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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哀題)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불념성)-종사의 넋이 나의 지성을 생각지 않아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 상하는지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해마다 아들들이 꿈같이 떠나가니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편탁영)-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 적시네!
연산군(燕山君)
어머니와 3살 때 헤어지고 6살에 사별한 인간 연산군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 연산군묘(燕山君墓)를 찾았다.
우리 역사에는 연산군(燕山君)을 가장 폭군이며 패륜아(悖倫兒)로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사후에 칭하는 왕의 무덤인 능호(陵號)도 없고 묘호(廟號)도 없이 그냥 제10대 연산군 이라하고 “연산군 묘”라고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실록(實錄)”이라 되어 있지 않고 “연산군일기”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국민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교 교과서에 “폭군 연산군”으로만 역사를 배워왔다.
필자는 묻고 싶다.
역사는 인간의 삶을 기록한것인가
정치 승패(勝敗)의 흔적인가
나는 연산군의 묘를 답사하면서
연산군을 역사속의 폭군(暴君)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 연산군”으로 역사를 읽고 싶은 연민(憐愍)의 정(情)을 느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성종의 장남으로 태어나자마자 세자의 직함을 받았다.
3살 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으로 이별한다,
6살 때 연산군도 모르게 폐비 윤씨가 사약(賜藥)을 받고 죽는다,
18세에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28세때(연산군10년)에 외할머니 신씨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이때 당신이 연산군이라면 그 심정이 어떻했겠는가?
나는 연산군의 일대기를 볼 때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이야기기를 떠올린다.
짐승도 느끼고
물고기에게도 있고
하등동물인 곤충에게도 있는 모정(母情)을
인간인 연산군은
3살 때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6살 때 어머니와 죽음으로 영별(永別)하고 매몰찬 궁중의 법도
속에서 어머니의 정(情)을 그리워하면서 차갑게 자라온 연산군이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사식이든
한갓 별 볼일 없는 시정(市井)의 장사꾼 자식이나
초부(樵夫)의 자식일지라도
하물며
사람의 간(肝)을 회로 썰어 먹었다는 비인간적인 도둑놈 도척(盜跖)의 자식일지라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어린이의 마음은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외디푸스 콤플렉스(complex Oedipus)가 기인(起因)되는 것이다.
연산군이 폭군이 되고
지금 우리 사회에 부부간의 이혼으로 인해 고아아닌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어른들은 그 심정을 헤아려본적이 있는가?
눈앞의 패륜(悖倫)에 대하여 그 책임을 어린이들에게만 돌릴 것인가?
Children's heart do not know Adults !
(어린이들의 마음을 어른들은 모른다 !)
우리는 연산군에 대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나 갑자사화(甲子士禍)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연산군은 12년간의 재위 중에 정사(政事)를 열심히 본 기록이 있다.
150회의 경연(經筵)을 통하여 정사를 공부하였고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철갑주(鐵甲胄)를 제작하여 군비를 튼튼히 하였고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사서(史書)인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완성하였다.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풍년에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민생구휼제도를 개혁하였다.
역대명감(歷代明鑑)을 지어 문명(文名)을 높게 장려하였으며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동국명가집(東國名歌集)을 편찬하였다.
농서언해(農書諺解) 잠서언해(蠶書諺解)를 간행하여 농사에 대한 지식을 많이 보급하였다.
진제청(賑濟廳)을 설치해 배고픈 백성의 구휼에 힘쓰고 백성의 세금을 줄이고 양반들에게 세금을 더 걷게 하였다.
나는 연산군을 재평가하고 싶은 것은
연산군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하여 내쫓긴 왕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래서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세력들이 연산군의 작은 결점을 크게 부각시켜 연산군일기에 기록하면서 중종반정을 역사 속에 정당화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을 잡고 승리한자에게 유리하게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알기 싶게 비유해 주는 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世祖)가 되었다.
역사는 세조를 “나쁘고” 단종을 “정당화”하면서도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降封)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에 신원(伸寃)되어서 대군(大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였고 능(陵)도 영월의 장릉(莊陵)이 되었다.
200년 동안을 세조의 세력들이 역사를 마음대로 요리면서 계유정난을 정당화 시킨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정당한 역사와 잘못된 역사를 함께 공부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 27대 왕들이 대부분 공부를 많이 하여 경서(經書)나 시문(詩文)에 실력이 뛰어났다.
27대 왕들이나 왕자들의 실력을 만만히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마 세계적으로 조선왕조 왕들만큼 모든 면에서 실력을 갖춘 왕들도 드물 것이다.
연산군도 시문학(詩文學)에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세자 시절에서 12년간 왕위(王位)기간 동안 수많은 한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폐군(廢君)이 되었기 때문에 다 전하지 못하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125수만 전하고 있다.
시나리오 극작가 신봉승(辛奉承)씨가 연산군 시집 125편을
“시인 연산군”이란 이름으로 해설집을 펴내 서점에 진열되어 있다.
이른봄 서산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조용히 연산군의 묘를 덮고 있다.
화려한 병풍석(屛風石)으로 장식한 다른 왕릉보다
오히려 소박한 “연산군 묘”가 연산군답게 느껴진다.
滿苑春色爛艶陽(만원춘색란염양)-동산에 가득한 봄빛은 햇빛에 찬란한데
芳風和拂麗新粧(방풍화불려신장)-꽃바람이 새로 단장한 옷자락을 나부끼네
濃綠嫩紅繁華地(농록눈홍번화지)-짙은 녹색 연분홍 번화도 하이
誰奉淸狂竊露香(수봉청광절로향)-그 누가 청광(淸狂)을 위하여 이슬 향기 가져왔나
연산군(燕山君)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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