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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입술로 가장 많이 암송되어온 말은 주기도(The Lord's Prayer)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주기도는 그리스도교인들이라는 종교인들이 간직해온 말로 제한하기보다 인류가 지녀온 말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인류가 지녀온 말로서 주기도에 담아진 내용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전개하는 저의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보다 ‘주기도의 그리스도교’를 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으로 제한된 주기도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를 상술함으로 그리스도교를 재조명하려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산상보훈이라고 일컬어지는 마태복음 5-7장 한 가운데 나옵니다(6장 9절에서 13절). 그러므로 주기도는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내용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주기도는 산상보훈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 할 만합니다. 따라서 주기도를 떠나 그리스도교를 말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교를 전제하고 주기도를 다룰 수 없습니다. 주기도는 그리스도교보다 먼저 의식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리스어로 쓰진 주기도 원문의 첫 말은 "Πάτερ(아버지)"입니다.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께 기도할 바를 가르치십니다. 주기도엔 “하나님”이나 “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는 말만 나옵니다. 주기도는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은 엄연히 구별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들에게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아버지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이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보인 첨예한 갈등입니다. 창조로 시작된 구약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담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서사하는 신약은 구약을 담습니다.
두 개의 질문이 제기됩니다. 왜 예수님은 기도를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의 핵심으로 설정했을까? 그리고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늘 아버지를 향해 기도하게 가르치셨을까? 첫 질문에 대해선 예수님의 가르침이 언약에 근거한다고 대답하게 되고, 둘째 질문에 대해선 예수님이 새로운 언약을 열어주신다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려면, 이 두 시각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을 언약으로 보는 시각과 예수님으로 새 언약을 보는 시각입니다. 이 두 시각을 갖추지 않은 채 성경을 읽으면,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여기듯, 성경을 하나의 종교적 경전으로 접하게 됩니다.
기도가 사람의 속성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라고 보면, 개인이 지닌 종교성의 발로라고 하게 됩니다. 사람이 두뇌로 생각하듯,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하게 됩니다. 사고와 같이 기도는 세상을 사는 인간의 기본 표현 가운데 하나라고 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한, 어떤 신의 이름을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 채워지기만 하면, 어떻게 채워지든 상관없습니다. 기도가 개인의 마음에서 나온다면, 이런 결론은 피할 수 없습니다. 수능시험을 치르는 아이를 위해 부모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절에서 빕니다.
성경에서 기도는 언약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게 됩니다. 즉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간직한 언약의 백성에겐 기도가 기본입니다. 이 경우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언약의 기도는 개인의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기도와 다릅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과 기도의 연관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지속하는 삶을 언약의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 편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삶이 영위되면,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이루시는 내용은 가려집니다. 율법의 행위가 두드러지면서 기도는 피상적이 됩니다.
그리스철학으로 전개되는 존재론적 언어는 성경의 언약 내용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언약의 근거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서사됩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전개되는 세상은 그 자체가 기반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존재론적으로 전개하는 언어의 구축입니다. 존재론적 언어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탐구하는 사고의 틀입니다. 존재론적 사고는 현상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초월적이나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나아가더라도, 언약의 이루어짐을 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이루어짐을 향한 기도와 세상에 존재하는 속성을 파악하는 사고는 다른 형태의 삶을 보입니다.
교회 교리는 성경을 존재론적 언어를 입어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고의 결정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사고하는 내용은 세상을 기반으로 정리됩니다. 따라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언약의 내용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습니다. 언약의 이루어짐이 반영되지 않으니, 기도는 세상에 처한 상태를 따라 개인이 바라는 바로 표현됩니다. 교회 교리가 세상을 근거로 정리되면, 교회 기도도 세상에서 개인이 바라는 바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 종교적인 기관으로 자리잡고, 교회 다니는 이들은 세상에 종교적인 삶을 보입니다. 이것이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종교로 특징지어온 내력입니다.
언약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기도로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이루어지길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기도는 믿음에 근거한 기다림의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평화나 정의는 이루어짐으로 표현되니, 기도의 내용이지 이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존재론적 언어는 사고로 진전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있거나 일어나는 것에 대해 우선 알려고 하는 사고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존재론적 언어는 지혜나 과학으로 축적되게 됩니다. 존재론적 언어로 의식된 개인의 바라는 표현은 세상에 있는 것에 투사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고에 의한 가능성을 근거로 개인의 바람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해탈은 세상의 얽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입니다.
