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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림 이 현필 李 鉉弼(1913-1964) 생애 보기
이현필과 동광원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쳤다.
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임종 수일 전부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먼저 갑니다. 다들 다음에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성인 이현필선생의 임종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그린 성화의 모습이나 같았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된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세종과 달리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을 훈련했다.
이현필 선생을 가장 초기부터 따랐던 분으로
당시 남원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던 오북환 집사였다.
오북환집사는 이현필을 만나 그 감화력에 동화되어
목공소를 내놓고 집회장소로 삼았다. 그는 일생 이현필을 본받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 동광원을 가꾸며 헌신했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화순의 화학산과 남원의 지리산에서 수년씩
홀로 기도생활을 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仙人來)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면서 기도 및 경건생활과 노동 그리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켰다.
남원 지방의 독신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산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것이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어머니 강남순과 딸 김금남 두 모녀는 그때부터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때 김금남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로문제를 놓고 날마다 고민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하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진로문제를 놓고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나 깨나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을 지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교육은 보통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 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
이세종으로부터 전수된 순결사상과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7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이 한 번 지나가면 온 동내, 도시가 난리가 났다. 자신의 부인과 생이별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여러 곳에서 비난이 잦아졌다.
특히 전라남도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
이현필을 따라 다니자 그를 ‘산중파’ ‘금욕주의자’라 비난하고 그를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은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분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이다.” 하고 감격했다.
여순반란사건 이전에는 주로 경기도 능곡을 중심으로 농사와 탁발훈련과 전도활동을 했다. 그리고 복음전도대로서 그들은 또한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 남부지방을 돌며 탁발하고 전도활동을 펼쳤다.
해남 교회에서 당시 청년 김준호는 의사를 지망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현필 선생을 만나 평생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김준호는 당시 교회 내에서 살면서 손수 교회청소를 담당하고 혼자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하루는 그 교회 집사가 “우리 교회에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올 것이오. 그는 광주에 사는데 목수 일을 하고 시래기죽만 먹으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사는데 항상 기쁨이 충만하여 종일 하나님만 찬양하는 사람이라오.”하고 말해주었다.
그때가 1946년 가을이었다. 강단의 책상 위에 국화를 꺾어다 화병에 놓고 예배를 준비했다. 트럭을 타고 두 분이 내려왔는데 모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한 분은 톱 망치 등 목수연장을 담은 걸망을 지고 내렸다. 이현필 선생과 오북환 집사라 했는데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청년 김준호는 속으로 ‘저런 분이 어떻게 믿기에 잘 믿는 사람일까’ 하고 있었는데 이현필선생이 설교하러 책상 앞으로 나와 앉았다. 그런데 그가 책상 위 화병에 놓여있는 국화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음성으로 “어찌하여 이 꽃을 꺾었습니까? 꽃은 꺾지 마시고 피어있는 그대로 두고 보셔야 되는데...”하시며 한참을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순간에 김준호는 이현필선생의 그 말씀과 그 모습을 통해 온 몸을 울리는 한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애틋함과 온 우주를 껴안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을 따르면서 스승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필은 제자를 사랑하여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맨발로 30리 50리 산길을 달려갔다.
6.25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서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차를 탈 때면 언제나 제자들에게 가장 나중에 타자며 다른 사람들이 다 탄 후에야 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구원을 받은 후에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겠다는 철저한 이웃사랑이요 보살정신이었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라면서도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사라지고 이현필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좇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또 결핵을 앓고 있는 제자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제자들에게 선행위주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으로 가르쳤다.
이현필은 복음의 삼덕을 순결, 청빈, 순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수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빈’ 곧 가난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자족의 방법과 나눔을 통한 삶을 말했다.
그 실천적 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동광원’이다.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로서 본원은 남원에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분원, 지지리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서 그 제자들이 수도하고 있다.
이현필 선생의 영성을 말한다/ 심 상 봉 (목사, 임실제일교회)
감히 성자의 영성을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모로 송구스럽다. 9월 27일∼30일(3박4일)까지 선생님의 직제자이신 오북환 장로님과 김준호 선생님을 모시고, 지지리(전북 장수군 번암면) 깊고 깊은 산골짝에서 귀한 수련을 받으면서 과분한 원고 청탁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집필을 하게되었다.
