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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을 감싸는 하느님의 두 손, 제물진두 순교성지
“우리가 천주교를 믿다 지금 잡혔으니 물어볼 말도 없고 대답할 말도 없다.” 1868년 제물진두에서 처형된 손 베드로와 그의 아내 김 씨는 문초를 받을 때도 결연했다. 제물진두 순교성지는 한국 첫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 박순집 베드로의 외가 천주교인 등 순교자 10명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 터다.
왜 하필 제물진두가 공개 처형장이 되었을까. 제물진두의 ‘진두’는 나루터를 말한다. 당시 천주교를 박해했던 조선은 사람 왕래가 잦고 외국 문물이 유입되는 나루터에서 천주교 신자를 공개 처형하여 서양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인천 최대 순교 터에 세워진 성지는 덜어내고 덜어내어 본질만 남은 모습이다. 절제의 미가 느껴지는 15m 높이 경당은 순교자들을 감싸는 하느님의 두 손을 형상화했다. 10위 순교성인의 성화를 따라 조붓한 복도를 지나면 자그마한 경당이 나타난다. 당시 순교 장면을 그린 대형 성화가 고요한 울림을 준다.
순교자 3위가 걸어간 믿음의 여정, 갑곶순교성지
조선 고종 때인 1871년, 미국 군함 5척과 해군 1,200여 명이 강화도 해역에 들이닥친다. 훗날 ‘신미양요’라 부르는 사건이다. 5년 전, 미국 무역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불에 탄 일의 책임을 묻고 조선에 통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천주교를 더욱 가혹하게 박해한다. 천주교인을 처벌하라는 고종의 교서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에서 효수(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다는 형벌)된다.
갑곶순교성지는 2000년, 세 명의 순교자가 생을 달리한 갑곶진두에 조성한 성지다.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되는 시대, 오늘날의 성지는 더없이 평화롭다. 순교자 삼위비, 박순집 베드로 묘, 십자가의 길을 거닐고 전망대에서 염하강을 바라보며 산책하듯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곳이 박순집 베드로의 묘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라 불리는 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행적을 기록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인천 최대 순교 터에 세워진 성지는 덜어내고 덜어내어 본질만 남은 모습이다. 절제의 미가 느껴지는 15m 높이 경당은 순교자들을 감싸는 하느님의 두 손을 형상화했다. 10위 순교성인의 성화를 따라 조붓한 복도를 지나면 자그마한 경당이 나타난다. 당시 순교 장면을 그린 대형 성화가 고요한 울림을 준다.
조선 고종 때인 1871년, 미국 군함 5척과 해군 1,200여 명이 강화도 해역에 들이닥친다. 훗날 ‘신미양요’라 부르는 사건이다. 5년 전, 미국 무역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불에 탄 일의 책임을 묻고 조선에 통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천주교를 더욱 가혹하게 박해한다. 천주교인을 처벌하라는 고종의 교서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에서 효수(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다는 형벌)된다.
갑곶순교성지는 2000년, 세 명의 순교자가 생을 달리한 갑곶진두에 조성한 성지다.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되는 시대, 오늘날의 성지는 더없이 평화롭다. 순교자 삼위비, 박순집 베드로 묘, 십자가의 길을 거닐고 전망대에서 염하강을 바라보며 산책하듯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곳이 박순집 베드로의 묘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라 불리는 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행적을 기록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인천 최대 순교 터에 세워진 성지는 덜어내고 덜어내어 본질만 남은 모습이다. 절제의 미가 느껴지는 15m 높이 경당은 순교자들을 감싸는 하느님의 두 손을 형상화했다. 10위 순교성인의 성화를 따라 조붓한 복도를 지나면 자그마한 경당이 나타난다. 당시 순교 장면을 그린 대형 성화가 고요한 울림을 준다.
조선 고종 때인 1871년, 미국 군함 5척과 해군 1,200여 명이 강화도 해역에 들이닥친다. 훗날 ‘신미양요’라 부르는 사건이다. 5년 전, 미국 무역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불에 탄 일의 책임을 묻고 조선에 통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천주교를 더욱 가혹하게 박해한다. 천주교인을 처벌하라는 고종의 교서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에서 효수(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다는 형벌)된다.
갑곶순교성지는 2000년, 세 명의 순교자가 생을 달리한 갑곶진두에 조성한 성지다.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되는 시대, 오늘날의 성지는 더없이 평화롭다. 순교자 삼위비, 박순집 베드로 묘, 십자가의 길을 거닐고 전망대에서 염하강을 바라보며 산책하듯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곳이 박순집 베드로의 묘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라 불리는 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행적을 기록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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