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케냐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 여성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 수여받은 노벨 평화상을 만져보는 왕가리 마타이
마타이는 1940년 4월 1일 케냐 중부 고원 지방인 니에리 지구의 리테의 촌락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영국이 케냐를 지배하는 시기였으며, 그녀의 가족은 그곳에서 수대를 거쳐 살아왔으며, 케냐의 가장 많은 다수 종족인 키쿠유 족이었다. 1943년 경, 마타이의 가족은 리프트 밸리에 있는 백인 소유의 농장으로 이주하였으며, 나쿠루의 촌락 근처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일자리를 마련하였다. 1947년 후반, 그녀의 아버지가 일하던 곳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만 남겨둔 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다시 리테로 돌아와서 학교를 다녔다. 마타이 왕가리도 8세가 되자, 그녀의 두 오빠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1세가 되던 해, 마타이는 니에리에서 마트하리 카톨릭 선교회가 운영하는 세인트 세실리아의 중학교로 옮겨갔고, 이곳에서 4년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동안 왕가리는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으며,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기독교식 이름인 메어리 조세핀으로 불렸다.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마타이는 계속되는 마우마우 폭동에서 피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리테의 수용소에 강제로 이주하게 되었다. 1956년 이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케냐 리무루에 있는 유일한 여학교이자, 카톨릭 여자 고등학교인 로레토 여자고등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게되었다. 1959년 이곳을 졸업한 마티이는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동아프리카 대학에 진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 통치의 종말이 가까워져 오면서, 톰 엠보야 같은 케냐의 정치인은 전도 유망한 학생들에게 서구식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도 이러한 정책을 지지하여, 마타이는 약 300명 장학생 중의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1960년 9월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게 된다.
그후 마타이는 미국과 독일에서 생물학을 수학했다. 그녀는 1964년 마운트 세인트 스콜라스티카(현재의 베네딕트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나이로비에 있는 나이로비 대학으로 돌아가기 전 피츠버그 대학에서 그녀는 동아프리카 여성으로서 처음 박사 학위(수의학)를 취득하였다. 1971년에 그녀는 나이로비 대학의 해부학 교수가 되고, 얼마 후 학장이 된다. 2002년에 마타이는 예일 대학교의 지속 가능한 삼림을 위한 국제 학회에 객원 교수(Visiting Fellow)의 자격을 받아들였다.
마타이는 1977년, 흙 침식 방지를 위해 전국에 걸쳐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그린 벨트 운동 ─ 민중 환경 로비 ─ 을 전개하였다. 그녀는 애정어린 "나무 여성" 으로 불린다. 그 때부터, 환경과 여성의 쟁점에 대해 더욱 활동적이다.
마타이는 또한 예전에 Maendeleo Ya Wanawake(국립 케냐 여성 협회)의 의장이었다. 1980년대에 그녀가 너무 과단적이고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한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이혼하였다. 법원은 남편의 이혼 소송을 받아들였다.
1997년, 케냐의 두 번째 정당 선거가 인종 폭력으로 무산되자, 그녀는 케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정당은 그녀의 입후보를 철회하였다. Daniel Arap Moi 정권에서, 그녀는 여러번 수감되었고, 정당 선거의 요구와 부패의 끝, 인종 정치를 위해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녀는 거의 혼자 힘으로 Moi의 사업적 제휴 회사들에 의해 지어질 거대한 60층 Kenya Times Media Trust 사업 복합 건물의 건설 중단으로 나이로비의 Uhuru 공원을 지켜냈다. 마타이는 Mwai Kibaki가 Uhuru Kenyatta를 패배시킨 2002년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녀는 2003년부터 환경, 천연 자원, 야생 생물부의 차관이다. 그녀는 2003년, Mazingira Green Party of Kenya를 설립했다.
"마타이는 케냐에서 이전의 압제적인 정권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일어섰다."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서 그녀가 2004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녀의 독특한 행동의 형태는 국가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정치적 압박이 주의를 끄는데 기여했다. 그녀는 민주주의 권리와 특히 여성을 격려하기 위해 많은 투쟁을 한 공헌이 인정된다."
