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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다른 이름으로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행했던 놀라운 복음전도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이지만 그 내면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성령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입장에서 ‘누가 이 일을 했느냐?’ 사도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누가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느냐?’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사람들이 수고로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뤄집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성령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첫 번째 교회박해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사도행전 3장에서 평생 하반신 마비로 살았던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일을 보며 신기하게 여기며 모여든 군중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 등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둡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일어난 첫 번째 박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축복을 받을 때 하던 것처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신학자 벵겔은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요한복음 16장 33절을 찾아서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리는 여덟 가지 복에 대해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교회가 가진 생명력은 이 세상에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받는 것을 인내하며 참아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교회가 겪는 첫 박해요, 환란이요, 시련입니다. 이런 시련에도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며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능력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 예수 이름을 의지하며 어떤 시련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 첫째는 세상이 가두어도 역사는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4장 3, 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사도들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말할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들”이란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말할 때에”는 앞 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을 그 때를 뜻합니다. 한창 베드로가 설교하는 중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 무리 중 ‘제사장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에 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 수비대의 우두머리를 뜻하고 성경 주석에서는 ‘수문장’ 혹은 ‘수호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경호실장’ 혹은 ‘경비실장’ 정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성전 맡은 자’는 대제사장 다음가는 높은 자리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두개인들’도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합리주의, 세속주의, 현세주의자’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세에만 관심이 있기에 종교를 통해 권력, 재산, 명예를 얻어 성전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레위지파 사람 중 한 부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도들이 설교하는 이 곳에 찾아온 이유가 뭘까요? 오늘 본문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여기서 “싫어하여”라는 말은 ‘분개하다, 흥분하다’라는 뜻의 말로 ‘심히 격노하고, 크게 불안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이 분개하고, 흥분하고, 또 불안하고 싫어했습니까? 첫째로, 사도들이 자신들의 교리와는 반대되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아주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였는데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하기 때문에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업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예수의 죽음을 사도들은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셨다고 예수 부활이 증거되니 그들은 신을 죽인 죄인, 메시아를 거부한 잘못을 범한 것이 될 수밖에 없기에 사도들을 잡았습니다.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제자들을 붙잡아 백성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사도들을 잡아 이튿날까지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제자들에게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남자만 따져봤을 때 약 5천 명의 구원받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을 심판할 때 밤에 신속하게 처리했던 것은 유대인의 전통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였던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밤에 심문이나 재판을 하지 않기에 일단 사도들을 붙잡아 성전 안 감옥에 두었습니다. 이들이 잡혀 끌려 간 곳은 당시 유대인들을 재판하는 최고 법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본 절에서 두 단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저희를 잡으매”와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라는 단어입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으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묵묵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는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잡혀 들어갔는데 오후 시간 성전에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 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 자림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 믿기로 결단한 남자의 숫자만 약 오천 명이 되었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전도하다 잡혀 갔으니 전도 받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말씀에 찔려 회심하고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투옥되었음에도 성령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들에게 역사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을 한 번 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초대교회 시대 ‘크리소스톰’이란 교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를 불러 “네가 예수를 믿어도 좋지만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란 얘기는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크리소스톰은 “그 얘기 말고는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황제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네가 기어이 내 명령을 거절한다면 너는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고 크리소스톰은 “나는 감옥에 백 번을 들어가더라도 이 복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크리소스톰은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얼마나 황제의 신하들이 황제를 찾아갑니다. “큰일났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쳐 넣으니 마음껏 기도하고 마음껏 성경읽고 연구하며 더 열심히 구원을 얘기할 내용을 찾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황제는 “그러면 흉악범들 속에 들여보내라”라고 명령하는데 신하들은 황제를 말리며 “그러면 더 큰 일이 날 것입니다. 흉악범들을 전도해서 감옥이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이 말에 황제는 “그러면 아예 죽여 버려라” 명령하는데 신하들은 곧바로 “그러면 크리소스톰이 순교당한 것으로 생각하며 온 시민이 예수를 더 믿게 될 것입니다. 순교는 저들의 영광입니다. 왜 저들에게 영광을 주는 것입니까?” 난감하나 황제가 신하들에게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라고 묻자 신하들이 “길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돈 보따리를 안겨주면 교만하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아주 자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방종하게 될 것입니다. 돈 보따리를 줘서 내보내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큰 돈 보따리를 안고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그 돈 모두를 교회에 헌금하고 맨손으로 전도하기 위해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신앙에 박해와 압제가 가해지면 질수록 수가 더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코 기독교는 박해한다고 진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부흥의 결과로 가져오게 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사도와 교회와 성도를 가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은 가둬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오늘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 둘째는 그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6, 7절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하기 위하여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최고 재판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관리들과 장로들, 서기관들뿐 아니라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까지 어머어마한 유대성직자들이 모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관원’이란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이고 ‘장로’는 원로로서 모세가 백성의 재판 처리를 위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부를 대표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집단입니다. ‘서기관’은 율법과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율법학자, 성경전문가를 지칭합니다. 