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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관 녀
김유신(金庾信)을 가리켜 ‘신라 천년사에 으뜸가는 명장’이라고 평한다.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강성한 기세에 눌려 기죽어 지내던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을 이룩한 데에는 김유신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유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영웅호걸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분별력이 미숙하고 의지가 나약한 소년시절, 술에 취하고 미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방황하던 청춘시절이 있었다.
젊은 김유신의 고민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망국 가야의 후예라는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대우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가야 왕족의 후손이고,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신라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가야 출신이란 이유로 좀처럼 신라 정계의 핵심부에는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법흥왕(法興王) 때에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이다. 가야의 왕손이지만 신분상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이 신라 17관등 가운데 1위인 각간(角干) 벼슬을 받은 데에 비해 그의 아버지 김서현은 3위인 소판(蘇判) 벼슬에 그친 것만 보아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만큼 신라 귀족사회에서 혈통에 따른 차별의 벽은 높았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평왕(眞平王)의 모후인 만호태후(萬呼太后)의 딸이다. 만호태후가 본남편인 동륜태자(銅輪太子)가 죽은 뒤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며 진흥왕의 친동생인 숙흘종(肅訖宗)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근친혼은 물론 근친상간까지 당연시하던 신라 왕족․귀족 사회에서 이렇게 정식 혼인에 의하지 않고 사통하여 낳은 아들딸을 사자(私子)․사녀(私女)라고 불렀다. 만호태후의 사녀인 이 김만명이 길에서 김서현과 눈이 맞아 야합한 끝에 김유신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김유신의 출생 설화는 이렇다.
어느 날 김서현이 길을 가다가 만명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저 아리따운 처자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사람들이 ‘김입종의 아들 숙흘종의 딸 만명’이라고 알려주었다. 첫눈에 반한 김서현은 줄기차게 구애한 끝에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김서현이 오늘의 충북 진천인 만노군의 태수가 되었다. 그때까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서현이 간도 크게 만명을 몰래 데리고 임지로 가려는데, 만명의 부친 숙흘종이 그제야 자기 딸이 김서현과 야합한 줄 알고 노발대발했다. 만명은 부친의 엄명에 따라 집안에 꼼짝 못한 채 갇히고 말았다. 바깥에는 건장한 사내종들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집 대문에 벼락이 떨어져 지키던 자가 놀라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사이에 구멍을 통해 집안에서 탈출한 만명이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 대문에 느닷없이 벼락이 쳤다는 것은 아마도 김서현이 애인을 구출하기 위해 대문을 때려 부수었거나, 숙흘종이 하늘의 조화를 핑계 삼아 신라 귀족들의 비난을 사지 않고 두 사람을 도망치게 하려고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명이 김서현을 따라 간 만노군에서 낳은 아들이 김유신이다. 또 <삼국사기>는 ‘김유신열전’에서 두 연인이 김유신을 잉태하기 전에 이런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전한다.
김서현은 화성과 토성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은 황금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스무 달 만에 김유신을 낳으니, 때는 진평왕 17년(595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딸 만명이 김서현을 따라 만노군으로 도망친 뒤 만호태후는 화를 풀지 않고 오래도록 서현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다가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그 아이가 잘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외손자가 보고 싶은 만호태후는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여 안아보니 과연 생김새가 영특한지라 “참으로 너는 나의 외손자로다!”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비로소 서현을 사위로 인정했다.
김유신은 자라면서 자신이 진평왕의 모후 만호태후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자신의 출신 성분이 신라 중앙 정계에서 아직도 정치적 세력이 약한 가야계였으므로 신라 왕실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김유신이 나중에 신라의 대표적 명장이 된 데에는 본인의 자질이 뛰어나고 힘써 노력한 덕분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를 잘 키워주고 이끌어준 양친 부모와 외할머니 만호태후, 그리고 유명한 선배 화랑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은인은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출세 이면에는 진정한 사랑을 희생한 한 가련한 여인의 희생도 숨어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천관녀(天官女)이다.