이현필 선생의 스승이 된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 선생님이 계시다. 이세종 선생은 전남 화순 도암에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인으로서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셨다. 그 상황에서도 성경책을 구입하여 머슴들의 휴식처인 사랑방에서, 창세기 일장 일절부터 하루 밤에 한 절씩 암송하기를 몇 달을 하다가 국문을 터득하고, 성경(하나님의 말씀)읽는 산당까지 마련하여 탐독하다가 도통하였다. 밤이면 기도하고 밝아지면 말씀 읽다가 하는 생활을 수 개월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사람들이 광주에서부터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화순으로 모여들었다. "깊이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아진다. 좁은 길이다. 깊이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 일본한테는 이웃나라를 못살게 하면 너희 나라가 망한다"며 외치다가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1913년 1월 28일 탄생하였다. 이 선생도 같은 도암면이라 이세종 선생을 찾아다닐 때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책망도 받으며 억압을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미친놈들, 무식한 머슴살이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고 쫓아가느냐?"고 핍박을 하였으나 이세종 선생의 유일한 제자가 된 것이다. 많이 오면 좋을 것 같으나 많으면 많을수록 방해꾼이 많아 석가도 3천명 중에 한 사람만 주의 집중하며 설법을 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승의 품격이나 용모가 뛰어났고 믿음의 열정도 불같이 확실했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세종과 이현필 두 인물을 두고 비교해 본다면, 이세종은 이현필보다 무식했으나 선(線)이 더 굵고 큰 인물이었다. 그가 그렇게 무식했으나 유명해진 것은 그는 성경을 한 번 읽고는 한번 실행하고야 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생각하면서 돼지는 돼지를 낳고 성자는 성자를 낳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현필 선생은 광주 양림동 변두리에 움막같은 큰집에 자리를 잡았고(지금의 봉선동 귀일원) 은혜생활을 갈망하는 순박한 심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6.25동란이 지난 후 고아들과 과부들, 생활능력이 없는 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한집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가 전국 각처에 생활터전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어 있는 공동체가 10여곳이 있다. 이 선생은 제자들에게 정신을 넣어주려고 교육과 훈련을 시킬때는 철저했다. 자주 독립정신, 청빈과 검소한 생활로 훈련을 시키셨다. 이 선생의 감화력은 대단했다. 한 말씀에 남편을 사별하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고, 부모도 아내도, 자신의 재산도 분토와 같이 버리고 따랐기 때문에 가정 파괴범이라는 악평을 받으면서 이단시되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YMCA총무로 봉직하는 정인세 전도사를 방문한 진짜 거지선생은, "당신의 가족의 영혼을 책임지겠으니 나를 따르라"말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정 선생은 이제까지 이러한 책임성있고 신뢰감이 있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후에 동광원 원장으로 봉직하시다 아버지 집으로 가셨다.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했다고 할까, 초월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함께 있는 제자들이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하루 한끼(一日一食)식사를 하면서 옛날 구정물통에서 건져온 쓰레기 찌꺼기를 끓여먹고, 옷은 한번 입으면 다 떨어질 때까지 입기 때문에 몸에 기생하는 이가 밖으로 기어 나오면 잡아서 품안으로 넣어 주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방은 독채로 지었는데 벽은 가마니를 치고, 서까래는 해바라기대를 사용하여 주택을 마련했으니, 거지집에 거지옷이요, 거지밥이었으나 마음먹고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영혼을 사로잡아, 새 길을 찾게되고 그 길을 따르게 된 것이다. 예화로 일본식민지시대에 천황 폐하라는 자가 비서에게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무언가라고 묻자, 한참 침묵 끝에 "목사가 제일 무섭습니다."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느냐?"
"진실한 자가 참 목사에게 가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어떠한 수단이나 핍박, 고문을 가해도 절대로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써 어떻게 할 수가 없게 정직해 버립니다."
"그것이 참말이냐?"
"바로 우리 일본의 기독교인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교회가는 사람을 다르게 본다.
