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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성산읍 신산리 963번지
유형 ; 교육기관
초등학교
조선조에는 신산리의 서당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난산리에서 공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옛어르신들이 한문을 잘하였다는 것으로 봐서 집안에서 독선생을 모시고 공부했었거나 또는 다른 마을에 가서 공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식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서당을 탄압하였으나 본리에서는 김한주가 훈장이 되어 박유희 댁에서 서당을 열어 천자문, 동몽선습, 사략, 통감 등을 가르쳤으며 이 댁에서는 온평과 김녕에서도 훈장을 모시고 서당을 열었다(박인평의 증언)고 한다. 강위봉은 강인보 댁에서 독선생으로도 가르쳤고 서당을 열어 천자문, 동몽 선습, 논어, 맹자, 소학, 대학, 예기춘추 등을 20여 명의 학생에게 가르쳤다. 또 한봉주는 강문권 댁과 하동 송씨 댁에서 서당을 열었다. 현익권은 해방을 전 후하여 자택에서 천자문을 가르쳤다. 일제강점기에 서당교육을 받은 학생은 공립정의보통학교에서 선발하여 초등교육을 받는 기회가 되어 많은 학생들이 공립정의보통학교에 다녔으나 일본이 곧 망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보통학교에 입학을 시키지 않으려고 ‘솔레기(옥돔)’을 말려 아는 사람을 통해 보통학교 선생님에게 드리고 보통학교 입학 선발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서당교육이 사설 교육기관으로 대중의 초등교육을 맡아 교육을 시키고 있을 때 일제강점기에 신교육의 주창과 일본어 보급을 위해 1923년 부터 개량서당이 지금의 성산읍 관내에 성산에 일출서숙, 수산에 지인서숙, 난산에 지란서숙, 신천에 일신서숙, 신풍에 신풍서숙이 있었으나 신산리민은 여기서 공부한 자료가 없으며, 또한 1935년에 2년제 난산간이학교가 있었으나 이 또한 신산리 출신이 수학한 자료가 없다.(2005, 신산향토지)
신산리에서는 1925년 사숙 형태의 교육기관이 마을청년회에 의해 설립·운영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5.12.28. 기사에는 〈신산사숙 부흥/신산 용진회 사업/제주도 정의면 신산리에 있는 용진회에서는 일반사회사업에 공헌이 많던 바, 신산사숙학교교육의 불완전함을 통탄하여 본리 용진회에서 교원 양인을 초빙하여 ❍신을 ❍계튼 바 장래 발전의 ❍❍이 많다 하며, 생도의 수는 아직 60명이나 장차 증가될 모양이며, 용진회의 임원은 좌와 여하다. ✤임원 회장 강인갑, 총무 姜○룡 서기 ○태순〉이라고 보도했다. 일제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고 강봉선 이장을 중심으로 신교육에 앞장선 분들이 학교 설립 운동을 시작하여 자금 마련을 위한 절미 운동을 3년간 계속한 끝에 전 호당 20원씩 균등하게 부담. 총 4000원으로 현교지 7,544평을 매입하였고, 당시 서당으로 사용하던 향사에서 40명의 학생으로 1941년 6월 14일에 개교한 후, 신교사를 짓기 위한 전지 작업 및 주변 정리에 신산, 난산, 삼달, 신천, 신풍 및 온평리 주민들이 호당 30일 이상의 부역을 제공하여 학교를 세웠다.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되면서 1면 2교의 설립 방침에 따라 1941년 6월 14일 신산공립국민학교가 인가를 받았다. 신산리를 비롯 성산읍 주변의 난산리·온평리·삼달리·신풍리를 학구로 하여 1941년 7월 5일 성산면 신산리 963번지 일대에서 신산공립국민학교가 개교하였다. 1950년 6월 신산국민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고, 1981년 3월 10일 1학급의 신산국민학교병설유치원이 개교하였다.
일제강점기 초등학교(공립국민학교)에서는 봉안전을 만들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봉안전은 학교마다 1개소씩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신산초등학교도 운동장 동쪽에 봉안전을 만들어 행사 때마다 90° 경례를 하고 손뼉치며 예배를 하였고, 등하교시에도 교문에서 그쪽을 향하여 예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동방예배도 강요했는데 동방 즉, 일본의 천황이 있는 궁을 향하여 아침마다 절을 하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를 완전히 일본신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래서 아침마다 동방예배를 강요하고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외우게 하였다.
