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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양털깍기
프레드릭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까지 한국에 살면서 한국 경제 부흥기에 대규모의 여러 토목 건설 프로젝트에 관여했다. 직급은 경제전문가에서 수석경제전문가로 진급했고 재산도 상당히 모았다. 경력이 쌓이면서 연봉은 수직 상승했고 그동안 계약 성사에 따른 보너스가 엄청났다. 사내 연예로 한국에 파견 나온 여직원과 결혼을 하고 슬하에 아들, 딸 하나씩 남매를 두었다. 2000년이 되기 전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여유롭게 은퇴생활을 하고 싶었다. 1996년에 은퇴 준비를 위해 날씨가 따뜻한 마이애미에 대지를 구입해 저택 건설을 계획했다. 스페인산 오크를 사용한 유럽식 디자인으로 2,000평 규모다. 영화관, 게임룸에는 당구대와 아케이드 게임기, 수영장, 테니스장, 피트니스룸, 사우나실,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사무실 겸 서재, 와인 저장고, 거실 가운데에는 검정색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놓을 계획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그랜드 피아노는 빠질 수 없었다. 저택 건축기간은 2년으로 잡았다. 프레드릭은 회사에다 1998년에 은퇴하겠다고 얘기했고, 그가 은퇴전 마지막으로 맡은 일은 프로젝트명 ‘양털깍기’ 였다. 그동안 한국에서 대규모 토목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주로 상대했지만 이번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상대해야 한다.
1995년 미국 뉴욕의 페닌술라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비밀리에 미팅이 있었다. 미팅 참가자는 4명 캉드쉬(IMF 총재), 티모시 가이트너(미국 재무부 차관보), 조지 소로스(퀀텀 펀드 운영자), 샘 오웬(토탈의 사장)이다. 속기사 2명만이 대동해서 회의록을 작성하고 속기사는 사전에 서약서를 작성했다. 속기 내용을 외부에 절대 알리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단 한 번의 속기업무로 그들은 한 명당 5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외부에 정보를 누설 할 시에는 받은 돈의 200배를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국제 자본을 차관해서 한국의 경제는 6.25전쟁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성장을 일궈냈다. IBRD, IMF, 미국 재무부, 대규모 펀드 운용사, 경제 컨설팅 회사는 전 세계를 무대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아주 긴밀히 협력했다. 이번 뉴욕의 미팅은 한국에 대한 그들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경제 성장기 동안 한국 기업들의 외채총액 중에서 단기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졌다. 1997년 말에는 그 비율이 63.5%까지 올라갔다. 한국의 단기부채 상환시기를 예고 없이 급격하게 앞당겨서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바닥낼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대규모 펀드의 투기 자본으로 한국 금융시장을 교란시켜서, 단기 유동성 부족의 여파를 한국내의 거의 모든 기업들에게 전파, 확대시킨다. 그렇게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을 몰아간 다음 한국정부의 경제부 고위 관료를 회유하여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신청하도록 만든다. 미팅에서 캉드쉬가 특히 강조한 것은 절대 한국 측에서 모라토리엄(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외부에서 빌린 돈에 대해 일방적으로 만기에 상환을 미루는 행위를 통칭한다.)을 선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해버리면 외채 상환 압박을 계속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채 상환 압박을 가할 수 없다면 한국정부와 협상 시에 IMF에게 유리한 조건을 따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IMF가 가장 중시하는 조건은 한국 기업에 대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현행 26%에서 55%까지 높이는 자본시장 개방이다. 조장된 경제 위기에 의해 타켓 국가의 주가지수는 급격히 하락하고, 그 타이밍에 싼 가격에 대량의 주식을 매수할 수 있게 된다. 뉴욕 미팅에서 한국의 경제부 고위 관료를 회유하기 위해 미국 재부부와 토탈이 양동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토탈은 수십 년간의 한국에서의 경험이 축척 되어있다. 토탈의 사장 샘 오웬은 미팅을 마치고 다음날 비행기 1등석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현재 토탈의 한국 총 책임자는 프레드릭이다. 오웬과 프레드릭은 곧바로 만날 약속을 잡았다. 서울 시청 근처의 한정식 집에서 비서 대동 없이 단 둘이 만났다.
