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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허창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
요한복음 5 : 8 - 18
가장 고통을 느끼는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중병에 걸려 괴로울 때이겠습니까? 배고플 때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거나 죽었을 때이겠습니까? 아무도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 외로울 때이겠습니까? 중국 명나라에 왕양명이라는 유학자에게 사람들이 ‘인생에게 가장 고통을 느끼는 때가 언제이냐?’고 물었습니다. 왕양명은 ‘한가로움’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였습니다. 한가한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지 않을 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때라는 말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일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교도소 독방에 어떤 죄수를 가둘까요? 최악범입니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아무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형벌입니다. 지옥에는 일이 없습니다. 잠언 9:10에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한 환자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일하고 싶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7절에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만물을 지금도 다스리는 일을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이후로 일하지 않으신다면 창조한 모든 것은 자동 소멸되었든지 억망진창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리시므로 자연은 아름답고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시간도 없이 일하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셨고 하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큰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죄가 많아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세 가지 축복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일하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은 중노동입니다. 아이 하나를 낳고 키우기 위해 부모는 매달려 일을 해야 합니다.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다스리는 것 역시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일하는 것을 축복하셨습니다.
범죄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동식물들의 이름을 짓고 다스리는 일을 했습니다. 낙원에서 즐거움은 일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범죄 이후 고통과 수고로움을 더하므로 일하는 것이 고통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범죄 이전에 일하는 것은 축복이였습니다. 일하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유교사상에 귀족이나 양반은 일하는 것을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을 명하여 떡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여든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 시험의 본질은 일하지 않고 취하라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고 세계 복음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일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공짜로 얻겠다는 것은 범죄입니다. 불로소득은 복이 아닙니다. 로또 복권을 사는 것은 성도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당을 짓고 빚에 시달려 로또 복권을 사서 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설교 시간에 성도들에게 복권에 당첨되어 교회 빚을 갚자고 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권사는 돼지꿈을 꾼 날 복권을 샀는데 당첨이 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장립 집사는 돼지꿈을 꾸고 사람을 만나지 말고 복권을 사야 한다고 한 수 더 떠서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모셨던 장노님 한분은 퇴직금으로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서 망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연세가 일흔이였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찬송가 가사를 한 주간에 한 장씩을 암기하여 주일에 교인들 앞에서 암기를 하였습니다. 부산대학교 초창기에 사무총장을 지냈던 분이라 언제든지 낵타이에 정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김해 복음병원 청소 대행을 맡아서 10년 이상을 친히 청소를 했습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밥 한 그릇을 시락국에 말아 자시고 누구보다 제일 먼저 나와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그분 때문에 4시에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즉시 첫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때 손수 병실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화장실과 계단을 걸레질을 했습니다. 아무나 쉽게 하기를 꺼려하는 가장 낮은 자세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병원에서 나이 많은 분이라 그만두라고 할까봐 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연세가 많아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건강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수입도 생기고, 한겨울에도 냉수욕을 할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일하는 것이 복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은 일 자체가 힘들고 비참하게 여겨집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일은 인생의 의미요 보람입니다. 힘들게 자녀를 위해 키운 보람을 느낄 때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것 다 잊어버립니다.
러시아에 유명한 동화가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아버지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야겠는데, 게으르고 매일 잠이나 자고 놀기만 하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 줄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한 끝에 아들을 불러 ‘네가 스스로 노력해서 동전 한 잎을 벌어 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고민을 했습니다. 아들이 일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많은 돈도 아닌 동전 한 잎도 스스로 벌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편 몰래 동전 한 잎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주는 동전을 받아 ‘이 돈은 네가 번 것이 아니야’하고 벽난로 속으로 던졌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네가 일 해서 동전 한 잎을 벌어오라’고 했습니다. 다시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동전 한 잎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동전을 벽난로에 던져 버렸습니다. 엄마는 생각을 바꾸고 아들에게 ‘네가 스스로 벌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노력해서 동전 한 잎을 벌어서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한 잎을 받아 전과 같이 벽난로 속에 던졌습니다.
그때 아들은 벽난로 속으로 뛰어 들어 갈 듯이 하며 ‘내가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불속에 던지느냐’고 하며 아버지를 보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이 동전은 정말 네가 벌었구나’, 하며 안심하고 재산을 물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의 의미를 깨닫았다는 것입니다. 일을 해서 번 돈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은 공짜로 얻었기 때문에 가치를 모릅니다. 내가 땀 흘려 모은 재산이 내 삶의 보람이요 의미인 것입니다. 일해서 얻은 것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지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일해야 합니다.
요셉은 종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종이였지만 종처럼 일하지 않고 주인처럼 일을 했습니다. 농장에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주인은 애가 탑니다. 그래서 마칠 시간이 되면 일꺼리가 남아있어도 더 이상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일꾼들이 가고 난 뒤에도 어두울 때까지 불을 켜고서도 일을 합니다. 주인은 일꾼들보다 몇 배나 일합니다. 주인이 요셉이 일하는 것을 보고 가정 총리로 삼고 전 재산을 맡겨 관리하게 했습니다(창39:4).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요셉이 죄수로서 어떠했습니까? 죄수가 일하는 것은 채찍이 두려워 눈치를 봐가며 일하지만 요셉은 사명감에 일을 했습니다. 간수장이 보고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죄수이면서 전옥의 죄수들을 맡아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요셉은 종으로서, 죄수로서 주어진 환경에서 일의 의미를 찾고, 사명감으로 일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환경을 탓하며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사명감으로 일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법관을 지내셨던 분이 은퇴하고 부인이 경영하는 슈퍼에서 일한다는 기사가 보도된바 있었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는 법관으로 맡은 일을 하였지만 퇴직을 하고는 슈퍼에서 일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라서 톱뉴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법관이나 슈퍼에서나 일하는 즐거움을 찾은 것입니다. 환경에 따라 일의 의미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 기업에 중직으로 근무했던 사람이 실직되었을 때 아내와 두 딸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다 미수에 거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먹고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서울 강남에 고급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어진 환경을 비관하며 살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서울 탑골공원에는 356일 무료 급식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에 100-150여명이 보통이고 휴일에는 250-300여명이 찾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급식을 제공하는 원각사 스님이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급식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들도 노숙자들에게 급식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르웨이는 노숙자를 도우면 처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정부가 ‘반구걸법’을 만들겠다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보도되었습니다(2월6일).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노숙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가난한 자를 돕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앞장서서 노숙자를 위해 밥을 줍니다. 그러나 문제는 노숙자들에게 일하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정부가 노숙자들에게 일 할 수 있는 일터를 마련해 주어도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일하고 싶어도 일 할 곳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할 곳을 찾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생을 세상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기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이 세상에 출장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출장을 보냈다는 말은 사명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해야 하는 사명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의 일을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께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살펴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직분을 맡은 자들은 그 맡은 일을 해야 하지만 직분이 없을지라도 내가 할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했을 때 자신이 먼저 보람을 느끼고 다음으로 교인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해도 기도로 일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하루에도 두세 번씩 기도를 해 보세요.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먼저 기도하는 자신에게도 축복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도한 교회와 성도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므로 자신도 축복이 될 뿐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 모두가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