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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와 함께 이른 추위가 닥친다는 예보를 들으며 윈드 재킷 속에 입을 따뜻한 내피와 함께 랜턴을 챙겨 본다.
무삼히 흐르는 세월이 너무도 허망하고 빠르게 느껴 지는 이 가을이 오면 난 언제나 순수한 소년처럼 괜스래 쎈티해 지면서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이곳 저곳을 기웃 거려 본다.
정내미 떨어 지는 투박한 외모와는 달리 흔히들 하는 말로 가을을 타는 난 구래도 안즉은 젊은 오빠가 아닌가 하는 자위를 하며
혼자서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기도 한다.
빨치산 정 순덕이 활약했던 거망산과 지척에 위치한 황석산에는 우리 선조들이 쌓았던 성곽이 축성되어져 있다.
삼국 시대 부터 조선 시대 까지 끊임없이 보수와 증축을 거듭한 산성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 산재해 있는데 농업에
주로 종사 했던 선조들은 평시에는 주로 평야지대에서 살다가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엔 미리 식량을 비롯한 전쟁물자를
준비해 둔 산성으로 올라 가서 요즘 흔히들 하는 말로 농성을 하면서 적이 물러 가기를 기다린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놈들이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키 위해 요충지인 이곳 함양땅 인근으로 몰려 들자 이 일대의 관군과
의병을 비롯한 아녀자들이 이곳 황석산성으로 몰려 들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본땅에서 이미 오랜 내전을 겪어 전투경험이 풍부했던 왜병을 맞아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면서 궁지에 몰린 조선
여인네들이 절개를 지키고져 뛰어 내린 바위의 선혈과 통곡하는 비명소리는 지금도 눈에 보이는듯 귀에 들리는듯 하다.
그래서 황석산 북사면 바위지대를 일명 피바위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 지방 출신 어떤 향토 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성을 수비하던 조선군은 관군 500명을 포함해서 총 7,000 여명이었고 성을 공격하던 왜놈들은 7만 3~4,000 명이었으나
치열한 공방 끝에 3~4만 여명의 왜군이 전사하고 부상자의 숫자도 일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황석산성 전투의 패배로 적은 거의 궤멸되어 결국은 일본땅으로 패주케 되었다고 하는데 물론 정사에 기록된 내용도
아니거니와 임진란 당시의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아도 납득하기가 어려운 점이 너무도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20만명 정도의 왜병이 부산 앞바다에 들이 닥치자 동래부사 송 상헌과 부산진성의 정 발이
분전한 조선 성벽은 전쟁 준비의 소홀로 당일 무너져 내려 버린다.
적장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그리고 흑전장정이 세갈래로 나뉘어 한양땅을 향해 파죽지세로 달렸지만 20여일 만에 한양 도성이
함락될 때 까지 방어 다운 방어 한번 없이 임금이였던 선조 대왕은 절규하는 백성들에게 도망가지 않겠노라고 거짓말을 하곤
칠흑같이 어두운 그날 밤 장대같이 내리는 빗속을 뚫고 좋은 말로 몽진을 한다.
명나라 이 여송의 원병이 출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왜구들은 차츰 경상도 남부 지역으로 쫒겨 들어 가선 화의를 요청하면서
별 다른 변변한 전투도 없이 약 삼년간을 대치하기에 이르는데 정사에 의하면 이때 이미 약 7만명의 왜병이 전사를 했다는 것이다.
임진전쟁 삼대 대첩 중의 하나인 김 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의 보복으로 왜병은 정유재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2차로 진주성에 몰려
들게 되는데 이때 조선의 수비군은 3,000 여명 이였고 왜병의 숫자는 십만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의병장 김 천일 함께 성안에 있던 모든 조선인들은 더러운 왜구의 칼날에 무참히 살해되는데 만약 이 향토 사학자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황석산성 조선군 7,000명이 일인당 다섯명 이상의 적병의 목을 베어야 3~ 4만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분통하지만 역사는 철저히 검증된 사실적인 기록에 의거하여 기술되어야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국권이 흔들리어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내세든 현세든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집단의
등장인데 수운 최 제우의 동학 또한 마찬가지 연유다.
