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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 목사
오늘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이사야서, 신약성경에서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 님의 백성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포 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레미야 2장 21절에 보면 “내가 너를 순전한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라고 말씀했습니다.
호세아 10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0편 8절 말씀을 보면 “주께서 한 포도 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전 정문에는 황금으로 포도나무를 조각했었는데 이것도 이스라엘의 상징이었습니 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보고한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 우거하게 될 그 가나안 땅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포도나무가 있는 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그 유래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포도나무가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같은 사막 지대에서는 포도나무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가 있는 땅이라는 사실은 사막 지대에 살 고 있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희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13장 23절 이하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송이를 벤 고로 그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칭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에스골 골짜기라는 말은 열매가 있던 골짜기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사막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에 포도 열매가 있었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포도나무가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도 열매가 있었던 이 땅에 살게 된 하나님의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포도 열매처럼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관광을 담당한 여행사 사람들의 배지(Badge)에 두 사람이 포도송이를 막대기에 꿰어 메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 처음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긍지요, 자부심이었습니다.
포도나무의 상징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기대였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 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바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인 요한복음 15장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는 말씀은 얼른 보면 그리스도 자신을 증명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를 설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있습니다.
에스겔 15 장 3절에 보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 들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포도나무는 오로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만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하는 말입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재목으로서는 아무 쓸 데가 없는 나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금 예배당을 새로 짓고 있습니다만, 포도나무는 어디에도 쓸 데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습니다.
더구나 포도나무가 꽃이 아름다워서 꽃을 자랑하는 나무입니까?
포도나무에도 꽃이 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꽃은 아주 볼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연료로 쓸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금방 타 버리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열매 때문입니다.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하면 포도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러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가지 처리 방법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요한복음 15장 6절을 보세요.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했습니다.
포도나무가 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 도 할 수 없음이라”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떠난 포도나무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에스겔서 15장 4∼5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열매 맺지 못 하는 포도나무, 그것이 불에 타기 전에도 쓸모가 없었다면 불에 태워진 다음에는 더더욱 쓸모가 없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매 없는 포도나무의 처지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당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 그들은 이미 이 땅위에 있어야 할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태워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순간이 임박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왕국의 최후의 순간, 그들을 불사르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를 기억하시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 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했습니다.
도끼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했습니다.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 데도 쓸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를 잃고 있었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선언하셨다면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열매 없는 삶을 어떻게 보실까요?
생각하면 두렵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열매를 말할 때는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열매를 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우리가 조상 대대로 예수믿는 생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착한 행실을 사도 바울은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0절에 보세요.
골로새 교인 들을 위해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5장 22절 이하에 보면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할 때 여러 가지 개념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성령의 열매는 문법적으로 말하면 단수(單數)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지만 사실은 한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인격 속에 나타나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단수로 사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열매는 우리의 인격, 또는 도덕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는 우리가 주변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잠언 11장 30절을 보세요.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생명나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이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옛 글에도 덕불고 필유린 (德不孤 必有隣)이란 말이 있습니다.
덕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절대로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향기는 소리가 없어도 십리 밖에 있는 별과 나비가 날아들게 합니다. 꽃을 보고 날아드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맡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포도나무로 선택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요한복음 15장 5절에 뭐랬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에게 붙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느냐 하는 데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시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요한복음 15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 입니까?
5절 말씀을 보세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가지는 나무 안에 거하고, 나무의 수분은 가지 안에 흘러와서 거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생명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도 신앙을 떠나서 성품으로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열매는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힘입어서만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5절에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라고 했습니다.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라고 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9절에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주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 입니까?
그것은 나와 주님이 확실하고 분명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죄 많은 사람인지 스스로 시인하고, 애통하며, 회개하고,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은 여러가지 방면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실패를 통해서, 환난 을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귀한 예술을 통해서,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면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새생명으로 나게 됩니다. 가지가 나무 안에 붙어 있고 나무의 수분이 가지에 흘러 들어갈 때, 가지에서는 소원대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주 안에 사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슨 일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그것을 어떻게 당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는 죄인이지만, 내가 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주님의 능력이 뒷받침될 때 그 능력을 힘입어 주 안 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주 안에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나와 주님이 확실하고 분명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내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분명히 붙어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부활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께 붙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입니다.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 맡은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예식에 참여하고, 직분을 맡은 사람은 많은데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을 때, 아니 그보다도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막힘이 없이 교제를 하게 될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창조주이신 그 하나님,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정말 끊임없는 교제를 이루며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면 주님과 나 사이에 끊임없는 교제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과 교제하려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을 버리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삶을 깨끗하게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것, 주님께 인정받을 수 없는 것, 버려야 할 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요한복음 15장 1∼2절을 보세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벌레 먹은 가지는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가 깨끗해야 합니다. 벌레 먹은 가지는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태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 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 말씀을 보세요.
“나 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 는 것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신비한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구체적으로 날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 합니다.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는 버리고 내 삶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말씀에 참으로 순종하며 사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습니까? 불에 태워 버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어서 무엇합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경고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하 나님과 나 사이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내가 받은 영원한 생명을 이웃에게 전달해서 사람을 얻는 삶의 열매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왜 살고 있습니까?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다 백성이 열매 없는 포도나무처럼 되어 버린 원인이 어디 있습 니까? 유다왕국이 멸망한 배경을 연구해 보면 큰 도전을 받습니다.
그들은 한꺼번에 무너진 것 이 아닙니다. 서서히 멸망하는 쪽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들은 서서히 이방 나라의 행습을 닮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 이웃 백성들로부터 그 백성을 분리시켜 선민으로 삼으신 의도는 주변 나라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의 아름다움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열방들에게 이런 도전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이방 사람들의 행습을 서서히 닮아 갔습니다. 요샛말로 세속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과 같은 시대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든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렘 2:21)라고 말했습니다.
주변의 이방 열국들 가운데서 구별되는 포도나무가 되도록 하신 것,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많은 열방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불러 선민을 삼으신 것은 그들과는 다르 게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리어 이방 사람들처럼 악한 가지가 되어 악한 열매를 맺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딤후 3:1∼5)고 했습니다.
세상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돌아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귀한 포도나무로 삼아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고 계시는데
우리가 오히려 이방의 행습을 쫓아 그들처럼 악한 열매를 맺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된 지 몇 해나 되었습니까?
여러 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 라 우리 삶 속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통해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을 믿어 신앙 생활하면서 내 인격이 얼마나 주님을 닮았습니까?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렇게 될까 두렵습니다.금년 일년 동안 우리는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