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김 여 하
흔히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말로 인사치레로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러나 나는 그렇게 쉽고 당연한 ‘밥이나 먹자’를 길 가다가 만난 빈 깡통 차듯이 할 수 없다. 내가 먹어서 안 되는데 먹어버린 수많은 ‘밥’. 내가 먹고 싶었으나 못 다 먹은 더 많은 ‘밥’들의 하소연 때문에.
엎드려서 보던 세상을 서서 보니까 신기한 것이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많던 타박네는 젖도 곯았고 밥그릇도 얕았다. 친구들의 빚보증과 화폐 교환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신 아버지는 얼음장 같은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만 내쉬었고, 엄마는 냇가에서 죄 없는 서답만 방망이로 죽어라고 두드렸다.
가랑이 찢어지는 듯한 애옥살이는 언제나 끝날까 기약이 없었고, 아버지의 한숨소리와 친구들에게 다리아랫소리 하기가 빈 쌀독 긁는 것보다 지겨웠다. 어쩔 수 없이 엄마는 십리 길을 걸어 무태에서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니셨다. 그것으로 풋나물과 묵은 된장국에 넣고 끓여 식구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셨다.
송화가 지고 밤꽃이 향기를 흩날리던 어느 해거름 땅거미가 져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네 살 터울의 우리 네 남매는 엄마를 찾아서 등까지 붙은 배를 움켜쥐며 무태를 향해서 걸었다. 노을을 등에 지고 집집마다 굴뚝엔 하얀 저녁 짓는 연기가 가마밥솥의 뜨거운 김처럼 피어오르고 어느 집에선가 엄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함박꽃마냥 흩어졌다. 꽁치인지 고등어인지 모르는 생선 굽는 냄새와 함께.
무태에 도달했을 때는 거울 같은 달이 별보다 밝았을 무렵이었다. 걷다가 쉬다가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보고 “우리 엄마 어디 있어 예?” 했지만, 그들이 ‘우리엄마’를 그 나이보다 조금 더 늙은 아줌마를 어떻게 알까? 무태에는 금호강을 가로지르는 수백 보 길이의 일본말로 아르방 다리가 놓여 있었다. 기어이 사단이 난 건 구멍이 숭숭 뚫린 그 다리를 반쯤 엉금엉금 기다시피 건너던 작은누이가 “내사 죽어도 못 가겠데이.” 하며 대성통곡을 터뜨리고 털썩 무릎을 꿇은 뒤부터였다. 형은 싫다던 누이를 종주먹으로 윽박지르며 건너기를 종용하였지만, 고사리보다 조금 더 굵은 손가락으로 철판의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도살장가의 소처럼 다리를 부들부들 떨던 누이는 끝내 일어서지 않았다. 달은 가엾게 우리 정경을 내려 보았으나 강물은 나 몰라라 무심히 흘러가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영문 모르던 나는 작은누이 옆에서 덩달아 목청을 높여 울면서 형의 성화를 돋우고. 마침 지나가던 마음 좋은 분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다리를 되돌아온 우리 형제들은 백사장에서 그 동안의 노고로 강아지새끼처럼 고개를 처박고 백사장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피울음 우는 소쩍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이 깬 건 엄마의 등에서였다.) 밤이 이슥해서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아이들이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경아! 하이야!” 하고 아들들 이름만 부르며 이 골목 저 삽짝에 불이 났다. 온 동네를 소리 높여 우리 이름을 부르며 코고무신 신발도 잃어버리며 헤맸다. 누가 짜 놓았을까? 영화 각본처럼 우리를 다리에서 내려 주셨던 그 어진 분이 아이들이 있는 곳을 알려줘서 엄마는 나는 듯이 우리에게 달려 오셨다. 여전히 달은 밝고 소쩍새는 두견화를 찾아 울고.