“사장님 한식 괜찮겠어요? 저는 한국에 오래 살다보니 요새는 오히려 한식이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도 다른 나라 음식 못 먹으면 유행에 뒤쳐지는 것처럼 보여, 일식, 한식 식당도 뉴욕에 많이 생겨서 이제는 익숙해. 일식도 좋지만, 자네 생각해서 한정식 메뉴로 정한거야”
“감사합니다. 음식은 코스로 계속 나오니까 천천히 드시면서, 일단 소주 한잔 받으세요”
“응 그래”
둘은 근황을 얘기하며 한정식 코스 음식을 안주삼아 2, 3잔의 소주를 마셨다.
“프레드릭,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에 진행하게 되는 프로젝트는 그동안의 토목 건설처럼 눈에 보이는 프로젝트가 아니야, 미국 재무부, IBRD, IMF, 우리 토탈, 조지 소로스, 그리고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뒤에 있는 일본의 사사카와 재단과 같이 추진하는 거야. 이번 프로젝트의 이름은 양털깍기야”
사사카와 재단은 사사카와 료이치(1899~1955)라는 일본 국수주의 정치가가 새운 재단이다. 만주사변때 국수 광산, 일본 광업 등의 주식을 매점하여 엄청난 부를 모았고 가미카제 특공대를 창설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급 전범용의자로 체포 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도박사업인 일본경정협회를 만들어 엄청난 부를 쌓았고. 미국, 한국의 유명 대학에 연구기금을 제공해서 친일인사로 만들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전 세계 언론에 퍼트리고 미국, 일본의 정치계에도 자금을 제공하고, 한국의 극우단체, 교육계 특히 대학교수, 탈북민단체, 인권단체에도 자금이 들어갔다.
“양털깍기라……. 양을 잘 먹이고 키워서 양털이 충분히 자랐을 때, 털을 깎는걸, 말하는 거군요”
“그렇지, 그동안 한국경제가 많이 성장했고, 기업들의 주가도 많이 올랐단 말이지, 우리들이 협공으로 경제위기를 조장해서, 싼 가격에 한국의 주식들을 매수하는 거야. 그 과정에서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한국의 고위경제 관료로 하여금 IMF체제를 선언하도록, 특히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지 않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도록 설득하는 거야. 이 작업은 한국에 오랜 기간 동안 있으면서 관계를 맺은 자네가 최적임자야”
“한국의 경제계, 정치계 사람들은 제가 두루 알고 있습니다. 현 정부 경제부 장관, 차관도 그동안의 토목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자네가 맡은 임무가 아주 중요해, 꼭 성사 시켜야만 해”
“그럼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토탈 사장과의 미팅을 마친 프레드릭은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서 거실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프레드릭 자신이 맡은 임무는 한국의 경제부 고위 관료를 회유하는 것이다. 경제부 장관과 차관들을 만나 위기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모라토리엄에 대한 얘기는 자신이 먼저 꺼내지는 않고, 만약 경제부 관료들이 모라토리엄에 대한 언급을 했을 경우에는 모라토리엄으로 인한 국가신임도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해 한국경제가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겁을 주고 경제 위기를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하기 위해서는 IMF로부터 신속히 자금을 수혈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라고 설득할 계획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부 장관은 최기문 이었다. 프레드릭은 토탈 이름으로 경제부 장관과 차관2명과의 공식 미팅 약속을 잡았다. 종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5층의 회의실에서 만났다. 미국 재무부 차관보인 티모시 가이트너가 회의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 됐다. 회의 참가자는 토탈의 한국 담당 프레드릭, 미국 재무부 차관 티모시 가이트너, 한국 경제부 장관 최기문, 경제부 차관 2명 이었다. 2명의 통역관과 2명의 속기사를 대동했다. 기자들은 회의실에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프레드릭은 이번 양털깍기 프로젝트만 성공시키고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마지막 IMF건은 성과 보너스가 거액이다. 미국에 대저택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반드시 성사 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감도 있었다. 한국에서 대규모 토목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경제부 관계자들과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았다. 당시의 1997년 한국의 경제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고, 한보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 50곳이 넘었다. 한보가 금융권에 갚아야 할 빚이 4조 9천억 원이었다. 한보에 이어 삼미그룹이 부도를 내고 뒤이어 진로 그룹이 부도를 냈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이에 따른 대외 신임도 하락, 환율 상승과 주가의 하락으로 한국의 경제는 망가지고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찼고 기자들의 카메라에서 셔터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었다. 큰 회의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미국 측 인사와 한국 측 인사가 마주 않아 있었다. 경제부 장관 최기문의 기조연설로 회담이 시작했다.
