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가 '1987'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했을 때 나는 거절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선입감으로 고개를 흔들었다가 어떤 분이 영화를 보고는 개인소감을 잠깐 적었기에 나도 관람하고 싶었다.
점심 뒤 아내와 함께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몰 영화 15관(8층)에서 보았다.
1987년 1월 14일에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던 대공안빌딩에서 서울대 학생이던 박종철(22살)이 욕조에서 물고문을 받아서, 욕조 턱에 목을 짓눌러서 질식사시킨 사건이었고,
1987년 6월 6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데모하던 이한열 연세대 학생.
경찰이 최류탄을 겨냥 발사하여 뒷통수에 맞혀서 피 흘리면서 직사한 상황을 재연했다.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 전.
대공수사처, 치안총감, 안기부장, 서울지검 검사, 용산구에 있는 중앙대부속용산병원 의사의 시신검사 들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숱한 학생과 시민들의 함성이 민주화의 끈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함세영 신부, 이부영(나중에 국회의원) 등의 이름도 나오고...
줄거리 요약.
1987년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대공분실).
서울대생 22살 박종철이 붙잡혔다. 도피 중인 박종운(서울대생 사회학과 4년)의 행방을 대라고 하면서 물고문 전기고문 당한다. 강제로 욕탕 물속에 머리를 집어놓고는 목을 누른다. 욕조 턱에 목이 눌려서 30분 만에 질식사.
대공본부장 박처장은 즉시 시신 화장을 요구하는데 그날 당직 검사는 시신 부검해야 한다고 고집 피운다.
서울 용산구 중앙대 용산병원 시신을 검사하는 오연상 의사는 '고문 사망'으로 소견서 쓰고.
동아일보 기자(윤상삼)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로 특종 뉴스보도한다.
박종철 유해는 사망 하룻 만에 화장되어 유해가루를 강물에 뿌려서 흔적을 없애고...
대공본부장 박처장은 조반장 등 형사 2명을 구속시켜 사건을 축소하려고 한다.
교도소에 수감된 조반장은 사실은 교도관에게 몰래 알리고, 교도관은 재야 인사에게 몰래 알리려고 애쓴다.
조카(여대생)을 통하여 재야인사에게 알려져서 세상에 알려진다.
연세대 대학생 이한열은 연세대 정문 앞에서 데모하다가 최류탄에 직통으로 얻어 맞고는 피 흘리면서 죽어가고...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접선거를 약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쉽게도 내가 너무 늙은 탓일까? 스토리 전개가 매끄럽지 않아서 뚜렷하게 각인되지는 않았다.
실제사건과 가상의 스토리가 사실과 허구의 영상으로 혼재되어 있었기에.
영화에는 박종철 고문 치사시킨 '이근안'씨에 대한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못 알아들을 수도 있기에.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살짝 언급되기는 했어도...
누가 가해자인의 실체는 슬쩍 지나쳤다.
욕조 속에 사람을 넣고는 목을 눌려서 죽이고,
직선으로 뒷통수를 총 쏘아서 살해한 국가공권력을 보았다.
비겁하게도 그 당시의 숱한 가담자인 경찰관, 사복경찰관 등도 가해자였는데...
체류탄 제조판매한 삼양화학.
회장 한영자는 그해 1987년 국내 소득세 1위였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제끼고 소득세 1위에 오를 만큼 군경은 엄청나게 최류탄을 사서 자국민한테 쏴 질러댔다는 증거이다.
내가 왜 '삼양화학 회장인 한영자'의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 보았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1987년 1월인지는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직장에 나가니 '책상을 탁 치니 억 소리를 내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둥둥했고, 그게 가능하냐, 않느냐에 직원들끼리 갑론을박했다.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고, 경북사람은 맞다고 우겼고.
그당시 1987년 6월이다.
나는 서울 중구에 있는 교육기관에서 무역(수출입)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로 최류탄 난무했고, 교육기관에 들어서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화장실에서 콜록대며 물을 마구 틀어서 얼굴에 붓다시피 했다. 정말로 눈과 코가 매웠다.
친구네 가게가 바로 연세대 정문 부근에 있었다. 무심코 친구네 가게에 갔다가 황당하게 쫒겨야 했다.
이런 기억들이 아직도 희미하게 기억하는 나로서는 영화 '1987'이 뚜렷하게 나를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끔 하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 옛기억을 더듬는다.
암담한 1960년 4.19혁명, 1961년 5월 16일 군사구테타. 1969년 3선 개헌반대, 1971년 위수령, 1972년 유신헌법, 내가 직장 다니던 1970년대 말.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12. 12사태.
그날 밤 내가 근무하던 청사에 총 질러대고 청사를 장악했던 군인들의 군사반란(12.12사태).
정말로 오돌오돌 떨어야 했던 공포감이 지금도 뇌리에 박혔다. 나는 민간인이었는데.
1980년 5월 광주사태.
나는 1980년도에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면서 기자들과 다소 접촉했다.
언론통제가 무엇인지를 짐작한다는 뜻이다.
내가 근무하는 용산구에서 귀가하려면 버스를 타야 했고, 한강다리 아래에 있는 흑석동을 지나려면 체류탄가스가 난무했다. 그 곳에는 중앙대학교가 있었기에 대학생의 데모로... 버스문을 후닥닥 닫고는 마구 콜록대면서 귀가를 서둘어야 했다.
잚은날 한국정치사를 공부했던 나였기에 위 한국정치사에는 눈이 떴다. .
2018. 1. 19일. 오늘 영화 '1987'에 대한 느낌이 새롭고 남다를 터인데도 그게 아니다.
아쉬움이 남았다.
