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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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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김인숙 시집 / 시인동네시인선 056 / 문학의전당(2016.05.27)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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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김인숙
황홀한 밀밭의 한여름 질식을 기억하기 위하여
아래 위를 바꿀 수 있는
뜨거운 형식이 필요한 거예요
하얀 분말로 갇히면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바람으로 부푼 당신의 차가운 숙성이
몸을 비틀며 가장 뜨거운 시간여행을 시작하는
겨울날이었나요
팥소를 몸에 들인 당신은 낮달처럼 안색이 변하고
입천장이 벗겨진 나는
멀고 먼 하루를 얼버무리고 말았어요
무너져야 설 수 있다고 했나요
얼어붙은 유리창 같은 하늘을 유영하는
더운 몸의 당신이 있는 한
아무도 얼어 죽지 않고 겨울을 나겠지요
흐린 풍경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그리운 어머니를 이곳으로 모셔오기 위해
햇살 좋은 겨울날이면
나는 때때로 당신이 되고 싶어요
밀밭에서 떠나온 당신의 고향은 어쩜
그렇게 붕어빵이겠어요
빵빵한 붕어빵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어요
목
김인숙
목은
몸으로 가는 길이다
목이 마르면 몸은 불타고
그 길, 길면 길수록
펄펄 끓는 사막이 되는데
사랑에 목매달아 뛰쳐나간
꽃집 처녀,
맘껏 달은 마셨을까
푸른 밤의 살결을 밟으며
메아리가 피는 산기슭에
목
부러진 별들이 쓰러져 있다
북두칠성
사금파리, 사금파리 깨어진
목뼈 일곱
감자
김인숙
감자밭 두둑이 실하다, 하지 앞두고
감자 꽃을 꺾는 손끝에는
오래 된 증산 습성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지상의 살을 쓸어 올리고 내리눌러
북을 돋우고 꽃을 따면 구물구물 굵어지는
땅속의 열매
불붙은 꼬리는 중천에 떼어 두고 지난 밤 떨어진 운석이 달빛 분가루를 묻힌 채 땅 깊이 박혔다, 어둠 속에 묻혀 온몸에 눈이 생긴 남자는 깜깜한 우주의 유전자를 가졌다, 눈이 흙의 안경을 쓰고 흙냄새에 묻혀서 잠을 잔다, 잠자는 동안 몸속으로 길이 나고 길이 깊어질수록 점도 높은 별들이 태어난다
밤하늘이 뒤꿈치를 들고 별꽃 보자기를 펼치는 시간
온몸에 초롱초롱 눈을 달고 팽창하는
감자가 눈을 감자 세상이 정적에 들었다
눈도 오래 무르면 거기서 싹이 나오는데
불덩이를 품은 고랑마다
둥근 시간의 눈알이 허공의 허벅지 아래 어룽어룽 점성을 늘이는
유월 밤 우주는 감자밭이다
부딪치며 비껴가며
안팎으로 수없는 감자들이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다
* <2015 농어촌문학상 시부문 대상 당선작>
곱다
김인숙
반짝이되
눈부시지 않아야
곱다
섞이지 않은
가지런하게
온전한 결이어야
곱다
바람 불어도
내게로만 향하는
눈길 깊어
당신은
애절하게 곱다
사붓이 걸어와
내 속에 곱게 가둔
분가루 같은
당신 마음씨
날마다 맑고 곱다
물
김인숙
나무가
흙탕물에서 손을 내밀었다
나비가 맑은 물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땅이 된 나무와
하늘이 된 나비
넌 어느 손을 잡아 줄래?
손은 몰라
제 몸이 어디서 숨쉬고 있는지
오랜 시간 익숙해졌으니까
몸담고 있는 물을 뒤돌아
짚어 봐,
물 좋으니?