마타이는 노벨상 성명 발표를 위한 기자 회견에서 미디어 논평자에 둘러싸이는 혼란을 겪었다. 그녀는 HIV 바이러스가 생명 공학의 생산물이고 "흑인 응징" 을 위해 생화학 무기로서, 불특정 서방 과학자들에 의해 아프리카로 유출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 주장은 극소수에 의해서만 지지받았고, 단지 하나의 에이즈 음모론으로 간주되었다. 마타이는 최종 견해를 말했다. "나는 기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언젠가 우리가 알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그 병이 어디서 오는 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위키백과
[2002년] 재향군인의 날, 5월 8일에서 10월 8일로 옮김
재향군인(在鄕軍人)의 날은 세계향군연맹 가입국가와의 우호 증진과 재향군인회 회원 사기를 드높일 목적으로 제정된 법정기념일. 해마다 10월 8일이다.
1952년 2월 재향군인회를 창설하고, 1961년 5월 8일 세계향군연맹에 회원 가입하였다. 1965년 6월 국무회의 의결로 세계향군연맹에 가입한 날(5월 8일)을 재향군인의 날로 지정하였으며, 1973년 3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등록하였다. 그러나 어버이날(5월 8일)과 기념일 날짜가 겹치는 관계로 2002년에 지금의 10월 8일로 옮겼다. /yahoo
2002년 황해도 송죽리 고분서 새 벽화 발굴
◇초생달 같은 눈썹과 붉은 입술, 까만 눈동자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다.
◇송죽리 고구려 벽화 무덤 앞 방 오른쪽 벽에 그려진 흰둥이. 꼬리털까지 세세하게 묘사했다.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 훼손으로 인해 주위는 떨어져나갔다.
[1998년] 조세 사라마구 노벨문학상 수상
포르투갈 작가 조세 사라마구(75)가 1998년 10월 8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상상력과 열정, 절묘한 아이러니로 뒷받침된 우화. 이는 조세 사라마구의 작품세계를 나타내주는 키워드들이다. 그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독창적인 상상력과 우화적 기법으로 녹여내는 작가다.
그는 1922년 포르투갈 리바테조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먹고살기 위해 학교를 중퇴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서 자라난 그는 25세 때 도덕적 위기에 빠진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죄악의 나라'라는 첫 소설을 발표하지만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이후 문학보다는 우파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르에게 맞서는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유물론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1974년 군사 쿠데타로 살라자르 정권이 무너진 뒤 소설쓰기를 재개한다. 1977년 발표한 '회화와 글쓰기에 관한 지침서'에서는 전통을 따르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된 한 작가의 내면 고백 형식을 통해 글쓰기와 문학창작에 깃든 창조성의 문제를 파고들면서 그의 궁극적 관심이 '예술'에 있음을 내비쳤다.
[1997년]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직 승계
1997년 10월 8일 북한의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총비서직을 승계했다.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당시 항일 유격대 지휘관이었던 김일성과 대원 김정숙 사이에 태어났다. 1964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곧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조직․선전 부문의 일을 담당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지도하고 1975년에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을 발기하는 등 새로운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1973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이듬해인 1974년 2월에 열린 8차 전원회의에서는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에 북한군 원수로 지명되어 사실상 권력 승계를 확고히 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후, 3년 3개월 만인 19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의 추대를 받은 형식으로 당 총비서직을 승계함으로써 '김정일 시대'를 열었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예능 방면에도 상당한 관심과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브리태니커
[1994년] 박경리(朴景利) 대하소설 '토지' 완간 ←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토지문화관.
1969년 집필을 시작, 94년까지 제 5 부작 총 16권으로 완성되었다. 내용은 최씨 일가 3대에 걸친 가족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 1 대는 하동(河東) 평사리의 대지주 가문인 최참판댁 <윤씨부인>을 중심으로 조선말 사회적 전환기에 몰락하는 집안의 모습이 가문의 출생비밀과 얽혀 전개된다. 제 2 대는 윤씨부인의 손녀 <서희>를 중심으로 국권피탈 이후 간도(間島)에 이주하여 재산을 되찾고 가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노력과 당시 간도의 독립운동․한인사회의 모습이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폭넓게 묘사되고 있다. 제 3 대는 서희의 아들세대인 식민지 지식인층이며 3․1운동 이후 식민지화와 자본주의화가 함께 진행되는 서울 등의 도시에서 그들이 겪는 개인적․역사적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혁기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겪는 운명과 고난, 민족의 한(恨),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있게 부각시켜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대표적 장편 대하소설로 꼽히고 있다. 지난 (2008년) 5월5일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현대문학’ 4월호 발표, ‘옛날의 그 집’)는 시 한 편을 남긴 채 박경리는 홀연 이 세상을 떠났다.