녹두장군 전 봉준이 무능한 조선왕실에 항거하여 일으킨 동학 농민 전쟁 때 참모로 활약했던 차 치구란 분의 아드님이신 차 경석
이란 분도 원래는 동학이였다가 증산도로 개종을 하였는데 증산 교주 강 일순이 후계자 없이 사망케 되자 이곳 황석산성에 올라
강화 마니산 처럼 제단을 쌓고는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날 이후로 천자를 자처한 차 경석 천자는 자신의 종교를 보천교로 개명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한때 신도수가 60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걸로 봐서 조선왕실에 등을 돌린 민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수도 없이 많은 자생 민족종교가
생멸을 거듭했는데 대부분의 자생종교가 그 뿌리를 동학에 두고 있다고 한다.
제가 어릴 적에 우리 집안의 어르신 몇 분도 아마도 보천교에 심취를 하여 촛불을 켜 놓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집회를 찾아
가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 빨치산에는 남부군 이 현상과 정 순덕 여인의 전설같은 무용담이 있었던 반면에 대한민국 정부의
토벌작전엔 육군의 백 선엽 장군과 경찰의 차 일혁 총경의 전공과 비화가 너무도 유명하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백 장군은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 정희 전 대통령 보다 세살 아래인 1920년 생인데 두 분은 후일 참으로
묘한 인연으로 얽히게 된다.
두 분 모두 일제가 만주땅에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설립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만군 장교로 임관케 되는데 백 장군은
간도특설대란 부대에 근무하면서 조선 독립군들이 다수 포함된 팔로군을 쫒는 임무를 맡게 되어 후일 본인도 깊이 그 죗과를
뉘우치게 되는 민족 반역의 친일 행각을 잠시 하게 되는 흠집을 안게 되지만 6.25 사변이 발발하게 되자 적의 주공격선 상에
위치한 1 사단장 보직을 맡아 적의 공세를 상당히 늦추며 용맹히 전투에 임한다.
국군이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전을 펼 무렵에는 대구 인근의 다부동 전투에서 적 3개 사단을 섬멸하고는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진을 하여 평양에 최선봉으로 입성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이 분의 대표적인 저서인 군과 나 라는 책자에 의하면 지리산 빨치산에 넌더리가 난 국군은 마침내 백 선엽 장군의 지휘하에
백 야전사령부를 설치하곤 지리산 일대의 먹을 것과 거주할 곳을 모조리 태워 버리는 청야 작전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빨치산의
주력 부대는 마침내 그 힘을 잃게 된다고 한다.
지금도 90 노구의 백 장군께서는 군의 원로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군에서 예편한 이후엔 외국 대사,장관 그리고
국영기업체의 장을 지내기도 하셨고 인천에서 선인 학원이란 사학재단을 설립키도 하였다.
백 선엽 대장(별넷)과 아우이신 백 인엽 중장(별셋)의 이름을 딴 선인 학원 초창기엔 아무래도 민초들의 원성을 많이 샀던가 보다.
쟘바 차림으로 돌아 다니시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교사는 그 자리에서 해임을 하기도 하고 예비군복을 착용한 교사들을 정문에
세워서 학생들을 훈육케도 하였다고도 하는데 이 분을 헐뜯는 카더라 방송 중의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집안에 귀한 손님이 오셔서 대담을 나눌 때면 이 백 장군의 모친은 어김없이 창호지 하나로 벽을 가린 대청마루에 놋요강을 갖고
나오셔선 찌르르 하면서 소피를 보기 시작하니 보다 못한 아드님께서 어느 날은 모친에게 어머님! 외부의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넘사스럽게 마루에서 오줌을 누시면 어쩌냐고 했더니
야 이 사람아! 별이 무려 일곱개나 쏟아 져 나온 이 구넝을 자랑하고 싶어서 오줌 쬼 누기로서니 창피할 일이 무어 있냐고
하시던란 것이다.
몇년 전에는 원로이신 백 선엽 장군을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한다는 말이 있다가 이 분의 친일 행각을 거론하는
재야 사회운동가들의 반대로 유야무야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소가 나온다.
원수는 별을 다섯개를 다는 계급인데 원수 계급이 먼지를 우선 알아 보면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처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등 여러 국가가 동맹을 맺어 함께 전쟁을 수행할 때는 각각의 국가에서 별을
네 개나 단 대장급 장군이 지휘관으로 부임케 되는데 이때 작전 수행의 편의상 어느 한 대장을 원수라고 칭하며 지휘권을 주는
임시 계급장을 부여케 된다.