전설 가운데는 천관녀가 술을 팔고 웃음을 파는 천한 기생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다. 우리나라에서 기생이 생긴 것은 고려 때였으니 신라 중기에 기생이란 직업여성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관녀의 신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실 천관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다. ‘천’이 성씨도 아니고, ‘관’이 이름도 아니다. 끝의 글자 ‘녀’는 그저 여자라는 뜻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다. 천관녀는 신궁(神宮)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천관(天官), 즉 신관(神官)의 딸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무당의 딸이었다. 천관녀란 이름은 낙랑공주(樂浪公主)가 낙랑국 임금의 딸, 평강공주(平崗公主)가 평강왕의 딸이란 뜻과 같이 천관의 딸이란 뜻이다.
결과적으로 천관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은 그녀의 출신 성분에서 비롯되었다. 신라는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전까지는 조상전래의 종교인 무속을 신봉하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이 무교(巫敎)의 이름을 신도(神道) 또는 풍류도(風流道)라고 했는데, 원화(源花)에 이은 화랑도가 바로 이 풍류도에서 나왔다. 불교가 처음에는 많은 박해를 당했으나 이차돈(異次頓)의 고귀한 순교를 계기로 공인받게 된 이유도 알고 보면 이 신도의 위세가 그때까지는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신궁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9년(487년)에 시조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의 탄강지인 양산 기슭 나정 옆 내을(奈乙)에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거나 나라의 큰일을 고하거나, 또는 왕족들의 혼인을 치르던 성소(聖所) - 성전(聖殿)이었다.
당대 신라에서 사내 중의 사내는 화랑, 화랑 중의 화랑은 풍월주(風月主)였다. 김유신이 화랑이 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때인 진평왕 34년(612년). 사람들은 그가 거느린 낭도를 가리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용화란 불교에서 내세불(來世佛)인 미륵불이 출현하여 세우는 새 세상을 뜻하니, 김유신은 미륵불 사상을 화랑도 수련의 이상형으로 삼았던 것이다. 신라에서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한 것은 김유신이 화랑이 되기 72년 전인 진흥왕(眞興王) 즉위년(540년), 섭정을 맡은 진흥왕의 모후 지소태후(只召太后)의 명에 따라서였다.
화랑 김유신이 제15세 풍월주가 된 것은 18세 때였다. 그리고 그 해에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명에 따라 장가를 들었다. 신부는 제11세 풍월주를 지낸 김하종(金夏宗)의 딸 영모(令毛). 하종은 진흥왕의 이복동생인 김세종(金世宗)과 화랑도의 대모(代母)라고 할 수 있는 미실궁주(美室宮主)의 아들이다.
김유신이 천관녀를 만난 것은 영모와 혼인하기 전이었다. 유신은 진평왕 즉위 전에 황음무도하다는 이유로 폐위당한 진지왕(眞智王)의 아들 김용춘(金龍春)과 친밀하게 지냈고, 용춘의 부탁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아홉 살 어린 그의 아들 춘추(春秋)의 후견인이 되었다. 김유신은 왕족인 김용춘 부자와 함께 낭도들을 거느리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날 내을신궁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천관녀를 만나서 첫눈에 반했던 것이다.
유신이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용화향도를 버려둔 채 중악 산중에 입산했다가, 다시 인박산 석굴에 들어가서 3년 동안이나 홀로 수도하게 된 것은 오로지 천관녀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김유신과 천관녀는 하루도 못 만나면 죽고 못 사는 뜨거운 사이였다. 한 번 불붙어 타오르기 시작한 청춘의 불길이 너무나 뜨거워 아무도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낭도들과 함께 수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관녀의 집으로 달려가 황홀한 시간을 보낸 뒤에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날도 유신은 천관녀와 더불어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쁜아! 니는 내가 좋노?”
“하모요! 억수로, 억수로 좋아예!”
“그럼 이리 가까이 와 보그레이. 한 번만 더 안아보구로.”
“아하잉, 내사 몰라예! 공자님은 지가 어디가 좋은데예?”
“으흐흥, 내도 마 모린다카이! 니가 어디 한 군데만 좋으면 우찌 내가 니한테 한눈에 반했겠노, 그자?”
“아하잉, 간지러버예! 거기는 만지지 마이소! 그라고 공자님예?”
“와?”
“언제까지나 공자님만 모시고 살고 싶어예! 그라니까 소녀가 나중에 미워지더라도 제발 버리지 말아주이소, 야?”
