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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1878~1961)
한국교회 초기 부흥과 성장에 기여
장터 전도 / 사진 출처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KIATS)
한국교회 위해 전 생애 다바쳐
찰스 알렌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1878~1961) 선교사는 한국교회 초기 부흥과 성장, 그리고 신학 형성에 큰 공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곽안련’이라는 우리나라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곽안련은 한국교회를 위해 태어났고 한국교회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이다.
곽안련(찰스 알렌 클라크) 선교사/ 사진 출처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KIATS)
승동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장신논단 제22집(2004.12, p217~241)에 따르면 곽안련은 76세가 되던 때 한국에서 청춘을 바쳐 선교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공사장에서 그리고 출판계에서 얻은 고국에서의 경험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거의 비등하였고, 그것은 나의 선교현장에서 가장 값진 보람을 안겨주었다.”라고 말할 만큼 그는 한국교회를 위해 누구보다도 다양하게 선교에 열정을 쏟은 선교사다.
곽안련은 1878년 5월 14일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스프링 밸리(Spring Valley)라는 농촌 마을에서 목수였던 아버지(William Oliver Clark)와 청교도의 후예였던 어머니(Lillian Carolin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이든 해에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익사 사고로 형을 먼저 보냈다.
곽안련은 미네소타대학(University of Minnesota)과 매컬리스터대학(Macalester College)을 거쳐 시카고 맥코믹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그가 이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했으나 목사가 된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졸업하기 4개월 전의 일이다. 그는 이때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목사가 되는 문제에 대하여 10년 동안이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격론을 벌이다가 신학교를 졸업하기 4개월 전에야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나는 주님의 뜻에 날 맡기고 난 다음에 온종일 기쁨 속에 찬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이 신학교에서 그의 졸업반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졸업생 동기 44명 중 18명이 선교사로 지원했으며, 그들 모두가 조선(한국)으로 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학생들은 복음이 필요한 곳에서 쓰임을 받고 싶어 했다.
1902년 마블(Mabel Craft)과 결혼하고 곧이어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해 9월 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조선 땅)에 왔다. 이후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추방될 때까지 40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
언어에 탁월한 재능, 선교로 부르심에 부담
특히 곽안련은 언어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미네소타대학 재학 시절에는 헬라어에 두각을 나타내 헬라어 보충반 조교를 맡아달라는 제안받았을 정도다. 이 자리는 졸업 후 대학교 내에서 전임 강사직을 거의 보장받는 지위였지만, 매컬리스터대학으로 옮겨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곽안련은 매컬리스터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히브리어와 아랍어에도 관심을 가졌고,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언어적 재능을 살려 라틴어와 헬라어 교수가 되고자 했다.
장신논단 제22집에 따르면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수줍음을 타는 자신의 성격과 목사가 되면 혹시나 미개한 나라의 선교사로 나가게 되는 결과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곽안련은 한국으로 파송돼 선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학업에도 열심을 냄으로써 휴가 기간에도 공부를 계속했으며, 매컬리스터대학에서 1910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시카고대학에서 1921년 문학박사 학위를, 1929년 종교교육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육선교사로 잘 알려진 곽안련의 아버지는 건축업자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공사 현장에서 조수로 일했던 그는 목수 노동조합의 조합원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목수 일에 능했다. 이로 인해 그는 20여 년 동안 선교회 건축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었고, 한국선교에서 건축 고문으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곽안련은 미국에서 출판업계에도 10여 년간 몸담았고, 이후 한국에서 서적과 문서의 창작과 판매를 담당했으며, 예수교서회의 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 형이 익사하는 사고로 가정을 돌봐야 했기에 이른 시기에 선교의 부르심에 부담을 느꼈다. 그가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로 형을 잃고 장남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가 선교지 한국으로 오기 전부터 교육가, 건축가, 출판가로 하나님은 그를 철저하게 준비시켰다.
승동교회 섬기며 경기도 동해안까지 순회 전도
1902년 9월 22일 한국의 제물포에 도착한 인간 곽안련에게 거대한 시련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 발을 내디뎠을 때 당시에 가장 무서웠던 전염병 콜레라가 온 나라를 휩쓸어 수만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어 천연두가 엄습해 어린이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계속 어린이들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주는 전염병 성홍열(猩紅熱)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곽안련은 서울 새문안교회 앞 길거리에서 거리 전도를 하는 것으로 한국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선교사의 숫자가 부족하고 한국인 목사가 없는 상황이기에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 동해안까지 뻗어 있는 수많은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펼쳤다.