미국의 맥아더 원수와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평화시에 이미 군에서 예편하신 원로를 원수로 추대하는 건 다시 한번 더 잘 생각해 볼 일이다.
경찰 출신으로 지리산의 호랑이라 불리우며 빨치산 토벌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면서 마침내 남부군의 이 현상을 사살한 차 일혁
총경의 부친이 바로 황석산성에 천제를 올리고 보천교의 차천자가 되었던 차 경석이란 분이다.
한 사람의 인생사와 그 나라 역사의 묘한 아이러니가 기묘하게 얽히고 섥힌 황석산 산행을 마치고 난 후 느림보 카페 사진방에서
그날 B 팀을 선도해서 불당골로 산행을 하셨던 산나리님의 사진에서 황석산 산행지도와 함께 황석산성의 유래를 소개한
입간판 사진을 보면서 또 한번의 씁쓰레한 웃음을 지어 본다.
정유재란 때 의병이 왜군과 싸우다 옥쇄한 황석산 피바위는 역사의 비극을...
옥쇄란 말은 말 그대로 옥이 산산이 부서졌다란 말인데 옥쇄란 말의 어원을 알고 보면 선무당이 휘 갈겨 쓴 참으로 낯 뜨거운
입간판이다.
진주만을 전격 공습한 일제는 태평양 상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함대를 잃게 되어 제해권을 미국에 뺏겨 버린다.
일본 본토를 노린 미군은 남태평양에 산재한 싸이판,유황도,이오지마,과달카날 같은 여러 섬에서 해병대를 주축으로 하여
상륙작전을 하여 일본군을 섬멸하는데 사무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일본놈들은 항복을 하여 포로가 되는 것을 최악의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를 할 경우엔 생존자가 거의 없다.
한마디로 몰살을 하게 되는데 전투 능력이 없는 부상병들도 엎드려서 수류탄을 터뜨리거나 총구를 아가리에 밀어 넣고는 엄지
발꼬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감행하는데 이렇게 전병력이 몰살을 하였을 경우에 일본제국주의가 방송에서 침통한 어투로
내 뱉았던 말이 자랑스런 일본제국주의 강병은 모월 모일에 싸이판섬에서 장렬히 옥쇄를...
치악산 험준한 준령을 완죤 종주코져 하는, 이 대장님을 비롯한 여덟분의 에이팀을 상원사 입구에서 내려 드린 우리 느림보
본진은 약 한시간 이상을 돌아서 입석사 입구에서 하차를 하게 된다.
입석사에서 비로봉까지는 직등코스이므로 초반부터 경사길이 심하다는 강 대장님의 산행안내를 염두에 두면서 조심 조심 산행을
하는 내내 이 너무 느려 트진 내 발걸음 때문에 꼬옥 한번 들르고 싶었던 상원사를 경유하는 에이팀에 합류치 못한 아쉬움이
자못 한 스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악산 봉정암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사찰로 알고 있는데 이 봉정암은 백담사의
부속 암자 이다.
그러므로 치악산 상원사는 우리나라에서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갖춘 사찰로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인데 과거에는 붉은
단풍이 너무도 아름다운 산이라 하여 적악산이라고 불리우던 치악산명의 꿩 칫자 유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이다.
이 설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우선 간략하게 소개를 하면 과거 급제를 위해 한양 천리를 떠나 던 어느
선비가 치악산이 있는 상원사 인근을 지나다 보니 알을 품고 있다가 구렁이에 칭 칭 감겨서 죽음을 목전을 둔 암꿩(까투리)를
발견하곤 이내 활 시위를 당겨 버리곤 한양으로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날이 저물어 불빛이 보이는 독가촌을 발견하곤 문을
두드리니 뽀얀 소복을 입은 묘령의 아낙이 자신의 남편 기일(제삿날)이라며 갈데 없는 이 선비를 맞아 드린다.
헛칸 같은 곳에서 구냥 잠이나 잤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터인데 어찌 어찌하여 이 선비가 남편 제사를 지내 던 소복 입은
여인네와 청룡 황룡이 승천하는 운우지정을 나누곤 잠이 들었는데 온 몸이 답답하여 눈을 뜨니 커다란 암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는 당신이 활을 당겼던 그 구렁이가 자신의 남편이였노라며 그 복수를 위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행을 다니다 보면 여성 클라이머들의 화려한 아웃도어 복장이 늘 눈에 거슬린다.