눈밭의 망개 열매
김인숙
하얀 털의 산토끼가
사방연속무늬로 소복소복 엎드려 있다
아스슴 사라진 경계가
바람이 흘리고 간 끝자락에
비스듬히 묻어 있다
가지도 없이 맺힌 망개 열매 두 알
선연히 붉다
맑은 눈알 도르륵 굴리는 순한 짐승,
눈부신 새날의 겨울 한낮이
시리도록 희다
장맛비 내리는 날에는 밀수제비를 뜬다
김인숙
좍좍 쏟아지는 장대비 아니어도 장대처럼 길게 쉬엄쉬엄 오는, 장맛비 오는 날, 보리타작 끝내고 모내기 할 즈음, 해마다 찾아와 지치게 머물다 가는 긴 손님 오시는 날, 묽게 반죽하여 손에 척 들어붙는 밀가루, 질척거리는 물통이를 손으로 뜨는 어머니, 펄펄 끓는 국물에 밀수제비 던져 넣는 다저녁 때, 굴뚝의 연기가 구렁이처럼 추녀 끝을 맴돌다가 마당으로 기어 내릴 때, 깎아서 반쪽을 낸 눈자위 움푹한 감자알이 기포를 타고 오르내리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하이브릿 트위스트 스핀 수중 율동은 화려하지, 바닥이나 벽에는 닿지 않고 팔을 뻗어 공중부양을 하다가 선 자세로 입잠 하는 매끈한 여인, 입맛 당기는 몸은 분이 많아 부드럽지, 그러나 뜨거울 것, 잠시 쉬어가는 더위를 속으로 불러 여름 지날 열기로 간수하는 수제비, 밀수제비, 입천장 데는 감자알 동동 뜨는 국물, 우중의 솥 안에 초여름 거룩한 생존이 뜬다
솔기 1
김인숙
비단과 무명천을 잇고 싶었다
네모반듯하게 마름질하여
가지런히 포개어
한 땀 한 땀 기워나갔다
비틀거리기도, 쓰라리기도 하였다
하루 이틀, 일 년이 년 지나고
쓸리고 다시 맞추고
수십 년이 지났다
솔기는 중심을 잘 잡아 주었다
두 천은 같은 득 다르고
다른 듯 같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같이 살거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물마디꽃 1
김인숙
차오르던 숨이
턱에 턱, 걸린 것이 마디다
막혔다가 빠져나간 자리
흐르다 놀란 멈춘 곳에 마디가 생긴다
힘들게 왔는데도 더 가여 하는 지점의
남루한 물이 그러하다
가장 여린 마음이 속으로 뭉쳐
숨은 상처로 피는 꽃이 너다
건넛마을이 환히 건너다보이는
물마디꽃이다
몸의 소리
김인숙
담벼락 아래 한쪽 구석에 내다 놓은 의자
느릿느릿 발걸음 옮겨 앉는 나뭇가지의
파리한 그림자
의도하지 않았다
원하지는 더더욱 않았다
그래, 때가 되면 다 그런 거란다
다리가 풀린 오후의 관절처럼
시간은 풀들을 키웠다, 우거졌다
바람은 가지를 거느리고 도망갔다, 뻗어갔다
세월이 곰삭아서 나오는 소리
아지직, 햇볕 바스라지는 가지 끝으로
소리길 열리는 대로 소리가 났다
모든 원시의 악기는 몸이다
강바닥에 묵음이 깔려 있다
대숲 깊이 어둠이 숨어 있다
하늘을 들인 연못
숨구멍 닫힐 때까지
숙성하는 몸의 소리
구멍난 겨울을 호다
김인숙
옷이 부풀어 올랐다 12월의 달력에 구멍이 나고 속에서 빠져나온 마음이 걷혀서 패당은 풍성처럼 부풀고 날마다 십구공탄이 줄어드는 처마 밑으로 바람은 한 땀 한 땀 겨울을 꿰매고 서쪽으로 난 바람벽이 허전하게 비어갈 때
어머니는 양말을 깁고 있었다 구멍 난 뒤꿈치를 동그랗게 도려내고 알전구를 밀어 넣으면 맑은 유리 안에선 끊어진 필라멘트가 언니의 창백한 입술처럼 하르르 떨고 양말목에서 잘라 온 자투리 천을 알전구 위어 이어 붙이면 씨름판처럼 둥근 경계가 생기고 누구도 등판을 엄두내지 못할 때
손도끼를 든 아버지는 강으로 나가 얼음장을 찍어댔다 도끼자루보다 깊은 얼음구멍이 나고 구멍 속으로 내려진 낚싯줄 위쪽의 찌는 바르르 물살을 일구고 주낙을 물지 않는 한나절 붕어는 오지 않고
언 땅에 태어난 여자는 걸어도 걸어도 겨울 속에 있었다 속으로 피운 동백 붉은 꽃잎 지우려 숭숭 가슴에 구멍이 나고 겨울의 갈쿠리가 드나들고 호호 손가락을 불며 가슴 가운데 구멍의 경계를 호는 여자의 손이 춤추는 눈발을 닮아가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며 구멍 난 겨울을 송송 호는 눈발, 눈발들 춥다 추워서 틔우는 송송 숨구멍만 남기고
겨울 끝을 향하는 시선들이 구멍 난 겨울을 송송 혼다
자라지 않는 햄스터
김인숙
지금이 좋아요, 당신의 손 안에 쏙 들어가는 몸, 더는 자라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손바닥이 참 따뜻하고 포근해요, 내 방은 너무 어두웠어요, 홀로는 외롭데요, 밤에만 흐르는 피가 식고 있어요, 다리가 짧은 나는 보호가 필요해요, 둥근 내 귓바퀴로 곤한 당신의 손금을 달랠게요, 믿음직한 엄지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문질러 주어요, 검고 굵은 눈망울로 당신을 쳐다볼게요, 당신의 전신이 내 눈 속에 들어오는 걸 허락할게요, 먹이를 주면서 당신은 나는 길들이고 난 당신의 부드러운 비단털쥐가 되고, 성장을 멈추는 것은 몸의 생존전략이라고 누군가 말했어요, 전략이라는 말 좀 섬뜩하지만 든든하지요, 이제 송곳니가 가렵지 않을 거에요, 불룩한 볼주머니에 당신의 체취를 차곡차곡 쟁이는 지금이 좋아요, 어둠 물속이 아닌 당신의 열린 수중手中이 좋아요, 철망을 만든 자는 철망 밖에 갇히잖아요, 내습성은 깨끗해요, 벽에 오줌 같은 건 내갈기지 않아요, 나는 당신의 하나뿐인 햄스터