여자들은 본래부터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비상한 법이 아닌가. 천관녀도 일찍부터 무슨 수상하고 불안한 낌새를 챘던 것은 아닐까.
“하이고 귀여분 것!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이쁜 니를 내사 마 우찌 버릴 수 있단 말이고? 그런 씰 데 없는 소리는 연습으로도 하지 말고, 꿈속에서도 하지 말거레이. 알았노? 니 내를 그렇게도 몬 믿겠나?”
“그 말씸이 정말이지예? 믿어도 좋지예? 나중에 다른 말씸 하시기 절대로 없깁니더?”
“하모, 하모! 내 이렇게 굳게 도장을 찍고 약속하꾸마!”
“만약에 공자님께서 지를 천하다꼬 버리신다면 지는 그만 칵 죽어삐릴랍니더!”
“어허, 알았구마! 니는 그저 내만 믿으면 된다카이!”
그러고 나서 유신은 약속의 도장을 찍는 대신 맹세의 뜻으로 천관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쪽! 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모른 채 유신은 천관녀와 더불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질탕하게 놀다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때 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고구려를 막기 위해 중동부전선에 나가 있었고, 집에는 어머니 만명부인과 세 살 터울인 아우 흠순(欽純), 그리고 훨씬 나이 어린 보희(寶姬)와 문희(文姬) 두 누이동생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이 말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서니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리던 어머니 만명부인이 불러 앉히더니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맏아드님. 인자 오십니꺼? 온종일 가시나와 꼭 붙어서 재미있게 노시느라꼬 얼매나 노고가 많으셨능교?”
전에 없이 빈정대는 어머니의 말씀에 유신은 술이 일시에 깨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한 채 꿇어앉아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이렇게 꾸짖었다.
“니는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다꼬 이 에미를 무시하는 기가?”
“어데예? 잘대로 아입니더!”
“니도 잘 알다시피 너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가야 출신이지만 여러 차례 고구려와 백제군을 물리쳐 나라 안에서 유명한 장수가 되지 않았노? 이 에미는 니가 하루빨리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는 걸 보고 죽는 기 소원이구마. 내사 더 늙으면 니한테 의지하고 살아야 할 낀데 요즘 니가 하고 댕기는 꼴을 보문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으니 장차 이 일을 우짰으면 좋겠노? 니는 저 어린 동생들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노? 에효, 이 일을 장차 우야꼬!”
“어무이예! 갑자기 무신 말씸을 그렇게 심하게 하십니꺼? 지가 뭐 우쨌다꼬예?”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캤는데 내사 마 모릴 줄 알고 오리발을 내미나? 니가 요즘 신궁의 천한 가시나한테 폭 빠져갖고 죽고 몬 사는 사이라고 소문이 짜하게 났다 아니가? 그럼 이 에미는 눈뜬 봉사에 귀머거린 줄 알았드나? 한심해라 한심해! 내는 밤낮으로 니가 가문을 빛내기만 바래고 있는데 니는 가시나 궁디(궁둥이)에 쏙 빠져갖고 무골충이처럼 팔다리가 흐물흐물해서 다니고 있으니 기맥힌 노릇이 아니고 뭐꼬?”
그러더니 어머니는 마침내 치맛자락을 들어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유신이 국면 전환을 노리고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다.
“어무이예, 지 나이도 인자 열다섯 살이나 됐으니 고마 장가를 보내주이소! 지는 그 처자를 색시로 삼고 싶어예!”
“택도 없는 소리!”
“?”
“니는 이자 아무 여자하고 함부로 혼인할 수 없는 기라!”
“우째서예? 서로 마음에 들어 정을 주고 사랑하면 되는 기지 우예 혼인을 몬 해예? 지는 그 처자를 가시(아내)로 삼기로 하마(벌써) 약속을 했어예.”
“안 된데이! 니 색시가 될 처자는 하마 정해져 있는 기라! 영모란 아가씬데, 대왕폐하께서 끔찍하게 총애하시던 미실궁주의 손녀딸이라카더라. 그 처자하고 혼인해야만 니 앞길이 훤하게 열릴끼구마. 인자 알아듣겠나?”