신산마을에서도 국민학생들이 월요일 아침 등교 전에 요배단에 모여(신산리 우알 부근에 요배단이 있었음) 연대처럼 만들어 놓은 예배단에 올라서서 동쪽을 향하여 일본 궁성에 예배하고 일본 국가를 불렀다. 친일 단체인 국민총력연맹에서는 한술 더 떠서 소위 국어사용의 가(家)라고 하여 집안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집을 선정하여 표창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일부 친일파 인사들은 제 집안에서 5,6세 된 자식들과 일본어만 쓰고 이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2005, 신산향토지)
해방 후에도 서당이 운영되었는데, 강태순은 동네에서 천자문을 가르쳤다. 이들의 보수는 무보수였고 학생들이 추수 때 보리, 조 등 곡물을 2말 정도 가져갔다(강공직의 증언)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1등을 하거나 책거리(책씻이)로 떡과 술을 가져가서 훈장을 대접하였다.(2005, 신산향토지)
1976년에는 졸업생수가 84명이었다. 1992년 3월 30일 난산국민학교가 신산국민학교 부설 난산분교장으로 개편되어 운영되다가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들어 1995년 3월 1일 신산 국민학교에 통폐합되었다. 삼달국민학교 또한 1996년 3월 1일 신산초등학교 삼달분교장으로 개편된 후 운영되다가 농촌 소규모 학교의 통합 시책에 따라 1998년 3월 1일 신산국민학교에 통폐합되었다. 1999년 9월 1일 신산초등학교와 신산중학교가 통합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성산읍 서부 지역의 중심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2011.03.01. YP(Youth Patrol) 시범학교 운영(2011.03.01.~2013.02.28.)
2011.12.27. 제주특별자치도 교육청에서 ‘모다들엉 학력 평가’ 우수 학교로 신산초등학교를 선정하였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2024.03.01. 제주형 자율학교(글로벌역량학교 2024.03.01.~2028.02.29.)로 지정되었으며,
2025.01.08. 제79회 졸업식을 가졌다. 졸업생 총수는 2,987명이다.
2025년 10월말 현재 초등학생 48명, 유치원 14명이 재학중이다.(학교 홈페이지 2025년)
신산중학교
공민학교가 발족할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했어도 경제적으로 곤란하거나 거리가 너무 멀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공민학교에 보수과를 두고 있었다. 이 보수과가 발전적 개편을 보면서 고등공민학교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고등공민학교가 정식으로 발족되기는 1948년 1월 미군정 문교부에 의해서 ‘고등공민학교규정’이 제정, 실시된 데서 비롯되었고, 1948년에 교육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고등공민학교의 법적 근거가 정식으로 마련되었다. 신산고등공민학교도 이 당시 1953년 9월 1일 고문방에 의해서 개교되었다. 학생들은 신산, 난산, 삼달, 신천, 신풍, 하천, 온평, 신양리 출신이었으며, 교사는 강치웅(석권), 양성보, 고태열, 강창수, 한상호, 양병남, 양성수, 오석천, 오관봉, 강두만, 오상옥 선생이었다. 위치는 신산초등학교 앞 당시는 마을창고(후에 농협창고로 사용하다 철거)에 2개 교실을 이용하여 운영하다가 오래가지 못하고 2년여 만에 폐교되었다.
그 후에 중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신산중학교 설립 추진 경위(강희직 제공)를 보면 도교육청에서 성산읍(당시 성산면) 서쪽에도 신산리를 중심으로 중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교육청에서는 지원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에 신산리민총회를 개최하고 추진위원과 자금 조달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중학교설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강봉상, 총무 강흥평, 재무 김호길, 섭외 강희직으로 하고, 자금은 신산리 전 이민과 난산리, 삼달리 이민 들도 동참하여 성의껏 희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는 국가적으로나 이 형편으로는 자금조달이 어려워 재일 교포의 도움을 얻어야 되겠기에 일본에 책임자를 정하였다. 편지로 이곳 사정을 전하면서 동경에는 강택준, 대판에는 강효권을 책임자로 정하였다. 난산 출신 교포로는 김홍두 책임으로 난산리 교포 5명으로부터도 희사를 받았다. 재일교포 강택준은 부지 4,898평(신산중학교 전체 부지)의 대금 976,600원을 희사, 재일교포 신산친목회에서 50만엔, 강효권 50만엔을 비롯한 신산, 난산 재일교포 42명이 5만엔에서 30만엔까지 희사하고, 신산리, 난산리, 삼달리민들이 적극 동참하여 자금을 마련하였다.
