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아버지의 택시를 닦는 판사
아버지와 아들이 법정(法庭)에 서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저 놈은 아들이 아닙니다. 제가 죽어도 저 놈이 위선(僞善)을 떨면서
상주(喪主) 노릇을 하거나 저놈이 내 제사상 앞에 있는 것도 싫습니다.
저놈 한테 들인 유학비용 결혼 비용을 모두 돌려받고 싶어요.
단 한 푼도 상속(相續)해 주기 싫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아버지가 재판장(裁判長)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재판장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들 교육(敎育)을 위해 무리해서 강남으로 이사까지 가고
과외(課外)를 시켜가며 공부하며 키웠습니다.
유학(留學)을 보내고 집안 기둥이 휘어지도록
비용을 들여 결혼(結婚)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저 놈이 대기업(大企業)에 들어간 이후는
아예 부모(父母)와 연락을 끊고 삽니다.
새해가 되어도 세배를 오지 않고 명절(名節)이 돼도 10년간 찾아온 적이 없어요.
엄마가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손자 손녀(孫子 孫女)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패륜아인 저 놈에게 들인 모든 돈을 돌려받고 싶은 심정입니다.”
재판장이 이번에는 아들에게 항변(抗辯)할 기회를 주었다.
“저는 유학(留學)을가서 개인주의(個人主義)를 배웠습니다.
저는 독립적(獨立的)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부모(父母)를 찾아가고 안 찾아가는 건
나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집은 제 프라이버시의 영역입니다.
父母가 오려면 미리 저나 와이프의 허락을 얻고
시간과 장소(場所)를 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孫子 孫女를 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父母는 교육(敎育)을 하고 아들은 봉양을 해야 한다는
채권계약을 원고(原告)와 맺은 적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재판장(裁判長)에게 아들의 말 중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침묵(沈默)하던 재판장(裁判長)이 아버지 쪽을 가리키며 아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원고(原告)입니다.”
“아무리 법정(法庭)에서 마주 섰어도 아버지는 아버지 아닙니까?
아버지를 굳이 그렇게 원고(原告)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판사(判事)는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 눈에 은은한 분노(忿怒)가 일고 있었다.
변호사(辯護士)를 하다 보면 그런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빌딩 상속(相續)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아버지의 묘에 가서 불을 지르기도 하고
몰래 아버지를 죽이고 검거된 아들도 있었다.
모두들 부잣집 아들의 행태였다.
왜 그런 관계가 됐을까. 父母가 건강(健康)할 때도 찾지 않는
아들은 아버지가 요양원으로 가면 관심은 가질까.
어쩌면 아들은 현대판 고려장(高麗葬)을 지낼 것 같기도 하다.
영어(英語) 단어 하나 수학(數學) 문제 하나 더 알도록
(교육)敎育을 시키는 게 인간 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重要)하다고 여기는 世上이다.
인간보다 전문직이나 대기업(大企業) 사원의 지위를 더 귀중하게 여긴다.
소송을 제기한 그의 손자(孫子)가 커서 똑같은 행동(行動)을 할 때 아들은 어떨까.
공부공부 하면서 인성(人性)보다 영어(英語)를 더 중요시했던 아버지 탓은 없을까.
아들이 잘못하는 건 맞지만 그 아들을 그렇게 키운 건 그 아버지가 아닐까?.
세상(世上)에 모두 그런 이들만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전혀 다른 아들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오래전 판사(判事)의 실무(實務)를 배우기 위해
성남 법원(法院)으로 갔을 때였다.
같은 방에서 내 나이 또래의 판사(判事)와 친하게 지냈다.
격의 없이 법원(法院) 앞 빵집에 함께 가기도 하고
성남의 3류 극장에서 영화(映畫)를 보기도 했다.
어느 날 판사실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은 정말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택시를 운전해서
우리 5남매를 키웠으니까요.
아버지가 힘들게 돈을 버는 걸 보고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판사(判事)가 됐죠.
지금도 개인택시를 모는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어요.
내가 매일 아침 법원(法院)으로 출근(出勤) 전에
하는 일이 뭔지 알아요?
아버지가 모는 택시를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닦으면서 이 놈아 고맙다고 하죠.
그 택시가 우리를 살게 했으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고슴도치 같은 관계도 있지만
효자(孝子)인 아들도 있고 돌아온 탕자(蕩子)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성경 속의 아버지 같은 존재(存在)도 있다.
나의 아버지는 말없이 뒤에서 은은한 사랑의 향기(香氣)를 보내는 아버지였다.
나는 내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인가를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