“우선 급박한 한국의 경제 상황 속에서 미국에서 한 걸음에 달려오신 티모시 가이트너에게 감사를 드리며 시기가 시기인 만큼 한국의 경제 상황을 빨리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내용이 있는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기조연설을 간단히 마치고 기자단을 회의실 밖으로 내보냈다.
“작년 말부터 한국의 경제상황이 심각하다는 보고를 받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토탈에서 적극적으로 미국과 한국의 회담을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미국 정부 내에서도 관련 사항으로 회의를 거친 후 제가 이렇게 한국에 왔습니다. 모쪼록 한국의 경제 회생을 신속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강력하게 추진하겠습니다.”
티모시 가이트너가 최기문의 기조연설에 회답했다. 한국 측의 경제부 차관이 현재 한국 경제상황에 대한 상세 브리핑을 했다.
“한국기업들의 외국자본에 대한 단기부채의 만료와 한국 경제에 불안을 느낀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인해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충격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업의 파산과 대량 실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경제 위기로 인해 단기부채의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환을 독촉 받고 있습니다.”
프레드릭이 최 장관에게 물었다.
“하루 빨리 한국에서 구제금융을 받는 것이 연쇄부도를 막고 은행을 회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최 장관님은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안을 갖고 계신지요”
“저희 경제부 내부에서 구제금융에 대한 내부 회의를 했습니다. 구제금융을 받는 것도 받는 것이지만, 구제 금융의 규모와 조건을 알아야하고 그 조건에 대해 한국과 IMF가 협의를 해야 합니다.”
최기문 장관의 대답이었다. 구제금융을 받기로 결정했고,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들로는 수자원공사, 한국전력, 가스공사 등의 전기, 가스, 수도, 철도, 의료 등 공공재에 대한 민영화 추진, 금융기관, 기업의 인수 합병과 구조 조정, 외국에 자본시장 개방 등이 있었다. IMF가 가장 중시하는 조건은 한국 기업에 대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IMF의 기본적인 목적인 자본 시장 개방을 통한 세계 자유 무역 경제의 실현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의도적 조장에 의한 금융 위기를 빌미로 금융 시장 개방이 되어있지 않고 규제가 심한 국가의 규제를 완화시키고 시장을 개방하려는 의도가 있다. 금융위기로 기업들의 주식가격은 급격히 떨어지고, 저가의 주식을 대량 매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외국인 주식지분율의 한도를 55%까지 높이게 되면 그만큼 한국 기업들은 경제적 주권을 잃는 것이다. 구제금융의 최종 사인은 일주일 후에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에서 IMF총재 미셸 캉드쉬가 참석한 가운데 행해졌다. 구제금융 협약서에는 이미 내용이 구비됐었고 마지막 사인만 남겨둔 상태였다. 이때도 역시 국내 언론사에서 수많은 기자들이 참석해 미셸 캉드쉬가 사인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속보로 텔레비전에 중계가 되고 다음날 텔레비전과 신문을 접한 많은 시민들은 IMF에서 한국의 경제위기를 도와줘서 정말다행이라고 고마워했다. 1997년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한국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구제금융 580억 3천 500만 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하였다. 한국의 경제가 IMF체제로 들어가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