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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㉗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무더위에도 풋살은 열심히 합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여차하면 나오는 뱃살에 대한 몸부림이랄까요.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설마 저게 나인가라는 불안이 잠시 스쳐갔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라도 운동장에 부지런히 나가는데, 기분 좋게 땀을 흘리고 함께 나누는 치맥의 유혹은 벗어나기 참 힘듭니다. 운동을 할수록 원하는 몸매가 나와야는데, 겨우겨우 현상유지만 하는 걸 보면 제 의지박약은 타고난 거 같습니다. 오늘은 참아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손은 치킨과 시원한 생맥주를 부지런히 나르고 있습니다. 어느 밤엔 단단하게 자리 잡은 해미천의 돌 징검다리가 절 놀리며 춤추는 걸 본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이 물을 술로 바꾼 것이라 그런지 천주교는 비교적 술에 관대한 편입니다. 신학교의 7년 기숙사 생활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 외출이 가능한데, 맥주한잔 하고 들어오는 게 보통이었으니까요. 물론 본인의 음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임을 져야하지만 술 한잔 기울이면서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마음을 동료와 나누는 것은 삶의 활력을 주었습니다. 매력적이면서 때론 피하고 싶은 이중성을 가진 친구가 술이죠.
서양의 포도주가 존재한 7000년 전 부터 술은 신에게 가까이 가는 도구와 문화로 우리와 함께해 왔습니다. 고대인들은 제사와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으로 받아들였고, 마침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예식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포도주에 진실이 있다’(In vino veritas)는 격언은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A.D. 23-79)가 대중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포도주를 마신 후 본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술의 힘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졌고 그들에게 사교적 음주는 ‘심포지움’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좌담회’ 정도로 번역되는 심포지움은 ‘함께 마신다’는 의미인 그리스어 ‘Sympodium’에서 유래했죠. 맛있는 음식, 성적 유희, 철학적 담론이 같이한 심포지움은 소크라테스 후손들이 누린 화려한 파티였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제공되는 포도주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자신의 생각을 더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죠.
제가 동감하는 ‘포도주 맛의 10%는 빚은 사람이고, 나머지 90%는 함께 마시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코올에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취하는 것이고, 누구와 마시느냐가 술의 맛과 분위기를 좌우합니다. 어느 논문에 따르면, 혈중 알코올농도 0.09% 정도가 되면 사람은 평소보다 더 외향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외향적인 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끼면 더 솔직한 말을 하게 되죠. 더불어 사고와 감정도 격해집니다. 진심이 아님에도 분위기에 휩쓸려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할 수 있죠. 취중진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개방성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역할과 다른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술의 성격을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삶에 활력이 떨어져 보입니다. 같이 무얼 하기 보다는 혼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익숙해져 갑니다. 다가오는 추석에는 조금 실수하고 술의 부작용을 겪더라도 긍정적 효과를 맛보는 가족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에라스무스의 “아무도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더라도 어린이, 술 취한 사람, 미친 사람은 예외다.”는 말처럼, 술의 도움을 빌어 나에게 조금 아픈 얘기를 해도 웃어넘기고, 나의 힘든 얘기도 나누면서 마음의 짐을 고향에 덜어놓고 왔으면 합니다. 고향과 가족은 원래 그런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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