갈피
김인숙
너를 잡을 수 없어
나는 어지럽다
한 걸음 따라가면
두 걸음 도망가는,
보일 듯 생생하게
숨은 나를 찾지 못해
한여름 대낮에도 나는 헤맨다
바람을 연주하며 나부끼는
흑마와 갈기 같은
시의 갈피여
거울
김인숙
들이니까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 당신 속에 들여
조건 없이 사람을
환하게 밝히니까 거울이다
구름 걷히는 중천에
만월로 떠오르는 얼굴
둥글게 비추니까 거울이다
부족함도 더러 있는 우리를
다함 없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비추니까 사랑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비친 대로 깎고 다듬어 스스로
문득 새 얼굴로 마주서는 아침은
훤칠하고 환하다, 위대하다
우물에 잠긴 별들이
툭툭 머릿결 털고 나온 밤
제 얼굴을 닦고 또 닦아
사랑받는 사람들이 몸을 반짝인다
등 굽어 품 너른 어머니
비추어 세상을 세상으로 만드는
거울은 사랑이다
수세미를 읽다
김인숙
헝클어진 사자머리,
가까이서 보면
얼기설기 거미줄,
뼈대의 자존심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천성이 부지런한 그녀는
자신의 뼈를 깎으며
남의 허물 닦아주고
씻어주기를 좋아한다
묵은 때나 찌든 때나 할 것 없이
누군가 덮어
세상에 앉힌 더께를 모두 벗긴다
뽀득뽀득 닦아준다
엉성하고 헝클어진 몸이
영락없는 보살이다
그래도
난해한 그녀의 자존심을 읽기란
미로를 걷거나
그믐밤에 더듬더듬 산길을 걷는 것 같다
깎이면서 지켜가는 자존의 미로
망요忘腰*
김인숙
예곡에서 우곡 가는 도진곡 길목은 없는 듯이 있고 있는 듯이 없다, 손대지 않은 풀잎 따라 나뭇가지 사이로 구름처럼 오르면 산죽 자욱한 능선이고 안개처럼 내리면 개흙 검은 벙 넓다, 긴 허리 펴고 서 있는 어머니 먼 모습, 묻힐수록 편해 가물가물 피는 저녁연기, 산그늘도 물러 편하긴 매한가지, 숨 가빠 가슴 편해 달려 오르며 뛰어내리며, 아 어머니 허리를 잊다, 그 시절 세상 잊은 세월을 잊다
* 망요 :《장자》에 나오는 말. ‘허리를 잊다’라는 말로서 ‘허리에 꼭 맞는 허리띠를 하면 허리띠를 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만큼 편하다’는 것을 의미함
동그라미만 믿었다
김인숙
카메라가 앵글을 잡자 조명이 들어왔다 조명 밖의 그가 엄지와 검지 끝을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고 사뿐, 위로 치켜들었다 찰나의 단검을 집어든 나의 오른손이 냅다 달렸다 미끄러지는 빛의 동그라미를 따라가 중심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깜깜한 가운데 따뜻한 것이 흘러내려 어둠을 흥건히 적셨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동그라미만 믿었다 곧 막이 내렸다 젖은 어둠이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물맛
김인숙
목이 마르다는 것은 뿌리가 시든다는 것이다
미세먼지가 도시의 전신을 접수한다
생수를 사면서 마트 유라리창을 통해서 보았다
수면무호흡증을 앓는 풀들이 마른입을 벌리고 있었다
새들의 날개에서 불티같은 가루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도 붙들어주지 않는 땅은 사막이 되었고
춤추는 바람은 모래의 뼈가 되었다
어류에서 진화한 기억력이 나쁜 물의 자식들은 단명으로 끝난다
내장을 훑어 내리는 마당가 샘물
이가 시리게 푸른 물맛은 고서古書 속에만 있다
수요일은 물의 날
하초가 약한 풀이여, 새여
물을 찾아라, 찾아서 마셔라
능소화 덩굴처럼 뿌리 끝의 혀가 들판 멀리 뻗어 나가면
오래전 물맛을 만날지도 모른다
밤마다 당신을 받드는 도래샘이 있는 한
물맛을 몰라도 목숨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빈 펫트병
김인숙
젤리피시*의 투명한 몸은 생존의 전력이다
맨몸은 아무도 탐하지 않고
식탐이 속살을 노리는 사냥꾼의 본능이라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태생적 흡충이다
생수를 마신다
병 주둥이에 입을 갖다 대고
뿌리가 빠져나올 때까지 빨아 마신다
두눈박이 좀매미는 날아가고
투명한 껍질만 남았다
다시는 꽃피울 수 없는
가는 바람에도 쓰러져 나뒹구는 빈 껍질
누가 와서 발로 으깨어
뭉개진 몸을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는 아침
남들은 시작일 때 끝에 와 있는 사람이 있다
할 말이 모두 빠져나간 구겨진 몸에는
주름살 긴 길들이 엉겨 있다
젤리피시가 못된 몸들이 수거되어 머무는
서대신동 외진 구 도로의 효병원이 문을 연다
*투명 물고기의 일종, 해파리
싱크홀
김인숙