언약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루심을 향해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이루심은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은 이해될 내용이기보다 기도될 내용입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근거에서 말해집니다. 성경에 담아진 내용을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보다 사람이 깨달은 내용으로 접하게 되면, 기도보다 이해로 다루어지게 됩니다. 이 경우 성경은 종교적인 경전으로 여겨집니다. 언약의 시각이 형성되지 않으면 이런 경향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언약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이지만, 종교적인 기도는 생각의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주제로 율법의 이룸(the fulfillment of the law)을 도입합니다. 예수님은 지켜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을 부각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내용으로 전개하십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 이루어질 일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질 일은 세상에 복음(좋은 소식)으로 전해집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이면, 율법처럼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해지는 것은 복음, 곧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을 듣는 이들은 기도하게 됩니다.
종교적인 기도는 절대자를 향해 표현됩니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전능한 절대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절대자는 신화적으로 창조주로 말해집니다. 세상을 창조한 이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절대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조 신화는 여러 지역에서 보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창조주가 창조한 세상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기도합니다. 세상을 창조한 분은 창조된 사람이 창조된 세상에서 바라는 바를 이루어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도 창조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어떻든 창조된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의 삶으로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창조의 영역을 넘어갑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주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창조된 세상 삶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모두 내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로 전개되는 내용과 창조된 세상 삶으로 전개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든 창조된 세상에서 하늘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는 하늘 아버지와 함께함으로 세상 삶에 부여될 것이 내포되게 됩니다.
주기도는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The New King James Version)"으로 시작합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개시(開始)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God)”은 “주님(여호와)”에 해당하는 이름입니다. “신(神)”에 해당하는 개념적인 말이 아닙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개념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리스 철학을 입어 존재론적으로 접근함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을 말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의 존재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신”의 뜻으로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지만, 신의 개념은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는 내용은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주어로 문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기도로 아뢴 내용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내용이니, 이루어진 일은 하늘 아버지의 이름으로 서사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루어짐으로 서사됩니다. 이 경우 “주님”이라는 이름에 부여될 수 있는 내용은 거룩해야 됩니다. 세상에서 분류되는 내용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내용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이해는 범주를 적용하여 분류하는 작업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이름에 부여되는 내용은 세상 범주를 적용해 분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사되는 내용은 분류되지 않고 구별됩니다.
주기도는 "Your kingdom come"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구약으로부터 이어지는 언약의 삶은 세상 나라로 보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세상 나라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세상 나라는 어떻든 창조된 세상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은 세상 나라로 사는 삶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이나 세례 요한은 정치적인 이슈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더라도 종교인들은 세상 나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종교성 자체가 세상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임하는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하늘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하늘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루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가능성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기도될 나라이지 이해될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는 이들로 하늘나라는 임합니다. 그들은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 언약의 삶을 삽니다. 그 삶이 어떤 형태의 삶이냐고 묻는 건 군중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생각합니다. 세상을 향한 사고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기본 의식입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고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를 향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향합니다. 하늘나라가 세상에 임하더라도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로 이해하려합니다. 그들의 기본 의식이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하늘 아버지의 뜻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기도하지 않는 한, 하늘나라는 세상 현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즉 하늘 아버지의 뜻은 땅에서 결정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 자신들이 하겠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시편 143:10). 세상에 처한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알아 행할 수 없습니다. 즉 그들의 의도에 하늘 아버지의 뜻은 담아질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세상에 처한 그들의 사고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들의 의도나 기도는 창조된 세상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땅에 이루어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단순히 땅의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시고). 세상에 임한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상 조건에 처해집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삽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무엇보다 먹을 것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먹을 것에 대한 시각은 세상 나라로 먹을 것의 시각과 다릅니다. 하늘나라가 임하니, 하늘나라로 먹을 것도 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먹을 것에 대해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먹을 것을 대해 기도함으로 먹을 것이 베풀어지는 것임을 의식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로 먹을 것은 노력의 소산입니다. 따라서 소유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선 개인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소유의식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먹을 것은 저장되지 않습니다. 오늘 이루어지는 하늘나라로 먹을 것이 주어집니다. 구약의 만나는 이 점을 보입니다. 따라서 오늘 먹을 것이 베풀어지길 기도하게 됩니다. 내일 먹을 것을 향한 소유의식으로 기도가 표현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오늘 임하지, 임한 채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내일 먹을 것은 내일 임할 하늘나라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로 먹을 것은 세상의 인과관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소산되지 않고, 또 세상의 변화를 야기하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로 먹을 것은 세상에 개입(intervention)이 아닌 세상의 절단(severance)입니다.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또 우리가 우리의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 빚을 용서하시고). 이 부분은 읽기 어렵습니다. 하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빚”이 무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로 번역하지만, 성경에서 “죄”는 하나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에 죄인은 하나님에 의해 용서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우리가 용서한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빚진다”는 뜻은 빚에 묶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삶에서 빚을 진다는 것은 묶여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 묶임을 풀어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이 부분의 깊이는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는 한, 우리는 하늘 아버지와 무관하지 않고 빚을 진다는 점입니다.