그날의 여정이 힘들었던지 작은누이는 그 후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고무줄놀이를 놓치더니 공기놀이도 마다하고 나중에는 기어이 자리보전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헛기침 소리만 높이시고 엄마는 부엌에 밥이 끓든지 죽이 넘든지 막내딸 옆에 앉아 병 수발을 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동네 동무들과 매미 잡기, 잠자리 꽁지에 보릿짚 달기에 여념이 없었고. “하야, 옆집 창섭이 하고 놀지 마래이, 가 참 못 됐대이.” 하며 핼쑥한 얼굴로 걱정하던 누이. 그럼 난 고개도 들지 않고 “응” 하고 아버지 말씀처럼 대답만 잘하던 나. 옆방 아이들이 툇마루에서 입가에 밥풀을 묻혀가며 하얀 쌀밥 먹는 것을 보고, “아부지, 나도 이밥 한번 실컷 묵어봤으면.” 하고 애원하던 누이. 이제 아홉 살, 복숭아꽃보다, 살구꽃보다 오얏꽃보다 여리고 예쁘던 그 누이. 누이는 그 흔한 유행 감기로 약 한 첩 제대로 못 쓰고 눈을 감았다. 매미소리 멎고 감나무 가지가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늘어지던 어느 날 벌떡 일어나서 “어무이요, 머리 좀 빗어 주이소.” 라는 말에 다 나은가 보다 하고 뛸 듯이 기뻐한 엄마가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켜 주고 종종머리를 땋아 주었다. 식모살이 간 큰누이가 지난 추석 때 선물한 도투락댕기까지 머리에 묶어주었다. 하지만 누이는 이를 앙다물고 “엄마도 이젠 필요 없어.” 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 나쁜 년, 이 못된 년.” 하며 식어 가는 누이의 뺨을 야윈 손으로 갈기던 엄마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고, 맞은 뺨의 아픔도 못 느끼는지 한번 감은 누이의 그 별같이 초롱초롱 하던 눈은 다시 뜰 줄을 몰랐다.
생선 담는 가마니에 둘둘 감겨 나무지게에 얹혀서 묻힌 작은누이의 무덤은 경북도청 뒤 수도산 애기 무덤들의 발꿈치도 아니고, 밤늦게 바느질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나무관세음보살” 하던 엄마의 한숨 속도 아니고,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두 분과 만나 행복하실 아버지의 소 울음 가도 아닌, 죄 많은 탓에 땅에 남아, 아직도 흔들거리며 날마다 아르방 다리를 건너고 있는 나의 가슴속 어디쯤이 아닐까.
막내딸을 잃자 아버지는 더 이상 저자에서 버틸 기력을 잃으셨는지 고향으로 낙향하셨다. 향후 5년간 갚아야 할 일수 빚만 잔뜩 짊어지신 채. 아버지는 시골에서 먼 친척집의 머슴살이를 하셨는데 농한기인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러 십리 먼 길을 다니셨다.
산새들이 깃을 떨치고 둥지로 돌아오는 황혼녘이면 우리 형제는 마을 뒷산 마루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니, 아버지가 몰고 오는 그 순하고 큰 눈의 암소 목에 걸린 방울소리를 기다렸다. 아니, 아버지가 어깨에 메고 오는 ‘밥’을 기다렸다. 그 식어 터져 버린 ‘주먹밥’을. 때로는 콩가루로 묻힌, 때로는 찌들은 묵은 김장김치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당신께서 목이 말라서, 배가 불러서 못다 먹었다 하시던 그 ‘밥’들. 철모르고 좋아하며 아우와 나눠먹던 그 ‘밥’들.
개밥바라기가 질 무렵 산으로 향하여 식은 보리밥 몇 덩이와 짤아 터진 신 김치 몇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신 후 종일 끼니를 거르셨을 텐데, 그 먼 산길을 소를 몰고 또 지게 짐을 지고 허위허위 늦둥이 두 아들을 위하여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오셨을 아버지.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나는 월급도 한 푼 없이 밥만 얻어먹는 이발소의 머리 감겨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식당 보이, 다방 주방장 등 별별 일을 다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그야말로 도둑질 빼고 모든 일 하며.
타향살이가 너무 힘들고 지치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고향집을 찾았다. 때로는 하얀 대낮에, 어쩌다가는 별 총총한 밤중에. 그러면 고향집 개다리소반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밥’이 있었다.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엄마는 집 나간 식구가 객지에서 끼니를 굶지 않게 하려면 식사시간마다 그 사람 몫의 밥을 더 떠놓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끼니때마다 내 몫의 밥을 여분으로 지으셨던 것이다. 식으면 당신께서 드시고.
아직도 나는 늦깎이 공부 덕택에 학교 도서관 앞 수돗가에서 빈 배를 채운다. 지금은 하늘나라 어디쯤에서 예의 손때 묻어 반질거리는 가마솥에다가 내 더운밥을 짓고 계실 손 거칠고 맘씨 고운 우리 어머니. 언제나 엄마 곁에 가서 그 까끌까끌한 보리밥을 열무김치에 쓱쓱 비벼 꿀맛같이 먹어 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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