[1992년] 세인트루시아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Walcott, Derek), 노벨문학상 수상
영국 연방 세인트 루시아 출신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62)가 1992년 10월 8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월코트는 1930년 영국계 아버지와 아프리카 노예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회사업가인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받았으며, 1953년 트리니다드로 이사했다.
1948년 첫 시집 '25편의 시'를 출간했고, 1962년 런던에서 '초록빛 밤 속에서'를 펴내 일약 카리브해 문학의 획기적인 시인으로 부상했다. 이 시집은 과거의 시와는 달리 단순한 영문학의 모방이 아니라, 카리브해의 매혹적인 정서를 현지인의 어법으로 생생하게 표현해보려 했다.
1985년부터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오메로스' (1990)로 199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장엄한 서사시는 '복합적 혈통과 카리브 해에게서 얻은 감각과 리듬으로 카리브 해 현실과 풍광 속에 세계 문화의 모든 조류를 용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 서독의 전 총리 브란트(Brandt, Willy, 1913~1992) 사망
동방정책을 추진, 독일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1992년 10월 8일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브란트는 서독의 국부인 아데나워와 함께 오늘의 통일 독일이 있기까지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1913년 12월 18일 독일북부의 뤼벡에서 여점원의 사생아로 태어난 브란트는 어린시절 가난한 생활을 통해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서베를린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서베를린 시장(1957년), 사민당 당수(1964년) 등을 거쳐 1966년 대연정(大聯政)을 구성, 부총리겸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다. 1969년 사민당 출신으론 전후(戰後) 처음으로 독일 총리에 취임했으나, 1974년 보좌관 귄터 귀욤의 스파이 활동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브란트 전 총리의 이름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설치될 때 아데나워 당시 총리가 소극적인 대응을 보인데 반해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적극적으로 나선데 따른 것이다. 브란트가 ‘독일에 필요한 것은 서(西)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 아니라 동(東)에 대한 화해의 몸짓’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1969년 10월 총리로 선출된 브란트는 곧바로 오스폴리티크(동방정책)라는 이름의 대화합정책에 착수했다. 이 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을 인정받아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동서독은 1972년 양국간 통행협정과 동서독 기본조약체결, 1973년 유엔동시가입 등으로 공존과 통일을 향한 장도에 접어들었다.
브란트는 ‘과거의 적’에 대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데 있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브란트가 1970년 폴란드를 방문, 바르샤바 유태인 거주지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에 의해 희생된 영령에 대해 참배하는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조선
[1990년] 무용가 한영숙/韓英淑 사망
1920. 2. 2 충남 천안~1990. 10. 8 서울.
고전무용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33년 3월 홍성(洪城) 갈미보통학교를 수료한 뒤 무용가 한성준(韓成俊)에게 춤을 배웠으며, 37년 승무(僧舞)로 무용계에 데뷔하였다. 46년 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고, 60년 국악예술고등학교 교사, 62년 서울시 문화위원, 66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 67년 이화여자대학 강사가 되었다. 69년 승무가 무형문화재 제27호, 71년 학무(鶴舞)가 제40호로 지정되었다. 74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조교수, 83년 국립극장 종신단원과 무용협회 고문이 되었다. 미국 순회공연을 비롯하여 뮌헨올림픽․서울올림픽에서 공연하였다. 서울시문화상(1967), 대통령포장(1970), 국민훈장 동백장(1973) 등을 받았다.
[1988년] 탈옥수 지강헌 사건 발생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지강헌 등 미결수 12명이 1988년 10월 8일 오전9시30분경 중부고속도로 일죽 인터체인지 3km 전방에서 호송버스를 탈취해 달아났다. 지강헌 등 7명은 16일 새벽 4시30분경 자살유혈극이 끝날 때까지 서울시내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마지막으로 서대문구 북가좌동 민가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리고 자수를 권하는 가족과 보도진을 향해 '돈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옥살이를 하지 않고 돈 없는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다'는 뜻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남기고 안광술 등 2명은 자살하고 지강헌은 사살당했다.
[1975년] 살인마 김대두 검거
55일 동안 전남 경기 서울 일대를 누비며 8회에 걸쳐 17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가 1975년 10월 8일 검거됐다. 그는 이날 오전 수상한 청년이 피 묻은 청바지를 맡기고 갔다는 서울시 소재 세탁소 주인 아들의 신고로 검거됐다.