허공은 건재하고 날개 차는 샤는 추락하지 않는다
바다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멀쩡한 항로의 맹골수도
딛고 선 선실 바닥이 뒤집혀 가라앉는 것을 보고
불안은 가슴이 아니라 발바닥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썼다가 버리는 편지처럼 밤쯤 찢어져 나가는 세상은
겨울, 무 구덩이 입구처럼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 깊은 물의 들숨은 진공청소기다
한 열흘 허기진 자가 음식을 들이마시듯이
검은 심해는 막무가내 빨아 당기고
우리가 놓아버린 마음이 느닷없이 꺼져 내린다, 놓친 막차처럼
늦은 불안이 종종걸음 치는 공로로 우화하고 있다
해저로 내려앉은 아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데
먹장구름이 여기저기 망각의 구덩이를 만들면서 자꾸
잊으라 한다, 믿던 도시의 종기는 깊고
눈앞의 가상이 움푹움푹 가라앉는다
속이 허하면 입이 만들어진다는데, 잊지 말고 말해야 한다
소리 질러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숨을 모아
손톱이 빠지도록 벼랑 끝을 붙들고 기어올라야 한다
꿈은 날개에 대한 동경과 다르지 않다
허공은 건재하고
날개 없는 사람들만 검고 깊은 구덩이 침강하는 것이다
예고 없이 오는 이별이 모두 절러 것이라 생각되지만
다는 침몰하지 않기 위하여
힘차게 날갯짓하는 새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펄펄 날아 어둠의 구덩이를 건너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둥근 입으로 자동차가 회돌이로 빨려 들어가고
자동차 안의 사람들이 꽃씨처럼 쏟아져 내리고‘
대형 마트 건물이 기우뚱 미끄러져 묻히는
땅의 세찬 들숨이 지나간다
* 땅의 지반이 내려앉아 생기는 원통, 혹은 원뿔 모양의 구멍.
너라는 정물
김인숙
어둠이 흔들렸습니다
바람이 지나갔습니다
요란한 꽃들의 소란이 끝났습니다
무거운 것은 자신을 허물어 가벼워지고
세상의 가벼운 것들만 나비가 되어 날아갔습니다
엉성한 빗방울을 몰고 온 가을이
무너진 단풍잎을 밟고 올 때처럼 쓸쓸히 가버리면
꿰맨 시간의 솔기에 숨은 검은 물이 빠질는지요
자우는 자신 안에 있다는 말 한 마디
붙들고 처음 뿌리 내린 자리에
나는 처음 그대로 있습니다
당신이 너라고 부르는
나는 간절한 정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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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많은 별들이
도시의 하늘에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이다
팔을 뻗어 장사 해변의 밤하늘을 걷어 와
맑고, 어진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길은 안개에서 시작하였으므로
길의 끝가지 가 본 사람은 누구도 없다
문득,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분들께
붉게 익어 겨울 지난
망개 열매 하나씩을 드리고 싶다
2016년 5월
김인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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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詩集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 해설 ] -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겸허한 찬가
진순애(문학평론가)
1.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찬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찬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예의이며, 그것은 인간의 숭고한 정신이 표현되는 행위다. 현대는 아름다운 것이 소멸한 혹은 아름다운 것을 상실한 시대이므로, 아름다운 것을 찾아가는 시선이 값질 뿐만 아니라 숭고하기조차 하다. 김인숙의 이번 시집이 보다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 것이 소멸하고 아름다운 것을 상실한 현대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예의도 소멸한 시대인 까닭에 아름다운 것으로서 불멸성에 대한 김인숙의 찬가가 숭고한 빛을 뿜어낸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겸허한 행보인 까닭에 더욱더 그러하다.