도보나 말을 타고 먼 지역을 이동하면서 우기에는 범람하는 물과 전염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겨울에는 얼음 덩어리를 밟고 강을 건너며 복음을 전했다.
장터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장터 전도는 곽안련과 한국인 매서인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찬송가를 부르며 청중을 불러모으는 것으로 시작됐다. 곽안련이 먼저 서툰 한국어로 복음을 전하고 이어 매서인이 복음을 상세히 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곽안련은 특히 관심을 보이는 사람의 마을에 함께 들어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가 부임한 지 3년 만에 담당 교회가 20개로 늘었고, 그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50여 개교회를 돌봤다. 특히 곽안련은 무어(Samuel F. Moore, 모삼열)가 설립한 곤당골교회(이후 승동교회)에 1906년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교회를 돌봤다.
곤당골교회는 양반과 백정 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곽안련이 부임해 안정을 찾았으며, 1912년에는 승동교회의 건축설계와 건축 과정에 직접 참여해 예배당을 완공했다. 1915년 이여한 목사가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곽안련은 1922년 평양신학교 교수로 봉직하기 위해 평양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동사목사로 승동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 사진 출처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KIATS)
실천신학을 평양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곽안련이 평양신학교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1908년부터다. 서울에서 전도 활동과 목회를 감당하면서 학기가 시작되면 평양신학교를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처음에는 목회신학을 가르치다가 1916년부터 정교수로 실천신학과 교육법 과정을 맡았다.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종교교육과를 설치하고 1년에 6주씩 3년간 공부하는 석사과정을 가르쳤다.
이 과정은 노회별로 1명밖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졸업자들은 한국 전역에서 주일학교 강습회와 성경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종교교육 석사과정 외에도 봄과 가을학기 과정이 추가됐는데, 곽안련은 교수들이 보통 가르치는 8~10시간을 넘어 15시간씩 그리고 심한 경우 22시간씩 강의했다.
곽안련은 실천신학을 강의하며 학생들을 실제로 실천적으로 만들기 위해 매주 최소한 90분씩 시간을 내 신학교 주변에서 전도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또 학기마다 학생들에게 다섯 종류의 복음 전도사역을 체험하도록 요구했는데, 그것은 시내 가두 예배 처소, 시내 공장들, 철도역 근방, 시내 가게와 병원에서의 전도와 시내 축호 전도다. 그는 학생들이 부흥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열어주었는데, 특히 크리스마스 때면 각 교회로 학생들을 내보내 학생들이 실전경험을 쌓도록 도왔다.
신학지남 / 사진 출처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KIATS)
문서 사업
곽안련은 문서를 통한 복음 전파를 말로 하는 설교와 동등한 것이라 믿었다. 그는 1918년부터 ‘신학지남’의 초대편집인 호주 선교사 엥겔과 함께 이 저널의 책임을 맡아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였고, ‘목회학’, ‘설교학’, ‘강도요령’, ‘장로교회사 전휘집’,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 초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조와 소요리 문답’과 교법 관련 도서를 저술해 신학교육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다.
또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해 1934년 이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표준성경주석 발행책임자로 임명돼 구약 18권과 신약 3권 등 총 21권의 성경주석 집필 과정을 책임지고 일했는데, 그중 ‘욥기-시편 표준성경주석’을 출간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에는 ‘레위기 표준성경주석’ 등 총 5권의 주석을 한국에서 출간했다.
이 밖에도 곽안련은 주일학교 사업에 관한 책 7권을 저술하고, 영어로도 다양한 책을 발간했다. 1934년에 저술한 ‘장로교회사전휘집’은 1934년까지 미국장로교가 한국에서 행한 모든 사역의 역사를 기록한 중요한 책이다. 그는 또 ‘한국선교사역에서의 네비우스 정책’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 기독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클라호마에서 저술 활동을 하다가 1961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곽안련 가족의 희생과 선교 활동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서울과 평양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곽안련에게도 견디기 힘든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1903년에 태어난 곽안련의 첫 번째 아이 버튼이 1904년 12월 성홍열로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인 1905년에 태어난 고든 또한 소화 기능의 문제로 6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죽음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됐다.