그는 폭력전과 2범으로 김영태 등의 별명을 사용하며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나이에 비해 앳되보이는 얼굴에 차림새도 멀쩡한 그는 “교도소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까 할 일도 없고 배운 기술도 없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전과자라고 해서 냉대를 했다. 남보다 끝발나게 살고싶었는데 집에서는 도와줄 형편이 못돼 일을 저질렀다”고 어처구니없는 범행동기를 밝혔다.
5월 17일 수원교도소를 나온 김대두는 8월 13일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남 광산군의 민가에 복면을 하고 침입, 살인행각을 시작했다. 경기도 시흥에서는 생후 3개월 된 어린이와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 이날 검거될 때까지 칼과 망치, 심지어 돌로도 살인을 일삼았다. 그가 빼앗은 금품은 현금 2만6천원과 여자 손목시계 등이 전부였다.
고시 동기였던 재판장의 요청으로 국선변호를 맡게 된 이상혁 변호사가 구치소로 면회를 갔으나 김대두는 ‘검사 앞잡이’라며 대화를 거절했다. 다섯번째로 찾아간 이상혁은 ‘대두(大斗)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이냐’고 묻자 김대두는 ‘아버지가 지어줬다’고 대답했다. 이상혁은 “대두는 ‘큰 인물’이라는 뜻인데 네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바랐던 것일 테니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동안 소년수의 재범을 막는 등의 교화활동부터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타일렀고 마침내 김대두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성실히 재판에 응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김대두는 동료재소자들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무기형으로 감형해 달라는 변론을 하겠다’는 이상혁에게 ‘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담담히 말했다.
심훈종 판사(현 변호사)는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1975년 11월 27일 김대두에게 강도, 살인과 미수, 강간죄 등을 적용해 공범 김회운과 함께 사형이 선고하였고, 1976년 12월 28일 사형이 집행됐다.
교수대에 올라가는 순간에도 피해자의 원혼을 위해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른 김대두는 ‘내가 마지막 사형수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웃는 얼굴로 죽음을 맞았다.
[1970년]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Giono, Jean) 사망
20세기 프랑스 소설사에서 전원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장 지오노가 1970년 10월 8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오노는 프랑스 남부 오트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마노스크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을 지키며 창작의 밭을 일궜던 지방 작가였다.
지오노의 출세작 ‘언덕’(1928년) 등 30여편의 소설과 희곡, 시나리오 등은 프랑스 문학사의 큰 별들만 수록하는 ‘플레이야드’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자연 찬미가였던 그는 프로방스를 무대로 한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의 작품으로 널리 칭송받았다.
지오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고,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다리미질을 하면서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갔다. 지오노는 열여섯살 때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은행 사환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유럽 고전들을 섭렵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징집돼 몇 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전쟁을 통해 드러난 서구 문명의 야만성에 진저리를 쳤다. 이 체험으로,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현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했고, ‘자연 앞에 선 인간’을 형상화하면서 인간과 자연, 무생물이 합일되는 범신론적 생명관을 노래했다. /조선
장 지오노의 단편소설 '나무를 심는 사람(L'homme qui plantait des arbes)'은 1953년 《리더스다이제스트》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그 이듬해 미국의 《보그(Vogue)》지에서 《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첫 출판된 이래 전세계 13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자신의 이익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미약한 한 사람의 불굴의 정신과 노력이 위대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젊은이가 프랑스의 알프스 여행길에서 물을 찾아 폐허가 된 마을을 헤매며 불모의 땅을 걸어가다 양치기 노인을 만나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받는다. 다음날 그는 양치기 노인을 따라 도토리 파종하는 것을 보러 간다. 양치기 노인은 55세 된 엘제아르 부피에로서, 아내와 아들을 잃고 외떨어진 산에 들어와 홀로 도토리 파종을 시작한 지 3년이 되었다. 그는 나무가 부족하여 땅이 죽어가고 주민들이 포악해진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땅은 아니지만 산 곳곳에 너도밤나무뿐 아니라 떡갈나무 씨를 뿌리고 가꾼다.