”그라문 오로지 출세를 위해서 사랑을 희생하란 말씸 아닝교?“
“해석은 니 맘대로 하고… 좌우간 앞으로 그 처자는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된데이. 알아들었나? 만일 이 에미 말을 거역한다면 니캉 내캉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그레이, 내사 더는 말하고 싶지 않구마! 그만 니 방으로 건너가보그라!”
“어무이요, 그렇게까지 말씸하시니 지도 더는 드릴 말씸이 없어예! 무조건 어무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네예. 이자부턴 정신 바짝 채리고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 되겠심더. 어무이예, 내일부턴 안심하고 지켜봐주이소!”
“오냐 오냐, 참 잘 생각했다! 과연 우리 아들 유신이답구나!”
그날 밤 유신은 그렇게 어머니한테 맹세를 하고 정말로 다음 날부터는 천관녀의 집에 발길을 뚝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낭도들과 더불어 산으로 들로 누비고 다니고, 또 멀리 바닷가도 찾아다니며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수련하는 데에 온 힘과 정성을 다했다.
유신이 그렇게 갑자기 소식 한 마디 없이 발길을 끊어버리자 천관녀는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 어디 병이라도 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걸까. 그렇게 며칠을 혼자서 끙끙 애를 태우면서 사랑하는 님을 기다렸으나 이미 변심하고 발길을 돌린 화랑 김유신은 다시는 그녀의 품으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천관녀는 먼발치에서 그리운 유신의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에 그의 집 근처로 찾아가보기도 하고, 용화향도들이 수련하는 곳을 물어 물어서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유신은 본 척도 하지 않았고,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날과 다달이 흐르는 물살, 시위를 떠난 날살처럼 인정사정없이 흘러갔다. 유신이 발길을 끊은 지 이미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리움에 겨워 열병이 난 천관녀는 수십 차례나 여종을 시켜 유신의 집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그의 집에서는 편지를 받아주지도 않고 계속해서 여종을 쫓아 보냈다. 그리고 나중에는 또다시 이 따위 편지를 가지고 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리겠노라고 위협까지 했다.
아아, 이 일을 장차 어쩌면 좋을꼬! 천관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저 그리움과 괴로움을 죄다 잊고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날이었다. 그날도 천관녀는 마당을 서성거리며 혹시나 님이 오실까 하염없이 애태우며 유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서산 너머로 떨어지고 사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씨! 저기 좀 보세요!”
하는 여종의 놀란 외침소리에 천관녀는 번쩍 눈을 뜨고 대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님, 꿈에도 그리던 화랑 김유신이 마상에 올라앉은 채 대문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이고, 내사 마 못 산다카이!”
천관녀는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허둥지둥 문밖으로 달려 나가며 기쁨에 겨워 마구 부르짖었다.
“하이고, 내 사랑하는 공자님! 유신 화랑님! 마침내 돌아오셨네예!”
“그동안 우찌 소식 한 마디 없었능교?”
“내사 마 얼매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아능교?”
“대답 좀 해보이소!”
쉴 새 없이 푸념을 연발하며 천관녀는 유신에게 달려가 말고삐를 잡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김유신은 말 위에 올라앉은 채 졸고 있었다. 술이 얼마나 취했는지 말 등에 앉은 채 잠이 드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유신이 고삐를 당겨 방향을 지시하지 않고 꾸벅꾸벅 졸기만 하자 애마가 알아서 옛 연인 천관녀의 집으로 주인을 데려다 준 것이었다.
“어마마! 자면서 말을 타고 오시다니! 참말로 우리 공자님은 재주도 용하시네예!”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이었다. 천관녀와 여종의 호들갑에 잠이 달아나 정신을 차린 유신이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천관녀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흔들면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을 꾸짖었다.
“예라, 이 천하에 못난 짐승아! 아무리 말 못하는 미물이라지만 이렇게도 주인 맘을 몰라줄 수가 어데 있노 말이다!”
그렇게 버럭 소리치더니 허리에서 장검을 빼어들었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애마의 목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끔찍한 광경에 천관녀와 여종은 꺄악, 꺅! 비명을 내질렀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그렇게 말의 목을 친 유신이 값비싼 은안장도 내버려둔 채 온다 간다 말 한 마디 없이 몸을 돌이켜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공자님예!”
