람들을 넓게 구제하겠다"는 동학의 거룩한 목적이자 실천 강령입니다.
4. 대구 감영 형장에서의 마지막 유언
1864년 3월, 조정에 의해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 남긴 의연한 가르침입니다.
"나랏님의 명이 중하다 하나 어찌 하늘님의 명에 미치겠소. 태어나고 죽는 것이 어찌 내 뜻대로 되겠소. 하늘님이 내신 이 목숨, 하늘님의 천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죽는 것 또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외다."
형장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청수(淸水) 한 그릇을 받아 한울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린 뒤 의연하게 칼을 맞았다.
최제우는 순조 24년(1824)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 가정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유학자였던 아버지 근암(近庵) 최옥(崔鋈, 1762-1840)과 셋째 부인인 어머니 곡산 한씨(谷山 韓氏, 1785-1833) 사이의 1남 1녀 중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옥은 일찍이 정실부인 연일 정씨(1758-97, 둘째 부인 달성 서씨(1773-1811)등과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여 결국 첫째 남동생 최규(崔珪, 1770-1841)의 장남 최제환(崔濟寏, 1789-1851)을 입양했는데, 최제우는 그 후 후실 곡산 한씨를 들여 낳은 자식이다. 그의 아명은 최복술(崔福述, 崔卜述)이고 초명은 최제선(崔濟宣)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가한 몸이었으므로 최제우는 태생적으로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으나, 부친 최옥은 "모름지기 8살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면 싹수를 알 수 있다."하며 최제우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곧 가세가 기울더니 순조 33년(1833, 10세) 어머니를 여의고 헌종 6년에는 아버지를 여의어 홀몸이 되었다. 이후 최제우는 헌종 8년 경상도 울산도호부(現 울산광역시) 출신의 월성 박씨(月城 朴氏) 여인과 결혼하며 먹여 살릴 식구까지 생겼지만, 일정한 생계방편이 없어 몰락한 양반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농사도 배우지 않았고, 다만 한때 무과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얼마 못 가 무인의 길을 접고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장사꾼으로 일한 듯하다. 이때 최제우는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한 듯하다. 청나라와 영국과의 아편 전쟁을 전해 듣고서 청나라가 영국에게 패배당했으니 우리나라는 순망치한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할 만큼 능통하기는 하지만 침략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서학도 올바른 정신세계는 아니라고 여겼다. 이 문제를 두고 높으신 분들과 이야기해 보려 했으나 양반들은 장사꾼 행색인 최제우에게 판에 박힌 말들(공자 왈 맹자 왈)을 하며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최제우는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堯舜之治도, 孔孟之德도, 不足焉)"이라며 말 그대로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문화가 필요한 "다시 개벽"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듯하다.
결국 장삿일을 끝내고 철종 5년(1854, 31세)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경상도 울산도호부 상부면 길촌동(現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 길촌마을 636번지)[16]로 이주해 지내면서 철물점을 경영했지만 사업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시 고향 경주부 현곡면 마룡골(現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마룡골마을 산68-1번지)로 들어가 천도를 얻으려는 수행을 계속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대략 이 즈음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바꾸었는데, '제우'란 '어리석은 이를 구제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철종 11년(1860, 37세) 4월 5일(양력 5월 25일), 신내림과 흡사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상제'라고 부르는 존재와 대면하여 주문(呪文)과 병을 고치는 영적(靈的) 부적 문양을 받았다. <동경대전>에서 전한다.
