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연 吳德衍 (1871 ~ 1951)】 "27결사대원으로 친일 매국노 암살 시도"
1871년 6월 19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에서 태어났다. 이탁(李鐸)의 주도로 만주에서 조직된 27결사대원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7결사대는 을사조약과 한일신협약 체결에 찬동한 친일 인사 처단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결사대원들은 1919년 2월 24일 만주 펑톈성(奉天省)을 출발해 다음날인 25일에 안둥(安東)에 당도하였다. 안둥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서울로 들어가 권총과 탄환, 단도를 구하며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 3일에 처단을 시행하기로 하고 신주를 모신 행렬이 통과하는 망우리 고개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친일 요인 가까이에 있는 순종에게 해를 입힐 우려가 있고, 입수하려던 무기의 서울 도착도 늦어져 실행을 미뤘다. 다만 친일 요인을 규탄하고 ‘광무황제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내용을 담은 성토문을 순종의 가마 안으로 던져 넣는 행동에 성공하였다. 27결사대는 3월 15일에 이르러 권총 6정과 탄환 수백 발을 보유하고 다시 거사 기회를 노렸다.
27결사대원들은 서울에서 독립운동 선전 활동에도 활발히 나섰다. 1919년 3월 20일에는 색이 바랜 독립문의 태극기를 선명하게 칠하였다. 또 성토문·경고문·격문 등을 독립문과 종각 등 여러 곳에 붙이고 군자금 모집에도 나섰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행적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같은 해 5월 5일 대원 중 일부가 체포되어 27결사대의 거사 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탁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과 함께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하여 1919년 5월 말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으로 귀환하였다.
1920년 6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삼성(東三省) 외교위원부(外交委員部) 위원으로 임명되어 외교 분야에서 활약하며 1927년 신간회 만주지회 발기인, 1929년 신간회 만주지회 확대간사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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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 부근 독립운동 단체 관련 일제 측 보고(1923. 6. 28)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