인간의 숭고한 정신 혹은 숭배의식은 우주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외경에서 비롯된 원시인들의 금기문화에서 유래한다. 원시인들에게 우주자연은 신적인 것을 대변했듯 우주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낳은 원시인들의 금기문화에서 숭고미를 찾는 것은 인문학의 근원이 원시인들의 금기에 있음을 방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과학기술 시대의 우리는 원시인들의 금기문화를 미신이라고 치부할 것이나, 레비 스트로스는 ‘금기가 동물적인 섹슝얼리티와 인간의 그것을 가른다면, 신화와 언어로 의해 인간은 인간이 된다’고 했다. 원시인들의 금기 그리고 원시인들의 숭배의식이 있어서 인간은 동물적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금기의 신화 혹은 금기 위반의 신화로 인해 인간은 문명의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레비 스트로스의 담론은 ‘숭배의식이야말로 인간을 동물적인 섹슈얼리티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에 이른다.
찬가에 실린 숭배의식은 과학기술주의 시대에도 시가 현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방증하는 일이듯 현대에 이르러 숭배의식의 발현은 오직 시장르만의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경의 대상이었던 생명체의 근원세계가 그 뿌리마저 파헤쳐진 지 오래이므로, 이제 영원성의 상징계였던 근원세계는 더 이상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초월이 부재한 시대에 불멸성을 노래하는 시는 시의 초월적 본분을 굳건히 지키는 일로써 숭고성과 함께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시의 역할이야말로 이 시대 시의 현존성이므로, 여기에 불멸성에 대한 김인숙의 찬가가 그리고 찬가로서의 예의가 숭고미조차동반하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길을 떠나는 자에게 돌아올 곳이 있음을 각인시켜주는 것과 같은 시장르만의 특별한 위의를 김인숙의 시가 대변하고 있는 것과 같다.
2. 봄에 대한 찬가
꽃은 피어서 청청 푸른 산으로 간다
가서 누운 꽃은 돌아오지 않고
담장 이쪽의 집은 담장 너머의 집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유를 만나 자유를 넘거나
사랑을 놓치고 탕탕 총을 쏘듯
봄꽃을 피운다, 해마다
떨어진 꽃은 다시 피어서 돌아오고
이 세상, 저 세상, 구만 구천 세상을 합하여
세상 속의 것들은
다만 옮겨갈 뿐 소멸하지 않는다
오늘
집을 떠나 광장으로 가는 당신의 사랑은 영원하다
개울의 반짝임은 사라지지 않고 들판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봄에 만난 숲은 봄 속에 있고, 늙지 않으면서
봄철을 산다
사람들의 사랑은 날마다 살아 있고 오늘이 내일인
의자는 시간의 밥이란 걸 아시는지
따뜻한 통로를 지나는 무동력의
낙화는 불멸이며, 자유인 것을
꽃은 아시는지 피어서 하늘 끝 푸른 산으로 간다
불타는 불길이 청청 불길을 탄다
-「봄에 불멸을 만나다」 전문
‘봄에 불멸을 만난다’는 명제는 인류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비례하여 참신하지 않다. ‘참신하지 않다’기보다는 ‘참신할 수 없을지’라도 이와 같은 보편성의 명제는 우리에게 ‘근원에 대한 혹은 근원의 존재성에 대한 본질을 재고하라’는 강력한 힘과 같으므로 참신성을 초월한다. 그것은 불멸성에 대한 예찬을 방증하는 일인 까닭에 그러하며, 현대가 더 이상근원적인 본질에 대한 사유가 무의미한 시대로 전락한 까닭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비록 우리에게서 잊힌 사유의 세계일지라도 그 세계가 ‘아직은’ 소멸하지 않은 혹은 소멸할 수없는 궁극의 세계이므로, 혹은 김인숙의 지적처럼 ‘해마다 떨어진 꽃은 다시 피어서 봄에 돌아오므로’ 봄은 불멸의 계절이자 우리를 불멸의 근원으로 유인하는 숭고한 부활의 계절이다.
