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서 살아오는 당신, 진달래 산천
진달래 山川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쏘아놓고 가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뱃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창작과비평사,1989), 32-35쪽 전문
“당신”은 실은 이 전쟁의 주동자가 아니다. 총을 쏘는 일은 늘 권력게임의 이해관계에 얽힌 당사자들이 초래하는 법이니 “당신”은 아니다. “당신”은 남해 바닷가 어느 마을에서 눈이 멀어 밥벌어먹고 살 수 없는 식구들을 밥벌어먹여 살려야하는 신산하고 다정한 한 가정의 가장일 뿐이다. 그런 “당신”이 이유도 모르고 총을 들게 되었다. 잘린 발목을 신은 지까다비 나뒹구는 전쟁의 참혹 속에서, 누구를 쏘아야하는지 왜 쏘아야하는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어서 빨리 이 총쏘기를 끝내야 한다. 그래야만 눈 빠지게 “당신”을 기다리는 눈먼 식구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온종일 탄환을 퍼부어댔다. 아무리 탄환을 퍼부어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 더는 총을 쏠 수 없다. “당신”은 총을 잔디밭에 던져버리고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는 길가의 바위 그늘 아래 지쳐 잠이 들었다. 바위모서리에 머물고 있는 이름 모를 나비처럼 사뿐히 잠든 이름 모를 “당신”은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산으로 가서….
신동엽 시인의 시에 출현하는 나비는 날갯짓하여 시적 주체와 독자를 꿈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꿈속으로 간 시적 주체와 독자는 다소 애상적으로 구현되는 시적 리얼리티의 시공(時空)에 다다른다. 이 나비효과에 의해 도래하는 시간은 원초적 순수본연의 상고(上古)를 환기하는 전설의 시대이고 그 장소는 총칼의 쇠붙이와 일체의 껍데기를 내다버리고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서로 맞절하는 초례청의 지대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의 나비가 보여주는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의 허리,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는 중립의 지대이다. 꽃의 살점을 찢는 총칼 따위의 살상무기가 아니라 쟁기와 삽자루 같은 농사기구로써 생명과 삶을 일구어내는 평화로운 논밭이다. 그리하여 나비는 마침내 「蠻地의 音樂」에서처럼 “구태여 건넛마을 꽃 핀 전설 속의/ 머리채로 사무치게 노래 불러 강산을 채”운다. 이러한 나비는 ‘장주와 나비, 꿈과 현실, 생과 사, 피아(彼我) 즉 이편과 저편의 구별이 없는’ 호접몽의 경지에 있다. 이는 꿈이 현실을, 현실이 꿈을 서로 억압하거나 구속하지 않는 상태이며 분열을 지양하는 ‘진테제(Synthes)’의 경지다. 이러한 경지는 생명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게 존귀하고 존중받는 원초적 보편평등의 세계로까지 확장되어간다. 그러므로 저 “꽃 핀 전설”의 세계를 구가하는 나비는 존재의 시원에까지 소급하며 평화를 꿈꾸는 시인의 열망을 오롯이 대변한다.
총을 버린 “당신”의 머리맡 바위모서리에는 나비가 머물러있어 “당신”의 잠을 꿈으로 안내한다. 탄환과 포탄에 훼손된 “당신”은 이제 평화의 꿈이라는 현실에로 인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 나비는 피 흘리던 “당신”을 “당신”의 잠 속에서 꿈으로써 회복하고, 회복된 “당신”을 “당신”의 서늘한 잠 밖의 현실로 다시 구현해낸다. 이렇듯 “당신”의 피 흘리는 혼미한 현실은 나비의 생생한 꿈의 이미지로 번역됨으로써 마침내 불가능한 현실의 구현을 이룩하는 것이다. 손상되었던 “당신”의 평화가 복구되는 이 ‘생생한’ 꿈의 장면을 목격한 독자는 끝내 평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지쳐가던 평화의 열망을 되피우고야 만다. 방방곡곡 진달래 산천의 꿈과 의지는, “당신”이 잠들었으며 동시에 옛 후고구려장수의 의형제가 잠들어있기도 한 ‘바위’에서부터 구체화되는 것이다. 저 바위는 다름 아닌 상고시대로부터 현대의 시간까지를 관통해온 굳건하고 따스한 평화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비는 한편으로 주술적 상징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비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떠한 불가능성도 ‘현실태(엔텔레케이아entelecheia)’로 구현시키는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은 자의 영혼과 산자의 육신을 이어주는 영매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당신”이 기대어 잠든 바위는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바로 그 바위다. 바위에 묻힌 의형제는 누구일까? 되갈라져 분열된 강토를 떠돌던 후삼국의 서러운 유민, 옛 삼국통일의 회복을 꿈꾸며 서로 적이 되어 싸웠으나 마침내는 한 형제 한 식구로 합쳐지고야 말 후삼국의 병사였을 것이다. 의형제를 묻으며 후고구려의 장수들이 그러했듯이 “당신”은 어떤 적의도 없이 다만 “얼굴 고운 사람”으로서 바위 아래 잠들어있다. 나비는 “당신”의 순박하고 고운 잠을 역시 순박하고 곱게 그 바위에 묻혀있을 의형제의 영혼과 이어줌으로써 “햇빛 맑은 옛날”의 바위전설을 복원해낸다. 온갖 껍데기는 사라지고 기어이 평화만 남고야 말 그 바위의 전설 말이다. 총을 내던져버리고 마지막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바위 아래에서 잠자는 “당신”은 “바람 따신 그 옛날”로부터 전해오는 바위의 전설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중립과 통일의 평화지대로 데려가는 나비의 날갯짓에 피 흘리는 잠을 얹어서….
