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무오사화로 더 강해진 왕권, 연산군의 국정문란
무오사화 이후 비판과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기능을제대로 하지 못했고, 국가 재정도 엉망이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부족한 국고를 채우려고 했다. 우선 공물의 수량을 늘리고 공신에게 지급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훈구파가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궁중의 소비를 줄이고 왕의 무절제한 생활에 제동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난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때맞춰 연산군의 난정을 부추기는 일군의 세력이 등장했는데, 바로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의 궁중파(宮中派)였다. 임사홍은 예종·성종과 사돈을 맺은 외척이었지만 간교한 성격 때문에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연산군을 만나 드디어 기를 펴기 시작했다.
왕이 크게 기뻐해 (임사홍을) 급히 숭품(崇品)에 발탁, 아무 때나 불러보았으며, 무릇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묻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사홍이 부름을 받으면 반드시 미복(微服)으로 어둠을 타 편문(便門)으로 들어갔고 왕은 항상 내 벗 활치옹(豁齒翁)이 왔다했으니, 아마 사홍이 이가 부러져 사이가 넓었기 때문이리라.
- 『연산군일기』 63권, 연산군 12년 9월 2일
임사홍은 연산군이 훈구파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연산군을 부추겨 훈구파는 물론이고 사림파까지 모두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연산군에게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사사와 관련한 일을 고하고, 이와 관련된 인사들을 숙청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을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함께 도모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부인인 신 씨의 오빠였다. 그는 임사홍과 결탁해 연산군 주변에서 권력의 부스러기를 독식하려고 했다.
어머니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받은 연산군
폐비 윤 씨가 성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은 것은 1482년(성종 13) 8월이었다. 당시 사약을 마신 윤 씨는 죽기 직전에 피를 토하고 피 묻은 손수건을 친정어머니 신 씨에게 건네며 “원자가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써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라”고 했다. 아들 연산군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 복수를 부탁하는 유언이었다. 임사홍은 피 묻은 손수건을 신 씨로부터 건네받아 연산군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윤 씨의 폐비와 사사 과정을 낱낱이 고했다. 연산군은 손수건을 안고 밤낮으로 울었다.
사실 폐비 윤 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연산군도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성종은 생전에 세자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었다. 그래서 연산군은 왕이 될 때까지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이 되자 더 이상 비밀은 없었다. 우연히 사초를 열람한 연산군은 생모 윤 씨의 존재와 비극적인 종말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연산군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당장 문제를 들춰내지는 않았다. 폐비의 사사에 가담한 인사들의 이름을 파악한 연산군은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생모의 죽음과 관련한 일을 가슴 속에 묻고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런데 새삼 임사홍이 이 일을 들춘 것이다. 연산군은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훈구파를 혼내주고 왕의 위엄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그동안 연산군이 절대 왕권을 추구해왔다고는 하지만, 조정에는 왕을 업신여기는 풍조인 능상지풍((凌上之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종 대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언관의 발언권 역시 건재했다. 물론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홍문관을 혁파해 언관 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을 전후해 대간의 기능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만큼 연산군의 입지도, 폭도 좁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가 왕으로부터 받은 회사배(回賜杯)를 쏟아 연산군의 옷을 적시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존의 옷자락을 술로 적시는 일은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판서라도 이러한 무례를 범한 이상 죄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신이나 대간 중 어느 누구도 이세좌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세좌의 위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 다. 이에 연산군은 분노했다. 권신의 위세에 눌려 국왕의 체모를 돌아보지 않는 풍조에 격분한 것이다.
연산군은 “예조판서 이세좌가 잔을 드린 뒤 회배를 내릴 때 내가 잔대를 잡았는데, 반이 넘게 엎질러 내 옷까지 적셨으니 국문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자 승정원에서 추국하라는 전지를 써서 올렸는데, 연산군은 그 안에 “소리가 나도록 엎질러 어의까지 적셨다”는 말을 더 써넣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로 당장 이세좌를 무안으로 귀양 보내면서 덧붙이기를 “이세좌가 배소(配所: 귀양지)에 이르는 날짜를 자세히 아뢰라. 거느리고 가는 관원이 사정이 있어 반드시 독촉해 가지 않을 것이니, 서울을 떠나는 날짜도 함께 자세히 아뢰라. 혹시라도 지체해 늦는 일이 있으면 중한 죄로 논하리라”고 했다. 왕을 능멸한 것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 또한 이세좌의 아들들도 모두 파직시켰다.