해마다 부활하는 봄이 불멸의 계절이듯 ‘세상 속의 것들도 다만 옮겨갈 뿐 소멸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이에 더하여, 불멸의 봄으로 인해 ‘집을 떠나 광장으로 가는 당신의 사랑조차 영원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불멸의 봄에 대한 찬가 또한 소멸할 수 없다. 반복되는 찬가일지라도 그것은 반복의 찬가를 넘어서는 불멸의 탄생이요 부활이다. “개울의 반짝임은 사라지지 않고 들판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고 반복적으로 노래해야만 하며, “봄에 만난 숲은 봄 속에 있고, 늙지 않으면서/봄철을 산다”는 사실을 새삼 재고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함으로써만 ‘사람들의 사랑도 날마다 살아 있는 사랑’이 되는 까닭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낙화를 불멸로 소생시키는 봄’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예찬되어 마땅하다. 예찬의 노래 속에 불멸의 봄에 대한 김인숙의 숭고한 예의가 함께해서 ‘봄조차 숭고하다’는 아름다운 패러독스를 낳는다.
손등이 따뜻하다 살 위로 배추벌레가 기어가고 가물가물 소름으로 돋는 추위가 빠져 나가고 날아오르는 새의 깃털이 바람결에 날리고 봄볕 따슨 풀밭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호수 같은 무릎베개에는 만수의 잠이 차오르고 아지랑이와 새털구름과 물비늘을 버무린 열무김치 시원한 국물이 찰방거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얼굴을 만지다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끌려 나는 자꾸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봄은 가파르게 무르익고 나는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들판의 일부가 되었다
새의 혀 같은 연록의 잎들이 몸을 흔들어 반짝이는 빛살을 쓰다듬고 가려움을 탄 빗살들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떨어지고 여린 바람 한 줄기 지나가고
곱고 부드러운 손들이 들판 가득 저보다 더 부드러운 봄볕을 자꾸 쓰다듬는 한낮 어머니의 딸이 어머니가 되어 만지고 쓸어내리고 쓰다듬는 배꽃 하얀 잎들이 꿈에 들어 꿈결 같은 봄볕이 되고 있다
-「봄볕을 쓰다듬다」 전문
불멸의 봄은 ‘살 위로 배추벌레가 기어가고 날아오르는 새의 깃털이 바람결에 날리며 따슨 어머니처럼 온다’고 김인숙은 예찬한다. ‘따슨 어머니처럼 오는 부활의 봄’에 ‘새의 혀 같은 연록의 잎들이 몸을 흔들어 반짝이는 빛살을 쓰다듬고 가려움을 탄 빗살들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떨어지고 여린 바람 한 줄기 지나가는 봄날에 배꽃 하얀 잎들이 꿈에 들어 꿈결 같은 봄볕’이 부활한다. 봄이 꿈결이고, 꿈이 봄볕이다. 봄이 가파르게 무르익은 날에 김인숙은 그리고 김인숙의 찬가로 인해 우리는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들판의 일부’가 되면서 숭고한 꿈결의 봄과 일체가 된다.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얼굴을 만지다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끌려 나는 자꾸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김인숙의 잠의 근원도 따뜻한 봄의 손길에 있다.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들판의 일부가 되어 잠들’수 있는 요인도 ‘가파르게 무르익어가는 꿈결의 봄날’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문명세계를 등지고 들판의 일부가 되어서 불멸의 봄날을 예찬하는 시심은 겸허하다. 그것은 겸허한 외경심이다. 겸허한 외경심 뒤에서 영원에 대한 김인숙의 숭배의식을 읽는 것 또한 찬란한 불멸의 봄날이 낳은 유인력이리라.