곽안련은 이들을 포함해 세 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그런 가운데 16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이후 곽안련은 1남 1녀(넷째 딸과 다섯째 아들)를 두었는데, 두 자녀 모두 아버지와 같이 한국선교에 헌신했다. 서울에서 출생한 곽안련의 아들 알렌은 1933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해 만주 홍경 선교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청주 선교지부로 이전해 농촌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1941년 일제에 의해 추방돼 콜롬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53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청주에서 활동했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장로회신학교에서 강의하고, 피어선성경학교 교장 및 대한성서공회 번역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73년 정년퇴임 후 귀국했다.
곽안련의 딸 캐서린 또한 1947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해 경북 안동에서 의류구제품 배급을 담당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1953년 대구 선교지부로 전임해 대구 계명대학 설립에 참여했다. 1954년 계명기독학원 초대 이사로 선임돼 활동하다가 1968년 귀국했다.
※ 선교사 열전 이야기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KIATS), 승동교회 홈페이지, 장신논단 제22집 자료 등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했습니다.
근대식병원 광혜원/조선왕실 주치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1885년 4월 부활주일)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오신 선교사는 알렌 이다. 그렇다면, 알렌 선교사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먼저 들어 올 수 있었을까? 당시 알렌 선교사님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다. 그는 의사로서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한국의 보물찾기)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인천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의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당시는 한의만 있던 때)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막 넘은 12월 어느 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분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갑신정변이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명성황후의 집안 조카)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탕약이나 침술로는 7군데 자상을 치료하지 못함-외과수술 필요)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사망권세 사로잡힌 조선에 복음을 전할수 있도록) 그리고 최선을 다해 3개월간 치료하였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885년 4월 12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렸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입니다. 그후 이 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설립자 알렌은 미국 선교사이자 주한 미국 공사관 의료진으로, 갑신정변 첫날밤 개화당의 공격을 받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이르는 치명적 상처를 입었던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됩니다. 광혜원은 문 연2주 만에 고종으로부터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받고는 빠르게 발전 속도를 타게됩니다. 1883년 8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는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조선의 젊은 관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큰 갓의 챙으로 스며든 햇살이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러나 충격에 빠진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습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의 오랜 배멀미는 이제 서구 문명에 대한, 다스릴 수 없는 멀미로 뒤바뀌게 됩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조선 유사 이래 서구의 세계를 최초로 견문하게 되는 이들은 조미(朝美)조약 체결 1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報聘使)들 이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 보빙사를 이끌었던 정사(正使) 민영익은 미국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자신의 조국을 암흑세계라고 표현하고, 자신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할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홍영식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서구식 근대 교육의 싹이 바로 이 광혜원을 중심으로 죽순처럼 솟아오른다. 광혜원이 자리잡은 곳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참살된 홍영식의 재동 집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도, 역사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핏자국이 남아있을 뿐. 고종이 알렌의 병원 설립 요청에 흔쾌하게 응답하고 그 병원에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한 것은 이 파란 눈의 서양인에 대한 믿음만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속국화 정책과 무너지기 직전의 재정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텅비어있는 국고를 샅샅이 뒤져 중국 상하이로부터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서적을 3만여 권이나 사들였다. 