여기 나오는 ‘대제사장 안나스’는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주후 7년에서 15년까지 공식적으로 대 제사장직에 있었던 인물이며 예수님의 십자가형 재판에 깊이 개입했던 은퇴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성전행정과 산헤드린 공회를 배후에서 조종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장인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실제적인 직무를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나오는 ‘요한’은 다른 역사기록본에 ‘요나단’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안나스의 아들로서 가야바의 뒤를 이어 주후 36년부터 대제사장을 맡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 기록된 ‘안나스’는 교활한 정치적 수완을 이용하여 로마 정부에 비위를 맞추며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을 사위와 아들까지 계속 물려주며 세속적인 영화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의 문중”이라는 표현은 성전에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들이 대제사장 집안이라는 명분으로 행정과 정치에 관여하고 결국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과 사도들을 심문하고 핍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이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사도행전 4장 7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사도행전 4장 7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런데 이 질문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매주 조금씩 살펴보고 있는 이 사도행전 강해 전에 살펴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칠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질문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받으셨을 때 바로 대답하시지 않고 그들에게 재차 물었죠.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 질문을 통해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베드로에게 묻는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슨 권세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느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 속에는 종교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권세로 병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른 신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므로 모세의 율법에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치적인 의미인데 ‘공회에 허락 없이 어찌 종교적 행사를 주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이 같은 일을 했으냐?”라는 질문은 이들의 입에서 예수의 이름이 나오고 예수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죄를 덮어 씌워 신성모독죄라는 누명을 씌울 계획으로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무슨 답을 하든 결국은 정죄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중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사도들이 그냥 잠잠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그냥 사도 요한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와 지금 이 시기는 다르고 심문 대상도 예수님과 사도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예수님을 부활의 주로 증거하는 중에 그들이 잡혀 왔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시작하며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인 사람들은 얼마 전에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도 그들이 사도들을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지금 재판받으며 협박을 받는 이 상황에서 성령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의 대담함, 자신의 경험, 자신의 웅변술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이 충만하여 베드로가 담대함을 얻고 성령이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람이 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강하고 담대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것 예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 셋째는 구원받을 만한 유일한 이름되십니다.
사도행전 4장 11, 12절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 베드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전날 있었던 일부터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앉은 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일을 들어 이 같은 일이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4장 9절에서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이라며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악한 일이나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라 40년 동안 걷지도 못한 앉은뱅이를 낫게 해 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라며 먼저 질문합니다. 또한 그 걸인은 이제 몸이 치유받음과 동시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인이 되었으니 영혼의 구원도 받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구원을 얻게 되었느냐?”라는 질문에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일’이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그 분’이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너희가 못박아 죽인 그 분을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그 분 예수 그리스도 이름만이 생명의 이름, 구원의 이름이라고 분명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유대 지도자들은 반발하며 사도들을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선포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부활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증거 때문입니다. 바로 평생 앉은뱅이 하반신 마비로 살다가 지금 일어나 걷고 뛰고 있는 사람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확실한 증거물을 제시한 것입니다. 재판의 승패는 확실한 증거에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 무식한 베드로였지만 복음의 핵심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버린 그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그 분이 예언된 메시아시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어가면서 사도 베드로는 시편 118편 22절의 말씀을 오늘 본문에 인용합니다. 오늘 본문은 읽었으니 시편 118편 22, 23절을 찾아서 함께 읽어볼까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구약의 시편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라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잘못된 건축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백성들 가운데 특별히 구별함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당시 성전을 맡은 제사장이나 말씀을 필사하는 서기관이나 구별되게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은 지상교회를 세울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교회 건축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보는 순간 ‘저 목수의 가문에서 난 아들이 어떻게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으며, 더구나 유다의 출신도 아닌 갈릴리 지방 출신이며, 그것도 촌 동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역사가 일어나겠는가?’라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4, 5절을 보실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산 돌이 되어서 우리가 예수님의 산 돌 위에 우리 신앙이 지어질 때 우리 또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는 이 한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유일성’ ‘구원의 유일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답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찾아서 같이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마다 교주가 있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자기가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공자도 싯타르타도 모하메드도 맹자도 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들의 도덕적인 가르침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인간의 죄를 책임지고 대신 죽어준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 다른 사람 대신 죽어줄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싯다르타, 공자, 모하메트’ 같은 이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다 죽고 무덤에 갇혀 있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죽어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숨질 때까지 신앙하고, 생명을 걸고 파수해야 할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존 스토트 목사님의 저서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신약 시대부터 현대 시대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 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향보다 더 큰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을 가르쳐 줍니다. 구원은 어떤 일을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을 만나야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이름을 믿고 따르며 어떤 이름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지에 달려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출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은 어떤 사건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신뢰하고 의지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에 완전한 영적 회복, 육적 회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오직 예수’ 내 존재의 의미도 예수, 내 구원도 예수, 내 삶의 모든 것도 예수, 예수로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참 구원의 백성으로 언제나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