집꾸석에 있는 울 예팬네가 혹여 산바람이 들어서 등산복 가게를 들락 거려 행여 살림이나 거덜낼까 해서 난 늘 노심초사하면서
살고 있는데 사람은 남자 보다는 여자가 훨 화려한 반면에 꿩은 정반대이다.
그 연유는 주로 풀숲에서 알을 품어야 하는 암꿩은 보호색을 띄워야 하므로 그 색갈이 아주 밋밋하지만 숫꿩(장끼)은 담비나
삵 같은 포식자가 다가 오면 눈에 잘 띄는 화려한 색상으로 포식자를 알을 품고 있는 까투리로 부터 멀리 유인하는 역활을 담담
하게 되어 붉은 머리와 함께 화려한 깃털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는데 암꿩도 구렁이 같은 포식자로 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전혀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렁이가 몸을 감고 조여 올 적에 일시에 힘을 몰아 날개를 펴게 되면 한순간에 구렁이 몸이 끊어져 버린다고도 한다.
남편 제삿날 소복을 입은 여인네를 덮친 이 선비도 아마 약간의 변태 성향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 이러한 변태의 원조격인 분이
바로 폭군 연산군이다.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우연히 들른 사찰에서 비구니(여성 승려)를 탐내질 않나 우연히 길을 가다 암말의 등을 타고
기분 좋게 맹야호호 하며 소리를 치는 숫말을 보곤 저건 무얼 하는 행동이냐고 아랫사람에게 물어 보니 말도 사람처럼
자식을 보기 위해 교미를 하는데 말은 신체 특성상 후향위라는 체위만을 고집한다고 아뢰였는데 어느 날 궁궐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하던 도중에 궁중 나인들을 홀라당 벗겨선 암말처럼 엎드리게 하고는 신하들에게 뒤에서 공격하라고 어명을 내린다.
그룹 쎅스를 감상하면서 거하게 술을 마셨던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뻘 되는 분이 하얀 상복을 입은 모습에 동해선 그 길로 방으로
끌어 들여선 이 치악산의 선비처럼 겁탈을 하는 만행 마져 저지른다.
물론 그 백모는 스스로 자진하여 한 많은 생을 마쳤지만 원래 카사노바를 자처하는 자들에게도 필히 준수해야 할 행동강령 같은
것이 있는데 우선은 반드시 피임기구를 사용하고 다음으로는 임자가 있는 물건은 절대로 탐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묫자리가 있는 도봉구 방학동 이야기를 비롯해서 치악산에 전래되는 여러 잼난 얘기는 아무래도 다음 보은 속리산
산행기로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원래 연재소설이란게 구런 거자너요.
예팬네는 일분안에 컴을 끄고 남은 숙제를 안해 주면 삼분 이내에 당신은 죽은 목숨이라고 지랄 발광을 하고 있으니 저도 어찌 할
도리가 엄네여.
탄천변에서 아무르 표범 돌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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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석산에서 넘어온 역사 이야기는 치악산을 넘고
속리산에서는 연산군에 관한 재미난 얘기기 기대됩니다.
원래 탕자의 딋 얘기는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긴글..밤새우셨겠습니다.^^
산행을 하면서.. 역사적인 플 루트를 알기란 감합니다...^^
장문의 글 체화해 올려주신 아무르 표범 돌삐님
담 속리산에서 아우성 치며, 단장하고 있을 단풍산행기도 기대 만땅입니다요.
지식더 얻고...........3분 안에 ...뭐가 그리 급하시나요..........도대체 알 수 없네유,ㅋㅋㅋㅋㅋㅋㅋ
돌삐님 글은 중독성이 강해서 읽지 않고는 못 배기지요
이번주는 장각 폭포에서 시작하는 속리산행인데
장각폭포마을이 제고향이랍니다.
잘살펴서 보시고 좋은글 기대할게요.
제고향을 돌삐님은 어떻게 그려내실지 기대합니다.
차일혁총경은 경무관으로 승진하셨으며 불교쪽에서 숭상하는 분이시지요 유명한 구례화엄사 순천송광사 등 유명사찰을 빨갱이 때문에 불사르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유명한 불사를 후세에 있도록 하신분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