알렌이 광혜원을 세우던 무렵,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본격화됩니다. 1885년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최초의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1년 후에는 역시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을 개교합니다. 같은 시기, 선교사 언더우드가 고아들을 모아 시작한 구세학당은 훗날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지금 조선에서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그들의 한결같은 목적은 영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건, 전신국 교환수가 되어 출세를 하는 것이다.” 자기 집에서 조선인 두명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정동에 조선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을 지어 완전한 근대 학교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 아펜젤러의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1880년대 중반의 서울 거리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낭랑하게 중국 고전의 경구를 외우는 소리 사이로 낯선 언어가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신분으로 보장된 출세가 가능하지 않은 청년들, 양반이 아니어서 오히려 본능적으로 진보적이고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중인 청년들은 세계의 변화에 이런 식으로 민감했습다. 1886년 3월에 설립된 제중원 부설 국립의학교에는 양반 자제들의 입학이 없어서, 각 관아에서 차출해준 기녀들이 그 첫 번째 입학생이 됩니다.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아름답고 우수한 기녀들은 훌륭한 의학도였을 뿐만 아니라 파티 석상에서는 권주가를 부르는 솜씨 또한 근사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근대교육은, 조선인들 스스로 세운 원산학사나 고위 관리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세웠던 신식학교 육영공원에서도 그 맹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학교를 세웠으니 학생들의 벼슬 길을 열어달라고 청원하는 원산학사(1883년)나, 양반 학생들의 불성실한 수업태도로 말미암아 문을 닫게 되는 육영공원(1886년)은 아직 미래의 문을 힘껏 열기에는 그 힘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청년들을 난세의 심장부로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근대우편제도가 설립되고, 병기제조장인 기기창이 세워지고, 전선이 조선의 구석구석으로 뻗어가며 뒤처진 근대의 길을 빠르게 좇아갔다. 하지만 국제우편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세계화를 앞당길 수도 있었던 해저전선과, 서로 북로 전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보다 본격적인 침탈의 도구가 되었다. 문명은 근대화를 앞당겼지만, 무너져가는 나라 조선을 더 빠르게 근대적 식민지로 몰아가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 나라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알렌을 미리 보냈고 갑신정변의 사건을 통해 고관 민영익의 생명을 살리면서 선교사가 들어오기에 전혀 어려움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실지로 처음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알렌의 도움으로 알렌의 집에 거하면서 조선선교를 위해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 뿐 아니라 초창기 조선에 들어오셨던 모든 분들이 알렌의 도움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렌 선교사를 통해 또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 선교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마음껏 조선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는 20년간 의료선교사. 미국의 한국 공사관서기. 대리공사. 총영사로 근무하며 선교와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 외교관으로 의사, 선교사로서 구한말 근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미국인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어떤 인물일까? 1858년 미국 오하이오 출생인 알렌은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를 지원했다. 20대의 청년 선교사 알렌은 미지의 세계 동양행 꿈을 품고 아내와 함께 1884년 초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그 후 임지를 조선으로 바꾸고 1884년 9월 20일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알렌은 조선에서 가톨릭 포교 과정이 큰 갈등을 유발하며 정부와 민중의 엄청난 반발과 희생자가 발생했었음을 알았다. 1883년 조선과 미국간 수교는 모든 신앙의 자유가 확보된 것이 아니고, 외교관과 서양인에 한 해 크리스토교를 믿을 수 있도록 일부 허용된 것이었다. 당국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무작정 선교보다는 의료와 외교활동을 병행하면서 기회를 보는 점진적 접근법을 택한 것이다. 영리한 알렌은 마침 1년 전에 개설된 주한 미국공사관의 무급 의사로 신분을 택했다. 행운이 기적적으로 왔다. 그의 입국 3달 만인 1884년 12월에 조선의 갑신정변이 터졌다. 우정총국(조계사 앞) 개청 축하연에서 실세 민영익이 개화파가 동원한 일본 건달 칼에 쓰러져 중상을 입는다. 곁에 있던 외교고문 묄렌도르프가 재빨리 그의 가마에 싣고 바로 옆 자기 집 박동궁(전 숙명여고 터)으로 이송한다. 치료를 위해 궁궐에서도 한의사 여러 명이 도착하나, 묄렌도르프는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인 알렌이 서양 의술로 치료토록 한다. 민영익에게 지혈과 소독, 봉합수술로 조선 최초의 서양식 수술을 한 것이다. 실세 민영익은 두 달 후 쾌유되어 다시 정계에 돌아왔다. 이 일로 알렌과 서양의학은 고종과 민비의 전폭적인 신뢰를 획득하고 알렌은 서울 주재 모든 외국 공사관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리고 1860년생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 알렌(1858년 생)을 동양식으로 형님으로 호칭하며 의형제 관계를 맺는다. 