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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1장 29절.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7-온유한 삶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는 그것을 받은 사람들을 온유한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모나고 자기 중심적이며, 율법적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던 사람이 점점 겸손해지고 온유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용서하며, 감싸고, 용납하는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온유하다는 말을 들으십니까? 아니면 급하고 불안하다는 소리를 들으십니까?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불같이 급한 성격도 후에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고, 사도 바울처럼 거의 극단적인 사람도 역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진리로 인해 그들은 성품과 성격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를 통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또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를 시킵니다. 오늘날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급한 성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급한 성격의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을 찾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와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일을 멈추 지않고 계속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땅은 단순히 이 세상의 땅이 아닙니다.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역의 영역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온유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된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성경은 종종 사람들의 마음을 밭이나 땅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격이 급하고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사람들은 점점 사람을 잃게 되고 외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말을 함부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듣는 귀가 없고 제대로 상황을 살펴보는 눈이 없어서 자기는 항상 옳고 다른 사람들은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해보면 좋은 사람은 거의 없고 나머지는 다 잘못된 사람들 뿐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 자신이 더 모난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에 어떤 영화를 보았는데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극입니다. 그런데 탐정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차 안에는 많은 승객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손님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탐정에게 자기를 지켜달라고 말합니다. 기차 안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적들이 가득하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탐정이 말합니다. “적이 많다는 것은 결국 당신이 그들의 적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그 날 밤 자기를 변호해달라고 했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그의 몸에는 수많은 칼자국들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범인은 그 기차에 타고 있던 탐정 외에 모든 손님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죽은 사람들로부터 큰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적이 아니라 친구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따뜻함이 느껴지기 때문에 친구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또한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기꺼이 친구가 되어 줍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로 그를 감싸줍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의 어려움에 동참합니다.
여러분들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여러분들 역시 예수님에게 배워서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살라고 초청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1장 2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던 예수님은 언제나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언제나 마음에 쉼을 얻고 계셨고, 자신에게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에 쉼을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도 역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의 멍에를메고 예수님께 배우기 전에는 결코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예수님의 멍에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여러분들에게 그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우선 예수님이 짊어지신 멍에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요단강 가를 다니실 때 자신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것은 아사셀 염소를 의미하는 것인데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행하였던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속죄일에 하나님은 염소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드리고 한 마리는 광야로 데리고 나가 광야에 풀어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한 마리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죽고, 한 마리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광야로 내몰린 것입니다. 그 광야에는 수많은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 그런 광야입니다. 그 짐승들은 밤낮으로 삼킬 자를 잦아 다니는 육식동물들입니다. 그러니 이 아사셀 염소를 보면 당장 잡아 먹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위험과 공포와 외로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채 광야로 내 몰리는 아사셀 염소는 바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세상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신 멍에의 첫 번째는 세상 죄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과 함께 이 멍에를 멜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세상 죄를 짊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면서 자신과 함께 지자고 하시는 그 멍에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두 번째 멍에인데 이것은 복음의 멍에입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을 보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서 “나는” 사도 바울이고 “멍에를 같이 한 교회”는 빌립보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위하여 멍에를 함께 메었습니다. 같은 복음을 교회 주변 지역에 전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 헌금을 모아 후원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나 선교사들, 목회자들, 교회 개척자들 등 여러분들이 도울 수 있는 후원 헌금은 바로 그 선교사들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담당함으로써 그들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결국 함께 복음 전도의 멍에를 메고, 한 마음으로 전도하자는 뜻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구원하는데는 온유한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왜 전도를 하는데 온유한 마음이 필요할까요? 우선은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온유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들의 행동은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냅니다. 여러분들의 행동은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를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온유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무엘하 22장 36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이 노래의 배경에 대해서는 1절에 나와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긴 시편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36절에 가서 “주께서 나에게 주의 구원의 방패를 주셨습니다”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공격하는 적들로부터 구원하는 주의 구원의 방패를 주셨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은 그들을 차마 공격할 수 없는 대상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공격을 막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주님의 방패를 자신에게 주셔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주의 온유하심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하고 노래합니다.