不意四月불의사월 心寒身戰심한신전 疾不得執症질부득집증 言不得難狀之際언부득난상지제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알아낼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有何仙語유하선어 忽入耳中홀입이중 驚起探問則경기탐문즉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즉
曰勿懼勿恐왈물구물공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世人세인 謂我上帝위아상제 汝不知上帝耶여부지상제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하느님)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問其所然문기소연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生汝世間생여세간 敎人此法교인차법 勿疑勿疑물의물의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18]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曰然則왈연즉 西道以敎人乎서도이교인호
그러면 서도(서양의 도[道]: 그리스도교)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曰不然왈불연 吾有靈符오유영부 其名仙藥기명선약 其形太極기형태극 又形弓弓우형궁궁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노라.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受我此符수아차부 濟人疾病제인질별 受我呪文수아주문 敎人爲我則
교인위아즉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汝亦長生여역장생 布德天下矣포덕천하의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동경대전東經大全 - 포덕문布德文
최제우는 자신의 신내림이 꿈은 아닌가 하면서 1년을 다시 수행하고서 그때 얻은 가르침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철종 12년(1861, 38세) 6월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동학의 주문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포교하기 시작했다. 동학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영남 유림들 사이에서는 혹세무민의 사교라고 하여 동학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 때문에 철종 13년(1862, 39세) 9월 경주부 관아에서 최제우를 처음 체포했으나 제자들이 탄원한 덕에 석방되었다. 이후 동학 활동을 지속했다가 철종 14년(1863, 40세) 12월에 이름만 바꾼 서학이라는 혐의와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금 체포되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구(鄭雲龜)가 올린 장계에 따르면 '경주에 가까워올수록 주문(삼칠주三七呪)[19] 소리가 마을마다 채우고 있었다.'고 하므로 당시 동학의 파급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최제우가 철종 12년(1861) 6월부터 사람들에게 자기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으므로, 동학의 창시자로서 대외활동을 한 기간은 고작해야 2년 반에 불과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조정이 동학을 위험하게 여길 만큼 사람들이 호응한 것이다. 최제우 동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 삼칠주(21자 주문)를 가르치고 그것을 외워 일종의 신내림 체험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단 신내림 체험에 성공한 사람은 동학에 무섭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종교사에서 이런 신내림 체험이 유행할 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사회에 부조리가 만연하여 억눌린 계층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롭고 불만이 적절한 선에서 관리되는 사회에서는 이처럼 신내림 체험을 유도하는 종교가 대중적인 호응을 받지 못한다. 조선 말기 혼란스럽고 부패한 시대상에서 최제우의 삼칠주 주문의 내용대로 하늘의 지극한 기를 받는 체험을 했다고 생각한 동학의 신자들은, 이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열정에 휩싸였다.
최제우는 체포된 채로 압송되어 경기도 과천현까지 왔다가 철종이 갑작스럽게 죽어 조정이 혼란해진 탓에 다시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던 경상감영으로 이감되었다. 해가 바뀌어 고종 1년(1864) 경상감영 관덕정 뜰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41세 나이로 제자들과 함께 순교(殉敎)했다. 최제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직제자 해월 최시형은 동학의 2대 교주로 추대되었다. 천도교에서는 최제우가 살아생전에 이미 도통을 전해주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살아남은 직제자가 최시형뿐이라 추대되었다고 봄이 적절하다. 최시형은 스승 최제우의 가르침을 최대한 조선 조정이 용인하기 쉽게 성리학스러운 윤리도덕에 부합하게 해석하고, 주문 수행으로 신내림 체험을 유도하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동경대전 · 용담유사를 목판인쇄하여 퍼트렸다.
그러나 동학의 모든 신자들이 최시형을 최제우의 뒤를 이은 2대 교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신내림 체험을 폐지하는 등 행보에 반대하던 신자들은 최시형 동학에 반발하여 청림교, 상주동학교 등 별개의 동학계 종교단체를 형성했다. 또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은 동학뿐만 아니라 그 후 등장한 대부분의 민족종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학과 비슷한 시기 형성된 남학은 동학과 그 성격이나 교리가 상당히 유사하며, 증산교는 자신의 가르침을 참 동학이라 하였다. 최시형 동학, 그리고 손병희 천도교는 다른 동학계 종교단체에 맞서 자신들이야말로 최제우의 직계임을 매우 강조하며 정통성을 주장했다.
1864년 최제우 사망 후 동학에 대한 탄압은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동학(천도교)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신문에 "동학이 천도교이며 교당을 짓고 종교 활동을 하겠다"고 연일 광고를 게재했지만, 멸망이 코 앞으로 닥친 당시 정부(대한제국)는 이를 탄압할 힘과 명분이 없었다. 경술국치로 조선(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 여러 역적들에 대한 신원과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으나, 최제우에 대한 신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를 선언하며 동학을 창도했고, 2대 지도자 해월 최시형 선생은 사인여천을 주장했고, 3대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은 인내천을 주장했다. 1905년 동학의 3대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한다. 천지 대자연의 법칙이며 인간과 만물이 살아가는 길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버린 것이며, '시천주'라는 절대 가르침을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가르침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소박한 인품과 조직 구성력이 탁월한 2대 해월 최시형 선생의 활동으로 크게 조직이 확산했다. 그러나 영적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모시라는 '시천주'를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바꾼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사인여천을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해석한다.
<용담유사>에는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上帝)님을 너희 어찌 알까 보냐",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무극대도(無極大道) 닦아내니 오만 년 운수로다."해월 최시형 선생은 '천주님의 마음이 인간 속에 본성으로 있으니까, 천주님의 마음을 자꾸 길러야 한다'는 양천주(養天主)로 동학이 전개되었다.

첫댓글 "나랏님의 명이 중하다 하나 어찌 하늘님의 명에 미치겠소. 태어나고 죽는 것이 어찌 내 뜻대로 되겠소. 하늘님이 내신 이 목숨, 하늘님의 천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죽는 것 또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외다."_수운 최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