1948년 이현필 선생의 일행이 전남 해남에 처음 전도여행을 갔을 때의 모습은, 머리는 삭발하고 다 떨어진 바지저고리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엔 깡통을 들고 맨발이었다. 거지치고는 상거지의 모습이다. 그러나 해남 교인들은 존경하며 영접하였다. 당시 군수 부인도 믿음의 식구로써 선지자 대접을 하였다. 일반 신도들이 이현필 선생을 알아보는 것은 해남읍 교회목사가 존경하고 알아모시기 때문이었다.(지금까지도 성자를 알아보는 눈이 없음은 하늘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요 이 몸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증거이다.)
그는 강단에 오르지 않고 마루바닥에 정좌로 말씀증거를 하였기 때문에 작은 밥상이 마련되었다. 교회화단에서 가을 국화 몇 송이를 꺾어 화병에 꽂아 놓았을 때 이것을 보고 "꽃 한 송이가 꺾였다. 꽃 한 송이가 꺾였어"라고 말씀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다. 꺾이지 않아야 할 꽃이 나 때문에 꺾어졌다는 안타까운 말씀이었다. 다른 말씀이 있을까하고 기다리면 침묵을 깨고 "꺾이지 않을 꽃이 꺾였다."시며 이 세상에 많은 인생들 특별히 여성들의 한 풀이를 하셨다. 이 말씀은 당시 젊은 청년 김준호 선생의 마음을 두드렸다. 뜰에 핀 꽃 한 송이를 저렇게 아끼는 선생님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맡길 만 하다고 믿고 따랐다. 이분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 김준호 선생이시다.
그러나 가장 초기에 따른 제자는 오북환 장로이다. 오 장로께서는 전북 남원읍내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삼일목공소를 동업하였는데 일제 순경들의 감시도 수없이 받았다. 당시 오북환 집사와 동생 오동옥 목사는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오 장로의 목공소 2층에서는 이현필 선생의 집회가 계속되었고, 기성교회는 그 불길을 억제 할 수가 없으므로 이현필은 공산주의자라고 경찰에 고발을 하여 집회 중에 급습을 하기도 하였다. 2층 다락방을 덮쳤으나, 우연치 않게도 성경말씀을 가르치시던 이현필 선생은 바람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는 남원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주부들 몇 명과 오북환 장로의 가정식구, 외지에서 온 사람 몇 명뿐이어서, 타지 사람들만 조사를 받았다. 남원읍내 기성교회는 좋은 방어책이 없으므로 부인들 단속하기에 바빴고, 교회목사는 교인 감시하는 비상이 걸렸었다고 한다. 남원만의 현상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때의 경종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아서 동광원의 출입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고전4:20).)
우리들의 머리에는 대집회라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기적을 보이는 마술사적이요 인간적인 야욕에서 구름같이 몰려다니는 것이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의 모임자리는 몇 사람이 모여 있어도 더 이상의 인간적 기대를 할 수 없을 만큼, 또 그 이하의 청렴한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청빈낙도의 경지이다. 이것은 주님의 역사이다. 인간의 의지나 학식이나, 다른 사람 흉내내는 원숭이 같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반 대중은 순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만 따라가면 아버지께서 역사 하시는 삶을 순응하게 되는 것인데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 잘못 갔다. 지도자들이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난의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도 내가 맡은 한 몫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을 기꺼이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어야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워가고 있는 것입니다"(골 1: 24). 예수 십자가의 고난이었다면 분명히 부활의 씨는 심겨진다고 믿었다. 당시만 해도 교회의 순결성이 보였으나 지도자들의 우매함 때문에 선생을 보는 눈이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같은 현상이다.
필자는 60세가 다가올 때 얼마나 고민이 되었는지, 죽어도 좋으니 이현필 선생 제자들의 공동생활에서 새로운 변화를 얻고자 교회를 도망치듯 떠났었다. 밤마다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나에게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아무도 나의 거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고 머리도 깎아 버리고 신발도 옷도 주워입고 지냈다. 날마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1장 5절, 11장 25절∼26절의 몇 마디 말씀과 씨름을 하다가 다 치워 버리고 3장 16절에 귀착되었다. 이 때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을까? 예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모른 무지와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알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관념적이 아니라 현실적이요 내 몸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소화되었을 때, 예수의 피와 살이 되어서 겸손, 사랑, 관용, 아니 온 세상이 아름답게 되고(성령의 열매 갈 5: 22∼) 예수님의 것으로 발아되었을 때 성자님들의 뜻이 만분의 일이라도 믿어지는 듯 하였다.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고 보고 했는가? 죄송스럽다. 더 이상 말씀을 드리지 않겠다. 이현필 선생의 기도문으로 끝을 맺는다.
