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 AD44년.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 號爲大武神王
27년(서기 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
고구려본기 민중왕 4년 AD47년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秋七月 又田 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魚目 夜有光 冬十月 蠶支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4년(서기 47) 여름 4월에 왕은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7월에 또 사냥하다가 석굴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낼 것이며, 절대로 새로 능묘(陵墓)를 짓지 말라.” 9월에 동해 사람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를 바쳤는데 [고래의]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겨울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大武神帝紀 20년 AD47년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
○ 20년 (AD47) 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적성>・<잠지락>・<하간>을 왕래하였고, <개마>국을 잠식한 자였다.
대동사강 민중왕 3년 AD47년
고구려 잠지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호가 낙랑에 의지하여 한에 투항하였다.
*고구려본기와 민중왕 년수에서 1년 편차가 나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