이제 보니 “당신”은 오래전에 죽은 내 숙부이기도 하고 내 아버지이기도 하다. 「진달래 山川」은 나의 가족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 현대사를 왜곡한 주범이기도 할 이념갈등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무형의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불우한 가족사를 소환하는 일을 고통스럽지만 도리 없이 직면케 한다.
나의 숙부는 무산자소지식인으로서 해방 이후 남로당 관련의 이력으로 보도연맹사건 당시 민간인학살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이의 이력에 관한 진실은 몹시 ‘불온한’ 진실이어서 오랜 세월동안 얌전히 봉인되어있어야 했다. 어릴 적에 아버지가 숙부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왜 굳이 ‘행방불명자’의 명명(命名)을 강조하셨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게 된 건 봉인의 세월이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교육공무원인 교사로서 파탄 난 집안의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했던 아버지는 좌익 이력의 형을 둔 내력으로 평생을 레드컴플렉스에 의한 자기검열의 병증을 앓아야 했던 것 같다…. 숙부가 학살되고 난 후 숙모가 출가하여 절간에 듦으로써 당시 세 살, 다섯 살 난 두 사촌형제들은 이른바 가정해체의 피해자가 되어 우리 가족에 편입되었고 우리 남매들과 함께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두 형제는 타고난 총명에도 불구하고 연좌제의 걸림돌에 걸려서 탄광노동자와 노숙의 잡부노동자로 전전하다 객사에 이르고 말게 되었다. 대학교육을 받고 나름대로 안정된 직종에 있는 우리 형제들과는 확연히 차별적인 이력이다. 정처 없이 공사판을 떠돌다 마지막에 중계동의 한 쪽방에서 객혈로 쓰러져 하마터면 무연고사망자시설에 수용될 뻔한 둘째 사촌오빠를 성당으로 모셔와 장례를 치르던 날, 그 애환의 생애가 하염없이 가엾다 못해 죄책감까지 들었다. 급성간경화로 시커멓게 된 오빠의 영면에 대고 실종된 우리 가족사를 어떻게든 복원해보겠다고 덜컥 해버린 약속은 분명 내 깜냥에 과분한 과제다. 나는 언제 갚을지도 모를 채무자의 역할을 자초한 것이다.
내가 겁도 없이 짊어진 저 비애와 부채감이 실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 퍼즐조각처럼 꿰맞추어지던 그때부터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山川」은 특별한 정감으로 마음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피 흘리며 잠든 저 이름 모를 병사인 “당신”과 오래 평화의 꿈을 꾸었을 내 숙부, 오래 숨죽였던 내 아버지, 오래 떠돌았던 내 사촌형제들이, 바위모서리에 앉아 접혀진 나비의 저 날개처럼 하나로 포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백골은 나비날개의 가루처럼 진토되어, 지쳐 죽은 산천에 꽃죽 널며 해마다 봄마다 진달래 산천의 증언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권리를 배제하는 경도된 이념이란 것이 인간의 존재성과 실존에 얼마나 반생명적이고 야만무례하며 반인권적 폭력인지를 폭로하는 증언 말이다.
다시 보니 “당신”은 또한 어릴 적 우리가 동네에서 탁구라고 이름 부르던 이름 모를 아저씨이기도 하다. 염천삼복의 폭서에도 아랑곳없이 뉘 집 담벼락 아래 쓰레기통을 뒤져서나 주웠을 법하게 남루한 군화와 군용코트로 온몸을 둘러쓰고는 빈 양은양푼을 들고 대문간에 서 있곤 하던 그 탁구아저씨…. 그는 그저 저녁어스름처럼 서늘히 웅크리고 있다가 우그러진 양푼에다 누구라도 한 끼 밥을 부어주면 짙어오는 저녁의 어둠 속으로 조용히 지워지곤 했지만 끼니때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곤 했다. 때때로 소꼬리에 달라붙는 파리 떼 같이 귀찮은 동네아이들의 돌팔매질조롱에도 한번 뒤돌아보는 법 없이 고행의 수도승처럼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그를 뒤따라온 그의 발자국도 모른다 했으나 우리는 왠지 알 것 같았다. 하늘로 회올라간 줄 알았던 산사람들이 뼛섬 썩어 문드러지며 피워낸 진달래 꽃죽의 그 그리움이 휘돌아 마을로 내려온 거란 걸…. 돌아오는 “당신”을 통하여 우리 삶의 역사는 늘 되살아나는 법이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잠들어버려서 기어코 돌아오지 못한 “당신”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행불자’로 남은 내 숙부 때문에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간다”는 이 구절이 나는 못내 서럽고도 착잡하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어이없이 파르티잔이 되어버렸고 고작 우리 현대사 이념사냥의 희생양으로서 ‘소탕’되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지나가는 산골 비행기가 쏟아놓는 기관포탄에 꽃살 튀듯 꽃비로 무너지며 산산이….
그러므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갈 일이 아니었다. 끝내 살아 돌아와 남해의 어느 너른 바다와 바닷가 너른 들판에서 그물을 걷고 씨를 뿌려야 할 일이었다. 산으로 가서 고작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핏빛 찬란한 진달래천지로 붉은 살점 튀어 올라서는 안 될 일이었다.
길가에 꽃 펴 있는 진달래 몇 뿌리는 “당신”의 잠자는 꿈이 흘리는 저 붉은 피를 먹고, 틀림없이 도처에서 살아오는 “당신”일 것이다….
신동엽문학관 담벼락 게재
전비담. 2013년 제 8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으로 《시산맥》에서 작품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