3. 어둠에 대한 찬가
황홀한 색깔 춤은 끝났다
새가 둥지에 든
나무마다 어둠을 풀어내고
어스름에 젖는 강이 어디론가 걸어 들어가고 있다
노크는 없었다
문이 닫히고 소리가 사라지면서
인도교 아래
혼곤한 평화가 이슬비처럼 흐르고
새벽을 예비하기 위하여 별 몇 개가 떴다
아찔한 대낮, 격정의 시간
아름다운 색깔들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모두 잠들어야 한다
잠든 채 역사를 건너기 위해
잠보다 깊은 망각에 들어야 한다
담장을 넘던 능소화도 어스름에 젖어
어둑어둑 증발하고 있다
-「어스름에 젖다」 전문
어둠은 모든 색깔을 그리고 형상을 잠들게 한다. 그러므로 “나무마다 어둠을 풀어내고/어스름에 젖는 강이 어디론가 걸어 들어가고”, 그리하여 ‘인도교 아래 혼곤한 평화가 이슬비처럼 흐르고 새벽을 예비하기 위하여 별 몇 개가 뜨는 밤’이 온다. ‘담장을 넘던 능소화도 어스름에 젖어 어둑어둑 증발하는 시간’, ‘이제 우리도 모두 어스름에 젖어서 잠들어야하는 시간’이다. 잠들어야 하는 시간 속으로 ‘아름다운 형상의 색깔들이 사라졌어도’ 그것은 만개를 위한 휴지일 뿐이다. 어둠의 휴지 속에서 코스모스를 위해서 카오스가, 카오스를 위해서 코스모스가 순환하는 우주의 원리를 확인한다.
만물이 잠들고 우리도 잠들어야 하는 시간은 어스름이 가져온 우주의 시간이므로, 잠은 우주이고 우리도 우주이다. 영원의 근원에 대한 김인숙의 찬가 뒤에서 우주자연의 일부임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환기와 함께 ‘새벽을 예비하기 위한 숭고한 별’조차 만난다. 새벽을 예비하고 아침을 예비하는 별이 빛나는 어둠에 대한 찬가는 겸허에서 비롯된 숭배의 통로이다. 외경의 자연 앞에서 겸허로써 빚은 인간의 혹은 김인숙의 숭배의식이 찬가로 울리며 숭고미로 고양된다.
물을 열고
보름달이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보름달은
얼굴이 훤하게 밝고
강물은 스르르 전신이 고요하다
물을 연다는 것은 고요를 여는 것이다
고요를 연다는 것은 고요 속에 빠지는 일,
물의 가장 낮은 아래에 좌정하는 일이다
열린 물도
들어가 앉은 보름달도
서로가 편안한 밤
수면에 쏟아진
달빛 가루만 별처럼 재잘거리는데
지고 온 무게를 벗은 보름달이 해탈이다
속이 거북하지 않은 강물이 적멸이다
-「물을 열다」 전문
“물을 열고/보름달이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는 카오스의 풍경도 어둠이 만든다. 보름달이 들어가도록 물을 여는 주체가 어둠인 까닭이다. 우리가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봄 들판과 하나 되듯 보름달도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강물과 하나 된다. ‘강물은 스르르 전신이 고요하다’하듯 어둠은 강물조차 ‘고요 속에 빠지게 한다.’ 어둠이 고요고 고요가 어둠이며 어둠의 강물도 고요고 강물 속의 보름달도 고요다. 어둠의 고요가 있어서 빛의 소요가 소요롭다. 빛과 어둠, 고요와 소요가 우주의 한 쌍이듯 모두 어둠의 고요 속에서 아름다운 일체가 된다.
그러므로 “열린 물도/들어가 앉은 보름달도/서로가 편안한 밤”에 “수면에 쏟아진/달빛 가루만 별처럼 재잘거리는데” 이것이 ‘해탈’이라는 선언도 겸허하다. ‘지고 온 무게를 벗은 보름달이 해탈이고, 보름달을 품은 강물이 속이 거북하지 않은 적멸’이 해탈이다. ‘인간의 해탈은 보름달을 품은 강물 속에서 혹은 만물을 품은 어둠의 고요 속에서 빚어진다’는 메시지가 ‘해탈을 위하여 어둠 속에 잠기라’고 유인하는 어둠의 힘이다. 어둠이 유인하는 불멸의 메시지다.
