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바람을 포갠들 무엇하랴
눈에 잘 띄는 곳에 놔두고 이따금 한 구절씩 반복해 음미하는 책이 쟈끄 러끌레르끄(1891~1971)의 「게으름의 찬양」(분도출판사)이다. 골치 아픈 일이 많거나 ‘이렇게 바쁘게 살아도 되는 건가’하는 회의가 들 때면 자연스레 그 책에 손이 간다.
거창한 책은 아니다. 저자가 1936년 벨기에 자유학술원 입회 인사차 강연한 내용을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번역한 소책자다. 저자는 장 주교가 “오복의 하나로 이 성한 것도 친다던데, 스승 잘 모신 것은 어디에 드는지 잘 모르겠다”며 은근히 자랑하는 루벵대학교 은사 신부다.
책 제목에 나와 있듯, 러끌레르끄의 강연 요지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좀 게으르게 살라는 것이다. 4세대 통신 속도보다 20배 빠른 5G 시대를 향해 질주하는 마당에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하지만 그의 충고를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다. 어투는 투박하되 정곡을 찌른다.
그는 우리 시대가 자랑하는 치열한 생활은 실상 소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뛰어나다고 과시하는 발명 역시 슬기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속도의 발명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경주(競走)에 경주를 거듭하는 것은 ‘바람에 바람을 포개는 꼴’이라고 일갈한다. 미술관 작품 앞에서 단 일분도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관람객,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급하게 쪼가리 정보를 뒤지는 엄지족들… 그의 눈에 이런 부류는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바람에 바람을 포개는’ 속도 중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물정 어두운 어느 시골 신부의 낭만적 목가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는 20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늦은 나이에 신부가 되어 자연법·윤리학·사회학 분야의 명저를 여러 권 낸 석학이다. 더구나 자신을 “하느님이 타는 숯으로 지져놓으신 딱한 사람”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겸손하기에 인생의 진리를 꿰뚫는 통찰력이 범상치 않으리라.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면 삶의 속도라도 늦춰야 한다. 우리는 빠른 속도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는 말을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입에 달고 산다. 소음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북새통 같은 일상에는 기다림과 침묵, 성찰과 평온이 끼어들 틈이 없다. 내면의 소리가 들려올 리 없고, 실상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모두 정상이 아니다.
속도를 늦추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아가 느려진 속도에 불안해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한데, 그런 연습에는 걷기만한 것도 없다. 걷기는 한 시간에 4㎞를 가는 원시적 이동 방법이다. 인류는 자동차를 발명하기 전까지 그 속도에 맞춰 일상을 영위하고 문명을 건설해왔다. 하지만 과학기술 문명이 몰고 온 ‘하얀 어둠’에 갇혀 그 속도 감각을 잃어버렸다. 걷는 능력조차 퇴화하고 있다.
걷기는 침묵과 성찰의 시간이다. 침묵 속에서 그 원초적 속도의 리듬에 맞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의 노래가 들려온다. 마음의 노래는 “휜 가지 끝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 떨리면서 시작된다”고 러끌레르끄는 귀띔한다.
걷기 좋은 계절이다. 밖에 나가 걷자. 단, 이어폰은 두고 나가자. 이어폰을 꽂으면 마음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이 새소리, 바람 소리보다 아름다울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