그런데 연산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세좌를 사면시켜주었다. 그러면서 “이세좌는 죄를 정한 지 오래지 않으니 지금 놓아주는 것이 빠를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학식이 있고, 또한 이미 스스로 징계했을 것 이며, 은혜를 반포하는 때이므로 특별히 놓아준다”고 했다. 사면된 이세좌는 대궐 단봉문(丹鳳門)에서 사은했다. 연산군은 술잔을 내리면서 “이 술잔은 네가 전날 쏟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홍언충(洪彦忠)이 후궁 간택에 불응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대신이 왕명을 거역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홍언충의 아버지인 홍귀달(洪貴達)이 도리어 아들을 적극적으로 감싸고 나섰다. 이에 연산군은 지난번에 이세좌를 너무 일찍 사면시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며 이세좌를 다시 귀양 보냈다.
이세좌의 죽움, 회오리 치는 숙청의 폭풍
연산군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결국 임사홍의 고변을 기회로 즉위 초부터 참아왔던 폐비 윤 씨 관련 사건을 터트렸다. 공교롭게도 연산군을 능멸했던 이세좌가 이 사건에도 관련돼 있었다. 사사 당시 약사발을 들고 간 사람이 바로 이세좌였던 것이다.
이세좌가 폐비 윤 씨의 약사발을 들고 갔던 날의 일이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부인 조 씨가 “조정에서 폐비를 논하더니 결과가 어찌 되었소?” 하고 물었다. 이세좌가 “오늘 이미 사약을 내렸고 내가 봉약관(奉藥官)이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놀란 조 씨가 “슬프다. 우리 자손의 씨가 마르겠구나. 어머니가 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아들이 어찌 다른 날 보복하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했다. 이 말대로 결국 이세좌는 유배지로 가던 길에 자살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또한 그의 아들들은 물론이고 동생·사촌·종손 등 여러 종친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숙청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제1차 숙청 대상은 성종의 후궁이었던 소용 엄 씨와 정 씨였다. 연산군은 두 여인을 끌어내 궁정에서 가차 없이 처벌한 다음 그자식들도 남김 없이 죽였다. 폐비의 실질적인 장본인인 소혜왕후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을 보자.
임금이 성을 내어 엄 숙의와 정 숙의를 때려죽이니, 소혜왕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폐주가 자신의 머리로 몸을 들이받았다. 이에 왕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눕고 말하지 아니했다.
- 『연려실기술』 6권, 연산조 고사본말
이러한 기록으로 연산군은 자기 분을 못 이겨 부왕의 후궁들과 친할머니까지 제 손으로 죽인 패륜아로 후대에 각인되었다. 제2차 숙청 대상은 훈구파 신료들이었다. 연산군은 폐비논의에 참여했던 정승, 폐비와 사사 당시의 재상, 그리고 사사를 권한 자와 사사를 집행한 자를 빠짐 없이 색출해내라고 명했다. 임사홍은 배후에서 연산군의 분노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훈구파와 사림파를 몰아내려는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켜나갔다.
극형, 부관참시, 주춤한 사림파
결국 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한명회・정창손・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김승경(金升卿)・이세좌・권주(權柱)・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은 12간(十二奸)으로 지목되어 극형에 처했다. 이들 중 이미 죽은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이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특히 이세좌는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까지 거의 몰살되다시피 했다. 한편 후궁 간택을 거부했던 홍귀달은 교형에 처했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훈구파를 제거한 임사홍은 여세를 몰아 사림파에도 탄압을 가했다.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일차적인 이유였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림파가 잔존하는 이상 자신의 독주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임사홍은 사림파가 국사를 비방했다고 무고해 폐비 사건과 동일한 범주로 처리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미 무오사화에서 화를 입은 박한주(朴漢柱)・이수공(李守恭)・강백진(康伯珍)・이총(李摠)・최부(崔溥)・이원・김굉필・이주・강겸(姜謙)이 유배지에서 사형되었다. 또한 이미 죽은 정여창(鄭汝昌)・조위(曺偉)・남효온은 추가로 죄를 입었다.
이것이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6년이 지난 뒤인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무오사화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구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갑자사화는 궁중파와 부중파(富中派) 사이의 세력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림파는 한동안 중앙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또한 사림의 성장이라는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