4. 성찰적 찬가
들판 가운데 연못에 하늘이 들어와 있다
차르르 주름 잡히는 물무늬 아래 오리처럼 떠가는 구름들
침잠하는 부레에서 빠져나온 물방울 같은 말들이
바글바글 비누거품처럼 부풀고 있다
하늘빛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말의 내력을 들여다본다
가득차서 씹지도 뱉지도 못하는 입안에서
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 고백이 있었을 것이다
불두화처럼 피는 개구리 알집이 천의 눈동자가 되어 반짝여도
창과 창을 마주내지 않는 한 세상은 언제까지나 깜깜했을 것이다
패랭이꽃 같은 여자가 방파제 끝에서 흐느끼고 있다
흐린 날의 눈을 보는 눈 있는 사람들은
산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여 볼 것이다
보는 눈이 무서워 차마 날려 보내지 못하고
입안에 가둔 눈물의 등뼈를 은밀히 가늠할 것이다
말도 진실하면 젖어드는데
동굴에서 울려 나온 듯 광장 같은 눈으로 푸르게 응답하는
거기 물 아래, 하늘 아래
눈 속에 들어가 자리 잡은 당신과 나, 우리들 눈으로 오가는 말
부풀어 오른다고 해서 모두 꿈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의 말을 주고받으며 황토 들길을 가는 사람만이 사람인 것을 안다
앞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개구리의 눈알은 구슬처럼 굵고
말로써 생각을 모두 전할 수는 없는 일이라
들판 가운데 연못에 들어와 앉은 하늘의 옆구리를
오늘은 쿡쿡 찔러본다
-「목어目語 1」 전문
‘들판 가운데 연못에 하늘이 들어와 있고, 차르르 주름 잡히는 물무늬 아래 오리처럼 떠가는 구름들’ 그리고 ‘침잠하는 부레에서 빠져나온 물방울 같은 말들이 바글바글 비누거품처럼 부풀고 있는’ 연못 풍경이 ‘말의 내력’이라는 말에 대한 김인숙의 성찰을 읽는다. 그것은 근원이 낳은 인간으로서의 성찰이다. 그러므로 근원세계에서 비롯된 말의 내력일지라도, “말로써 생각을 모두 전할 수는 없는 일이라/들판 가운데 연못에 들어와 앉은 하늘의 옆구리를/오늘은 쿡쿡 찔러본다”는 전언에서 말로써 하고자 하는 말을‘모두 전할 수 없는’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성찰을 확인한다.
비록 “하늘빛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말의 내력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그 말을 “가득차서 씹지도 뱉지도 못하는 입안에서/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 고백”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인간다움이자 인간의 한계에 대한 확인이다. 그러면서도‘말도 진실하면 젖어듦’으로“사람의 말을 주고받으며 황토 들길을 가는 사람만이 사람인 것을 안다”는 명제 앞에서 ‘사람의 말’과 ‘사람의 말이 아닌 말’을 구별해야한다는 당위를 만난다. “흐린 날의 눈을 보는 눈 있는 사람들은/산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여 볼 것이다”에서도 ‘눈을 보는 눈 있는 사람들’과 ‘눈을 못 보는 눈 없는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는 당위를 확인한다. “말도 진실하면 젖어드는데/동굴에서 울려 나온 듯 광장 같은 눈으로 푸르게 응답하는/거기 물 아래, 하늘 아래/눈 속에 들어가 자리 잡은 당신과 나, 우리들 눈으로 오가는 말”처럼 ‘진실한 말’ 혹은 ‘진실한 사람의 말’이란 ‘말의 말’이 아니라 ‘눈으로 오가는 말’에 있다는 김인숙의 은밀한 밀어가 말의 내력에 대한 혹은 말 없음의 말에 대한 예찬을 겸허히 내재하고 있다. 거기에는 숭배의식이 잠입해 있는 까닭에 겸허하다.
“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자유의 뼈를 만질 것이라/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안으로 걸린 빗장을 열지 못하는 것은/잉크 색의 푸른 피가 아직 흐르고 있어서이다/…(중략)…/얇은 창유리 오종종하게 내어/뒤늦은 말문 열어놓고 말없이 바라보는 그녀/곤한 얼굴에 내려앉은 별빛이 천연 염색되는 저녁/긴 낮을 지나와 시든 손바닥으로/지상의 그녀가 천상의 푸른 별을 곱다고 쓰다듬는다”(「자주달개비의 문2」부분)는 자주달개비의 푸른 이미지도 ‘말의 말’이 아니라 ‘말문 열어놓고 말없이 바라보는’ 침묵의 내력을 예찬하는 메시지를 함유한다. 그것은 ‘말의 말’을 초월하는 목어目語와 같은 침묵의 말로써 우리를 성찰에 이르게 하는 그리고 예찬되어 마땅한 아름다운 불멸의 세계라는 김인숙의 찬가이다. 그것은 겸허를 낳는, 김인숙의 예찬 속에 내재된 숭배의식의 본원이자 존재의 본원이므로, 되풀이하여 성찰적으로 예찬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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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눈을 감고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들면
별똥별이 가물거렸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을 감아야 보인다.
시의 말은 순수의 투명한 결정,
눈물 직전의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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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숙 시인∥
∙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 시집『꼬리』『소금을 꾸러갔다』가 있다.
∙〈신라문학대상〉〈한국문학예술상〉〈농어촌문학상〉대상, 〈경북작가상〉등을 수상했다.
∙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현재 경북문인협회 사무국장, 구상문학관 시동인〈언령〉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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