자금이 마련되자 중학교 부지를 정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완공하여 교육청에 체납하여야 허가가 되었으나 건물을 짓지 못하고, 방편으로 당시 화북초등학교가 학교이설공사를 완성한 때라 그 건물을 촬영하여 신산중학교 건물을 완성한 것으로 하여 서류를 작성 섭외 강희직이 서류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당시 국회의원인 현오봉 의원 비서에게 서류를 위탁하여 문교부에(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 서류를 제출하였다. 서류 제출 3일 만에 제주도교육 청에 인가가 내려왔다. 인가를 받고 본격적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2005, 신산향토지)
1967년 8월 27일 신산중학교 설립기성회가 창립되어, 회장에 강봉상을 선임하고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69년 6월 1일 신산중학교 부지 4,898평을 신산리에 거주하던 강평권을 비롯하여 신산중학교 설립기금을 재일교포 강효권 외 40여 명이 희사하였다. 이에 1969년 11월 17일 2개 학년 6학급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70년 3월 1일 초대교장으로 오대현 선생이 취임하고 그 다음 달인 1970년 4월 17일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2개 교실을 준공하여 4월 28일에 신산중학교가 개교하였다. 3년 뒤인 1973년 2월 10일 제1회 졸업식을 열어 총 49명[남 32명, 여 17명]의 학생이 졸업하였다. 그러나 1990년 후반에 들어오면서 소규모 학교의 통합시책에 따라 1999년 9월 1일부터 신산초등학교와 신산중학교가 통합 운영되어, 통합 학교 제1대 교장으로 오대화 선생이 취임하였다.
2012년 2월 4일 제40회 졸업식을 통해 26명이 졸업하여, 개교 이후 총 2,54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산중학교는 1980년 3월 1일 제주도교육위원회 지정 새마을시범학교를 1년간 운영한 이래 2006년 3월 1일에는 제주도교육청 지정 ‘학교 급식’ 시범학교를 2년간 운영해왔다. 2009년 3월 1일 교육 과학 기술부 지정 ‘녹색 성장 교육 정책 연구 학교’로 2년간 운영하였고, 같은 해인 2009년 9월 1일부터 6개월간 2009학년도 하반기 교원 능력 개발 평가 선도 학교로 선정되어 운영하였다. 2010년 3월 1일에는 1년간 창의·인성 교육 시범 선도 학교를 시범적으로 운영해왔다. 이와 함께 학교 내 자율 특색 사업의 하나로 ‘사제동행 띠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이는 학력 양상, 인성 함양, 건강한 생활 습관 등 학생들의 학교 생활 전반에 관한 문제를 개인별 또는 그룹별 상담을 통해 서로 공유하고 해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교사와의 신뢰감을 형성하고, 학생들 또한 심리적,정서적 안정감을 형성하여 즐겁고 보람 있는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전통 교육 활동의 일환으로 첫째, 전통차와 함께하는 명상의 시간을 운영하고 있다. 보통 평일 점심시간 중 틈새 시간 20분을 활용하여 전학생이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명상의 시간을 통해 긍정적인 사고를 높이며 학교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느끼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자 운영하고 있다. 둘째, 사제 동행 틈새 운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는 일과 중 틈새 시간에 교사와 학생이 함께하는 운동 시간을 마련하여 운동하는 습관을 기르고 자기 건강 관리는 물론 사제간 신뢰와 두터운 정을 나누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교육 활동의 진행으로 지난 2008년 12월 17일 제주도 교육청으로부터 사이버 가정 학습 우수 학교로 선정되어 교육감 표창을 받았고, 2010년 11월 13일 도내 중학생을 대상으로 개최한 ‘제6회 전도 중학교 도미노 게임 대회’에서 신산중학교가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하였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학생수가 많을 때인 1979년에는 11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024.01.05. 제52회 졸업식(졸업생 총수 2,686명)이 있었고, 2025.09.04. 현재 1학년 3명, 2학년 11명, 3학년 5명 계 19명이 재학중이다.
《작성 2026.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