이듬해 1885년 4월 고종을 알현한 알렌은 서양식 병원을 개설하도록 지원받는다. 병원은 제동 4거리에 위치한 역적 홍영식(전 우정총판)의 몰수한 집(헌법재판소 내 북쪽 끝) 이었다. 최초의 병원 이름은 광혜원이었으나, 고종이 부여한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비를 고종이 지원했다. 근대식 병원의 출발이다. 쿠데타의 와중에 선교사 알렌은 엄청난 특혜를 입고 왕립병원(Royal Hospital) 제중원 원장으로 화려하게 조선사회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양의학교를 개설하여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해 달라는 고종의 요청도 받아 국립의학교(國立醫學校)를 제중원 내에 설치한다. 왕실의 지원과 승인을 받았으니 이미 선교의 목적은 달성된바 다름없었다. 고종과 민비의 주치의 겸 외교자문이 되면서 월 급여까지 받게 되니 그의 코리안 드림은 1차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한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할 것이다. 갑신정변 다음해인 1885년 4월 5일 입국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도 이런 배경하에서 활동하였다. 뉴저지의 신학대학 출신인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정동교회)을 설립하여 이승만과 같은 인재육성과 크리스토교 선교를 할 수 있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도 아펜젤러와 같은 날 입국한다. 알렌을 만나 제중원에서 근무하며 국립의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교육과 어학에 특출한 자질을 가진 언더우드는,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여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뉴욕 의과대학 출신 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도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했다. 스크랜턴도 제중원의 의사로 근무하며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 아내와 같이 왔는데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한국 여성의 교육에 뜻을 두고 1886년 이화학당을 만들어 현재의 이화여고와 이화대학교로 성장한다. 따라서 1885년은 한국기독교의 역사가 만들어진 해였다. 1985년의 한국기독교 100년을 기념하는 대 축하행사도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동시에 조선에서는 근대화 정책으로 서양의학과 근대식 병원이 출범하고 근대식 교육과 함께 여성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20대 중반 이 파란 눈의 미국 청년들! 그들은 동방으로 진출해 코리안 드림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인 알렌의 영리한 선교 전략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천주교(가톨릭) 전래 과정과 기독교의 전래를 대비해 볼 필요가 있다. 천주교는 백 년여간에 끊임없이 박해를 받고 그 희생자만도 9천 명에 이를 정도로 당국과 강력한 충돌이 있었다. 천주교는 당국의 승인 없이 민중의 신앙과 서학으로 출발하면서, 조선의 국교인 유교와 대충돌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당파적 요인이 있었다. 주로 남인 계열의 비판적 학자들이 천주교에 가담하면서 노론 계열의 전통 집권세력에게 호되게 당하는 정치적 비운도 있었다. 그것은 개척자의 운명이랄까? 가톨릭의 강성적 요인이랄까? 알렌은 어느 외교관보다 왕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자부했다. 갑신정변 후 조선 총독 행세를 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행패와 거드름을 견제할 사람은 알렌뿐이었다고까지 전해진다. 조선에게는 악마와 구세주였던 이 두 사람의 충돌은 소리 없이 확산한다. &&&&&&&&&&&& 알렌(Horace N. Allen, 안연, 1858-1932) 선교사는 제중원을 맡으면서 연세 의료원(세브란스)의 첫 단추를 끼며 현대 의학을 시작하며 알리는 일을 하였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공의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갑자기 일어나서 민영익의 치료를 맡게 된다. 그는 정변 때 자객의 칼에 일곱 군데 찔려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그 때 알렌은 수구파인 민영익을 3개월간 치료를 해준다. 이 일로 인해 알렌은 왕실의 신임을 얻었고 다음 해 3월 27일 처음으로 국왕과 왕비를 진료하기 위해 입궐하게 된다. 신임 얻은 알렌은 당시 미국 대리공사인 폴크를 통해 정부에 서양식 병원건립을 제의했다. 고종의 허락으로 그해 4월 10일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개원되었다 알렌은 광혜원 진료의 책임을 맡은 장로교 본부에 위임을 받아서 왕립 병원의 고용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왕립 병원 광혜원은 개원 16일 후인 4월 26일에 고종의 지시에 따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으로 개칭되었다. 헤론은 5년간(1884-1890) 순직할 때까지 이곳에서 봉사하게 된다. 알렌은 선교사이자 의사, 외교관으로 활동한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근대의학을 전파하며 반일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던 외교관의 역할도 하였다. 그는 1881년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83년 3월 신시내티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그는 같은 의학동급생인 프랜시스와 결혼하고(1883년 5월 17일) 선교사로 중국으로 간다. 그는 베이징에서 처음 선교하려 했지만, 알렌은 난징, 상하이 등지를 순회 선교하다가 조선의 의료 선교의 사명을 알고 방향을 바꾼다. 해관 의사 핸더슨의 권유로 1884년 서울에 오게 된다. 알렌이 상하이를 거쳐, 제물포를 통해 9월 22일 서울에 들어온 것이 바로 조선에 처음 정주 선교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알렌은 한국에 생명의 의료선교, 모세의 구리 뱀 지팡이를 들어 치료하던 것처럼 치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의료의 빛을 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도 아프리카, 아시아 등 미전도종족에 의료의 빛을 전하는 손길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도로 이 일에 동참하는 주의 손길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