주의 온유하심은 인내로써 다윗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덜 만들어진 다윗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면서 하나님이 쓰려고 하시는 왕답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대해서도 온유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그 결과 여러분도 역시 온유하며 마음의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저는 저의 과거를 되돌아 볼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걸어온 날이 얼마나 부족하고 흠이 많았었는지를 봅니다. 그런데 온유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참으시면서 지금까지 인도하고 만들어 오셨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 역시도 하나님은 그를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고 판단을 굽게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기 앞에서는 더 침착한 상태로 변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처럼 제 안에서 여러 가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자기도 불안을 느끼지만 다른 사람도 역시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의 감정에 따라 판결을 하기에 그 판결에 일괄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때는 이랬다가 어떤 때는 저랬다가 하는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드러내지도 못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온유하심 역시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온유하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 여러분들이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전도할 대상자들은 죄인들인지라 벼라별 반응을 다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들을 참아낼 수 있는 마음은 온유한 마음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을 보면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하고 말씀하십니다.
거역하는 자들이 자기들을 정죄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을 이해해주며 말하는 온유한 훈계를 들을 때 그들이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온유함으로 훈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할 때 진리가 그들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그들이 진리를 알게 되어 진리이시며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불신자들을 만나 전도하려고 하면 호의적인 사람보다 비호의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비호의적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화를 내거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면 아마도 단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복음에 합당치 못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가는 칭찬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그가 광야생활의 마지막 관문인 가데스 바데아에서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극도로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가리키면 내가 물을 내리라”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앞에서 서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고는 지팡이로 반석을 세게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반석 위에서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불합격”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을 잃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모든 사람보다 온유했던 모세, 그리고 그렇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기를 원했던 모세도 단 한 번의 큰 화를 못참고 온유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자리에서 그 온유하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기의 폭발적인 감정으로 담아 반석을 친 것 때문에 그렇게도 들어가기를 사모했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오실 온 인류의 반석이요, 온 교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으로 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천국은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을 변화산에서 만나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십자가 앞에서도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크게 화를 내셔야할 입장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화를 내지 않으시고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모습을 모세는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교회 밖에서도 온유해야 하지만 가정에서도 역시 온유해야 하며, 또한 교회 안에서도 온유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범죄를 막아야 하지만 일어난 범죄도 효과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형제가 어떤 범죄한 일이 있어 그것을 교회가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에 대한 대처방법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 범죄한 형제의 잘못을 바로잡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묵인하면 죄가 점점 자라게 되어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죄에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어떤 형제의 죄가 드러나게 되면 교회는 그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바로 잡으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너 자신도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너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범죄한 형제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대해야할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 말씀은 여러분의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을 알게되면 먼저 일대일로 권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사람이 잘못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듣지 않으면 교회 전체가 그것을 알게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믿음없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죄가 일어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입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 안에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 자신 안에 없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고린도교회를 권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사도 바울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해 온유와 관용을 베풀고 계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를 주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살아계셔서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와 관용을 베푸시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교회와 교회의 지체인 여러분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온유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으십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심으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에 알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사람안에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거침없이 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온유하신 그리스도는 여러분 안에서 사랑으로 권면하시며, 온유하고 관용하시면서 권면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과 따스함이 충만합니다. 그런 교회에는 사랑으로 굶주신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받는 다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해서 곤고해했던 사람들이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자기 안에 모시고 사는 온유한 자들로 가득차있는 교회로 몰려들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그들을 넓은 마음으로 품지 못하고 비판하고 판단만 한다면 교회로 나왔던 사람들은 실망하여 떠나게 될 것이지만 교회가 그들을 품고 받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드러낸다면 그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며,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치유를 받게 되고, 사랑에 굶주려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온유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영을 받아서 거듭났기 때문에 아버지를 닮아 자라가고, 또한 아버지의 아들로써 온유한 성품으로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영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을 통해 온유하신 예수님을 나타내셔서 만나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계시는 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우리 제석교회가 이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온유하신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찬송하는 복이 넘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