주여!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시옵소서
죄인 된 것을 깨닫는 시간이 제게 가장 행복 된 것은
구주가 제게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여!
항상 저의 약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이 가장 제게 복된 것은
크신 권능이 물밀 듯이 찾아주시는 까닭이로소이다
이 험악한 세대에
이 두 가지 큰 위로가 저의 자랑이 되나이다
성령의 역사로 이 사람들이 다
주님 권능만 믿고 바라게 하옵소서
이 사람들만 아니라
참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자들을 다
주님의 은사만 알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우리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잘난 사람이거나 부자이거나 세상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생각하거나 어떤 환시를 통해서만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변에 천대받고 멸시받는 그 분들 속에 계신다. (마태. 25:31-46. 참조.)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일제시대 종교의 자유가 없어진 그때 겨울, 25세의 한 청년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겨울의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지리산 중턱을 넘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눈보라에 그 청년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없어진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었다.
모진 눈바람속에 길을 잃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메이게 되었다.
한참을 눈바람과 사투를 하던 청년의 눈에 하나의 불빛이 비취었다. 아주 아득히 반딧불만하게 보인 불빛은 희망의 빛이었다. 그 빛을 따라 그 곳에 당도한 청년이 볼 때 그 집은 일반집이 아닌 갈대와 짚으로 만든 움막이었다.
청년은 “사람 살려 주세요”하고 소리쳤다.
안에서 인기척이 나며 사람이 나왔는데 그는 다름 아닌 문둥병자였다.
그는 청년을 반갑게 맞이하며 안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서 본 그의 모습은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몸은 붓고 피고름이 흐르는 중병환자였다. 청년은 무섭기도 하고 전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불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 바로 곁에 앉아 추위에 떨었다. 그는 청년을 향해 “청년, 이불속으로 들어오시오 몸이 얼겠소.” 그러나,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몸이 점점 얼어오자 그는 이불속에 두다리를 넣었다.
그는 청년에게
“몸을 완전히 이불속에 넣어서 좀 녹이시오.”
청년은 피고름이 묻은 이불속에 몸을 넣기가 두려웠으나 추위에 어쩔 수 없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속에서 몸이 풀리고 노독이 일어나, 몸은 천근 같이 무거워지고 열이 불같이 일어나며 갈증이 나고 목이타 냉수를 청하였다.
그는 청년에게 물을 떠 왔는데 피고름이 바가지에 묻어 있었다.
이것을 받아든 청년의 마음에 뜨거운 통회의 눈물이 흘렀다. 주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가 떠올랐다. (눅. 10:25-37)
청년은 평소에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섬기는 줄은 알았지만 병들어 죽어가는 환자가 건강한 자기를 죽음에서 살려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일이 없었다.
그는 목메인 음성으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영문을 모르는 그는 청년에게
“청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년은 그의 간호로 몸이 회복되어 일주일 후에는 완전히 나았다.
청년은 그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저를 살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병과 모습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의 생명을 사랑으로 살려주셨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는 청년에게
“당신은 저에게 친구였습니다. 이병에 걸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죽는 날까지 이산에 홀로 살려고 들어와서 움막을 짓고 삽니다. 그런데, 당신이 저를 찾아와서 일주일을 지내고 가니 청년! 정말 고맙소. 당신은 저에게 은인이며 귀한 손님 이셨습니다. 편안히 잘 가시오.”
청년은 움막을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자기를 버리는 눈물이요. 영의 눈이 열리는 피의 눈물이었다.
바울이 다멕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사도행전. 9:1-18. 롬. 8:18-23) 받은 것처럼 청년은 문둥병자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받았다.
그는 그때에 받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화를 받아 문둥병자, 고아, 과부, 거지등 이 세상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천대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의 화신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참사랑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문둥병자를 통해 청년에게 알려 주셨다.(고전.13:6. 롬.12:9-13. 13:8-10. 참조)
청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옛사람이 아닌 새로 난 사람이 되었다.(골.3:9-11. 공동. 개역. 참조)
이 이야기는 이 현필 스승님께서 자신을 증언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