하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빚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도록 묶여 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할 때, 하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빚이 용서됩니다. 즉 우리는 세상에서 용서하도록 아버지께 묶여 있고, 그 묶임은 아버지로부터 용서됨으로 풀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용서하도록 묶여 있습니다. 용서는 자신들의 재량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용서하도록 따르는 것입니다. 용서는 율법적인 용어일 수 없습니다. 법으로 다스려지는 세상 나라는 용서의 나라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에서 빚은 제거될 수 없습니다. 빚을 제거하는 데는 힘이 작용됩니다(공산주의에서 보듯이).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유혹은 성경에서 간과될 수 없는 통념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삶에서 세상 속성으로 삶으로 타락되게 하는 요인입니다. 창조된 사람은 유혹으로 타락되었고, 예수님은 유혹을 받았으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즉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속성으로 나아가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속성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유혹된 타락이 간과되면, 사람들이 지닌 지성이나 종교성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반대로 유혹된 타락이 고려되면, 사람들이 지닌 지성이나 종교성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은 유혹된 것으로 보아집니다. 즉 전통 교회의 교리는 유혹된 것으로 보아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자신들의 속성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종이 아닌 속성을 보이려는 유혹으로 이끌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는 한, 세상 속성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리스 철학은 존재와 속성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존재론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은 세상 속성으로 사는 삶을 신장합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말씀으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을 말하지 지닌 속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존재론적으로 전개된 신학은 유혹된 것이라고 하게 됩니다.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유혹은 내적 충동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악은 외부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은 세상에서 파괴적인 힘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땅에 이루어짐에 대항하는 세력을 뜻합니다. 악은 세상에 파괴적인 힘을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드러나는 것만 막습니다. 이 악은 초대교회가 드러날 때,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나 로마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힘은 세상에서 탄압이 아닌 악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악은 세상에서 선에 대칭되는 악과 전혀 다릅니다.
교회가 세상에 자리잡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종교인들로 세상에 자리잡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악을 세상의 악으로 생각합니다. 악을 세상에 자리잡은 교회와 그들에게 대항하는 세력으로 봅니다. 그들은 악을 이기려고 하지 악으로부터 구해지길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악을 제거하려고 함에 따라 세상에 대립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종교전쟁이나 종교재판이 단적인 예입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선과 악의 대립 양상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악을 세상에 설정된 어떤 대상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굳어지면 악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적대감을 보이게 됩니다.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은 후에 추가된 송영(doxology)입니다. 송영은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부여하는 표현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루신 일은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 드러남을 일반 세상 현상과 구별해서 영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첨가된 송영은 앞에서 바라는 부분과 균형을 이룹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루실 것을 향한 바람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루신 영광으로 마무리됩니다. 즉 바람의 이루어짐은 송영으로 표현됩니다. 사람에게 부탁하고, 그 부탁에 대해 감사가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멘”은 “확실히” 혹은 “그렇게 되다”를 뜻하는 히브리말입니다. 기도의 마침표 역할을 합니다.
(이 글은 좀 argumentative 합니다. 논쟁적인 글은 이해를 돕긴 하지만 깊이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피해온 글체입니다. 주기도에 대해 깊이로 묵상하고 싶은 분은 제가 쓴 <The Lord's Prayer(주기도)>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한국에 머물면서 영어로 먼저 쓰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한글로 번역하는데 너무 힘들어 탈진되어 아팠습니다. 영어/한글 대역으로 출판하려 했기에, 풀어쓰기를 할 수 없고 문장대 문장으로 번역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2016년 리오 올림픽 때 출간되었습니다. 307쪽에 15,000원이니 사두어도 되겠습니다(한들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