세월이 흘러 제1차 세계대전 후 젊은이는 부피에가 살던 곳을 다시 찾아와 그동안 파종한 나무들이 10년생의 우람한 나무로 성장해 있는 것을 본다. 그는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사람의 노력으로 삶의 터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말랐던 마을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주민들이 하나 둘씩 돌아온다. 조금씩 자연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1935년 부피에의 '나무심기'는 정부정책으로 자리잡게 되고, 부피에는 1947년 89세의 나이로 바농에 있는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죽는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오늘의 절망이 숭고한 한 인간의 노력을 통해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의 병든 물질문명 때문에 생명의 위기가 가속화하고 있는 오늘날, 이 작품은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도서로서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장 지오노 역시 이 책을 출판할 때 공동의 선(善)을 위해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87년에는 캐나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1988년 아카데미 단편영화(만화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naver
[1967년]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중 총상 입고 체포
1928. 6. 14 ~ 1967. 10. 9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게릴라 지도자이자 혁명 이론가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이라 확신하고,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동참하게 되었다. 1950년대말 카스트로의 게릴라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59년 카스트로가 집권하자 쿠바의 산업장관으로 일했다. 제3세계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에 강력하게 반발해, 카스트로 체제가 좌익 친공산주의 노선을 걷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1965년 3월부터 소식이 끊겨 사망설이 파다하였으나,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새로운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사실이 그해 10월 밝혀졌다. 그는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상을 입은 채 생포된 체 게바라는 다음날 이름 없는 작은 촌락의 학교에서 사살된 후 양손을 잘리우고 불태워진 채 유기 되었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는다’고 했던 전사 체 게바라의 최후였다.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했던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불리며 1960년대 신좌익 급진주의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 Socialism and Man in Cuba>(1965)·<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illas>(1960) 등이 있다. 1997년 7월 12일 유해가 볼리비아 중남부지역의 활주로에서 발견된 후 매장을 위해 제2의 조국 쿠바로 옮겨졌다. 10월 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매장되었다
[1951년] 휴전회담장소 판문점으로 결정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북한군과 유엔군 사이의 휴전회담은 1951년 6월 소련의 UN대표 Y.A.말리크가 38선상의 휴전을 제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해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을 시작하였는데, 10월 회담장소를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겨 38선이 아닌 전선(戰線)을 기초로 한 휴전협정이 진행되었다.
그후 휴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판문점에서 논의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전문 5조 36항으로 된 정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발발 3년 1개월, 회담개시 2년 1개월만에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naver
[1941년] 미국의 시민권운동 지도자 잭슨(Jesse (Louis) Jackson) 출생 ← 잭슨(1988)
잭슨은 미국의 정치가이자 시민권운동 지도자이다.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장학금으로 일리노이대학교를 다녔으며(1959~60), 유명한 노스캐롤라이나 흑인농업기술대학(그린스보로)에 편입하여 1964년 사회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시카고 신학대학에서 대학원과정을 수료하고 1968년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1965년 앨라배마의 셀마로 가서 마틴 루터 킹 2세와 함께 행진운동을 전개했다. 잭슨은 카리스마적이고 유창한 연설가로서뿐만 아니라 용의주도한 정치가로서 탁월한 조직능력을 인정받아, 브레드바스켓 기구의 전국의장이 되었다(1967~71). 그후 1971년 푸시(PUSH:People United to Save Humanity) 기구를 창설하여 인종주의에 투쟁하고 도시흑인청년들의 고등교육, 노동, 성공의 기회를 증진시키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89년 수도 워싱턴에 정착했으며, 1990년 워싱턴 시의회의 무보수 의원직에 당선되었다./브리태니커
[1932년] 신문연재만화 <고바우 영감>을 그린 만화가 김성환(金星煥) 출생
1951년 대구 피난지에서 나오던 〈만화신보〉에 처음으로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55년 〈동아일보〉에 연재만화 〈고바우 영감〉을 통해 해방 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신문연재만화를 실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서민의 애환과 더불어 코믹하게 묘사하여 신문연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58년 유명한 '경무대사건' 등 몇 번의 필화를 통해 일부삭제 또는 전면삭제의 어려움을 겪었다.
2차례에 걸친 유화전․데생전을 포함한 4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만화와 회화의 벽을 허무는 데도 이바지했다. 만화집에 〈꺼꾸리군 장다리군〉․〈세모돌이 네모돌이〉․〈고바우와 함께 산 반생〉․〈고바우 세계방랑기〉가 있다. 그의 만화의 주인공인 고바우는 1959년 김승호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1997년 한국만화가협회 고문, 1997년 한국시사만화가회 명예회장 역임.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view.html?cateid=1052&newsid=20080712090605358&p=mun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