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신부님들 강론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처음 접하는 신부님의 강론이 너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 찾아낸 보물 같은 ‘소확행 신앙이야기’로
시와 음악 그리고 그림이 곁들여진 체험담을 통해
성경말씀은 물론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인연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제 기억을 떠올리는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필자가 대학원 시절 ‘시청각 통신 성경’ 채점 봉사를 통해 만났던
봉쇄수녀원 수녀님과의 인연이야기 입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씨
(김대우 모세신부)
편지를 받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즐겁다.
특히 남자들만 모여 사는 곳에서 받는 편지는 온화한 봄바람 같다.
편지에는 보낸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어서 봉투를 여는 순간부터
글을 읽는 내내 그 사람의 향기가 그윽하다.
신학교에 입학한 지 7년이 흐르고. 기도 수련에 집중하는 때였다.
학교 뒷동산에 올라 땀을 잔뜩 흘리고 돌아왔는데
책상 위에 두툼한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더니 종이 뭉치가 쏟아져 나왔다.
성 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에서 온 답안지였다.
편지를 기대했던 내게 과제물이 도착한 것이다.
대학 학부 과정을 마치며 `우편 성경공부`평가자 교육을 받았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성경공부는 수강생과 평가자가 우편으로 답안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지며
교육원의 담당 수녀님이 중개자 역할을 한다.
수강생은 평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로
평가된 답안지와 메모를 받아볼 수 있다.
반면에 평가자는 수강생의 이름과 소속 정도만 알 수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답안지를 채점했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답안지가 있었다.
종이 위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씨체 때문이었다.
우리말로 쓰였지만 마치 히브리어 성경을 해독하는 수준이었다.
글씨체로 보아서는 한글공부를 막 시작한 학생이거나
늦깎이 할머니 학생 같았다.
그러나 답안은 정성이 가득했고 풍부한 영성이 깃들어 있어
채점을 한다는 게 송구할 정도였다.
누굴까?
머릿속에 여러 유형의 사람이 스쳐갔다.
학생 카드를 보았더니 봉쇄수도원 소속 수녀님이었다.
이럴 수가! 수녀님이셨구나!
장난기가 발동했다.
답안지마다 빨간 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은 후
`참 잘했어요`라고 쓰기도 하고.
빈 공간에 숨은 그림 찾듯 작은 글씨로
`글씨가 이게 뭐예요!
호호호...글씨 연습을 더 해야겠어요. 호호호..
라며 보란 듯이 예쁜 글씨체로 적기도 했다.
다음 달. 우편 성경공부 답안지가 도착했다.
제일 먼저 가장 글씨를 못 쓴 답안지를 찾았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글씨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답안지를 넘기다 `메모난`에 시선이 갔다.
수녀님은 작은 글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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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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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자동차로 두 시간을 달려 남쪽의 한 수도원을 찾아갔다.
시골 언덕길을 지나자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이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깔끔하게 성직자 정복을 입고 사제 서품 제의도 가져갔다.
그곳 원장 수녀님이 첫 미사를 봉헌하도록 초대해 주신 것이다.
그 수도원에는 글씨체가 못생긴 그분이 산다.
두근두근...이 긴장되는 유쾌한 설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마와 가슴에 십자성호를 그으며 수도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시작했다.
수녀님들의 목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기도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 다른다.
특히 시편 성가를 부를 때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천상의 하모니가 따로 없다.
첫 미사 동안 이따금 봉쇄 구역 너머로 글씨체가 못생긴 그분을 찾았다.
본 적이 없으니 그분을 알 도리가 없다.
대부분의 수녀님들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지녔고
수도복을 입고 엄숙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있어 모두가 비슷해 보였다.
새 사제 안수예식 때는 한 분 한 분에게 기도를 해드리지만
더 알아보기 힘들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그분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어느 분일까?
드디어 면담실에서 원장 수녀님의 주도로 모든 수녀님을 만날 기회가 왔다.
나와 수녀님들 사이에는 창살이 놓여있었지만
서로 바라보며 대화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창살 아래로 작은 문이 있었고 그곳을 통해
원장 수녀님이 차와 직접 만든 쿠키를 건네주셨다.
열 명이 훨씬 넘는 수녀님들이 짙은 밤색 수도복에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만 드러날 뿐이었다.
수녀님들의 미소는 그야말로 곱고 천진난만했다.
내게로 향하는 많은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라 찻잔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신부님이 이곳에 올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 수녀님 한 분을 통하여 섭리해 주셨어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시나요?
그순간 원장 수녀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두근대는 내 심장 소리를 들킬 뻔했다.
면담실을 가득 채운 수녀님들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라보다가
한 분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그분은 들판에 홀로 핀 수선화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글씨 못 쓰던 수녀님이 바로 그분이란 걸 알아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분의 눈빛이 유독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수녀님의 눈은 다른 수녀님들보다 더 반짝였고
나를 향한 미소는 더 천진난만했다.
배경음악이 있었더라면 (반짝반짝 작은 별) 이었을 것이다.
바람은 곱고 햇살은 따사로운 날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멈추었다.
만나지 않았어도 알 수 있다.
굳이 목소리를 듣지 않았어도 들을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인연은 그런 것이다.
첫댓글
세잎 클로버 님
오랜만에 아름다운 작품으로
함께 합니다
인연이란 곡
저도 참 좋아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늘 건안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