귀가한 뒤에 인터넷으로 박종철 사건, 이한열 사건을 검색했다.
그냥 뜬소문, 두루뭉술한 것에 불과했지 뚜렷하게 기술하지 못했다.
더 검색하고, 시중에 나가서 관련 실록지가 았는지를 확인해야겠다.
아내한테 물으니 '그냥 1987년에 있었던 사건으로나 알면 되지요'라고 간단하게 일축했다.
그 당시 가정에서 살림만 하고 아이 넷이나 키우기에도 벅찬 주부이기에 1987년 당시의 정치변혁기에는 별로 무관했던 탓일 게다. 그런 거 모르고도 살았을 터.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1938년생).
퇴직한 뒤에 11년간이나 숨어 살았다고 한다. 누가 뒤를 봐주지 않는 한 신분이 노출되지 않았다가 후에 검거되어 7년 만기 복역했고, 나중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목사를 한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대공수사처장이 검거되어 영창(교도소)에 가는 것으로 영화되었지만 실제로는 아니라고 한다. 허구로 꾸몄다는 뜻일 게다. 위 여대생(연희)도 허구의 인물이다. 사실 진위여부는 더 확인해야겠다.
박종철 (1965. ~ 1987. 1. 14).
그의 시신은 사망한 지 하룻만에 화장되어 유골을 강물(한강이라는 설도 있다)에 뿌려서 유골이 없고, 남양주시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가짜)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박정기, 삼촌 박원길.
'잘가그래이, 철아, 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대이' 아버지의 절규가 영화 속에서 모두를 울렸다.
내가 보기에는 못난 아비였다. 생떼같은 자식의 죽음 앞에서 선 아비의 못남이...
이한열 (1966. 8. 29 ~1987. 7. 5) 전남 화순 출신
당시 용산구 중앙대 용산병원의 시신을 검사했던 오연상 의사의 용기에 박수 보낸다.
당시 강민창 친안본부장. 치안감 박처원, 경정 유정방, 박태원 등.
고문 가담자가 3명에서 5명으로 숫자가 바꿨다.
조한경, 강진규 수사경관...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층 고문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시민의 궐기로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를 약속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뽑은 게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39 ~2,578 명의 선거인단이 1인 출마 대통령을 뽑았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김대중과의 대통령선거에서 겨우 이기자 이듬 해인 1972년에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라는 제도를 신설해서 대의원을 뽑았다.
제8대 대통령은 의해 1인 단독출마. 대의원 2,359표, 2,357 유효, 2표 무효. 박정희라는 이름조차도 쓰지 못했기에.
제9대는 대의원 2,578표, 2,577유효, 1표 무효.
1978년에도 대통령으로 확정되었다가 이듬해인 1979년 10월에...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시민들의 데모에 의하여 얻는 대통령 직접선거제.
두 야당 정치가의 싸움질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 당선율 가운데 가장 낮은 득표율?
이유를 국민은 얼추 알 것이다.
김염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빚는 결과였다.
'죽 쒀서 개 주었다'는 듯이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36.6%, 김영상 28%, 김대중 27%, 김종필 8%.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기에는 1987년 항쟁은 도루묵이 되었다.
훗날 김영삼은 전두환, 노태우와 한 패가 되어 1990년 3당통합하고, 대선에 당선된 사실은 역사는 어떻게 평가해야 되나?
최류탄을 총으로 쏘는 경찰관.
어쩔 수 없이 공무를 수행한다고 해도 최류탄을 공중에 쏘아서 떨어뜨려야 하는데도 이들은 때로는 사람을 직접 겨냥했다.
2015년 11월. 백남기씨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겨냥하여 사격했다.
백남기는 1948년생.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 입학. 지방에서 농사 짓는 농사꾼.
경찰관은 물대포를 정조준하여 쏘아서 죽였다.
권력의 앞잡이들이 되어 법 한계와 법윤리를 초월하는 월권으로써 또하나의 범죄를 자행했던 국가공무원들(공무원, 경찰관, 군인), 그 하수인들(음지에서 일하는 자들)이 무척이나 그렇다. 이들의 숱자는 엄청나게 많았으리라.
영화는 소수 특정인으로 압축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음양으로 가해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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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영화는 영화에 불과하다.
나는 스토리의 앞뒤 순서가 헝클어져서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그 상황을 재의미한다.
아랫글은 퍼왔다.
'... 어떻게 죽은 박종철은 말이 없는데, 고문수사 밀실에서 일어난 일을 사제단은 그와 같이 소상히 알게 됐을까? 후일 밝혀진 경과는 이러하다.
먼저 구속된 두 경관은 구치소에서 날마다 울었다. 뭔가 이상했다. 마침 두 경관의 옆방에는 인천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이 수감돼 있었다. 그에게 매우 ‘협조적인’ 교도관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날마다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 고위급들이 날마다 찾아왔다. 회유하기 위한 면회였다. 이부영은 마침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사건이 은폐 조작됐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내용을 화장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교도관을 통해 밖으로 내보냈다. 이 쪽지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사제단의 손에 들어간다. ...'
처음에는 사건 은폐하려고 고문경관 두 명만 구속시켰다.
조한경, 강진규.
이들이 교도소에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고, 이게 새어나가서 1987. 5.18 명동 성당추모회 발표.
고문 고문경관은 2명에서 5명으로 늘었다.
고문 경관 5명 : 조한동, 강진규, 황정웅, 반금곰, 이정호.
첫댓글 선생님
좋은글 새벽을 깨우며 읽어봅니다
인생 살아가는 이야기 머물며
지난날 신문을 다시보는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오후 행사때 뵙겠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