“보이소! 우찌 그냥 가십니꺼?”
천관녀와 여종이 뒤따라가며 아무리 애달프게 목 터지게 소리쳐 불렀지만 유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천관녀는 그만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서러운 통곡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김유신이 마지막으로 천관녀를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유신은 크나큰 충격에 넋을 놓고 드러누운 천관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다시는 니 앞에 나타나지 않을라꼬 작정했지만, 사내대장부가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옹졸한 짓 같기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라꼬 이렇게 찾아왔데이.”
천관녀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아 서글프게 웃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자님, 속으로 조마조마 걱정하던 일이 기어코 터졌네예! 우리 사랑이 결국은 이렇게 끝나고 마네예! 우리 인연이 겨우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 모양이지예?”
“내사 입이 열 개라도 니한테 할 말이 없데이. 부모님께서 이미 내 혼처를 정해놓았으니 어쩔 수가 없게 됐지 뭐꼬!”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여쭤보겠어예. 그렇다면 첩의 자리라도 좋으니 이 년을 데리고 가실 수가 없으신지예?”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유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조건 미안하구마! 인자는 내 힘으로 어쩔 수가 없데이! 니 행복만 진심으로 빌어주꾸마!”
“내한테 행복하라꼬예? 버림받은 천한 년에게 무신 행복이 찾아올낀데예? 빈 말씸이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씸은 거두어주이소! 첩으로 데리고 살라캐도 지체 높으신 본부인 눈치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지예?”
“…”
“으흐흐흑… 잘 알겠십니데이. 이해하겠십니데이. 이 년이야 말로 공자님의 출세와 무한한 행복을 아낌없이 빌어드리지예! 궁주(宮主)든 전주(殿主)든 지체 높으신 처자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아보이소! 하이고, 내 팔자야!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캤는데, 이 년의 눈에 무신 귀신이 씌워서 결국은 이 꼬라지로 버림을 받아야 하노 말이다! 하이고, 서러버라! 하이고, 내사 마 몬 산다카이! 어엉엉…”
천관녀는 설움에 못 이겨 통곡하다가 마침내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유신이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달랬다.
“니를 두고 가는 내 가심도 천 갈래 만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하구마! 그만 울거레이. 비록 이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지만도 내 늘 니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어주꾸마!”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거짓뿌리 말씸은 하지도 마이소! 내는 인자 아무 것도 필요없십니더! 이제 더는 추잡시럽게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을낍니더! 맘 편히 훨훨 날아가보소! 그라고 장래 유명한 장수가 돼서 나라에 꼭 필요한 큰 인물이 되시기 바랍니더. 아이고, 내 팔자야! 우찌하여 내는 이렇게 천하게 태어났노? 앞으로 내는 우찌 살라꼬? 아이고 서러버라! 으허허헝, 으흐흐흑…”
아무 말도 더 필요 없었다. 유신은 한없이 흐느껴 우는 천관녀를 방안에 두고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곁을 영영 떠났다. 그날 이후 서라벌에서 천관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도 사라졌다.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 79세에 노환으로 죽었는데, 죽기 얼마 전이었다. 늙고 병든 김유신은 종복들의 부축을 받으며 옛날 옛적 자신의 앞날을 위해 희생시킨 첫사랑 천관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무상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녀의 집은 이미 잡초 무성한 폐허로 변해 쓸쓸한 바람만 불어대고 있었다.
김유신은 그 집터에 천관녀의 명복을 비는 난야(蘭若:절)를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 난야의 이름을 천관녀의 원찰(願刹)이란 뜻에서 천관사라고 지었다.
<끝>
작가의 말
천관녀와 헤어진 김유신은 영모와 혼인을 하고, 풍월주가 되었으며, 작은 누이 문희를 김춘추의 첩으로 주어 신라 왕가와 혈연관계도 맺었다. 문희는 곧 정실부인이 되었는데, 나중에 김춘추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함에 따라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된다.
어쨌거나 김유신이 무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역시 전쟁터였다. 진평왕 51년(629년), 34세 때였다. 그해 8월에 벌어진 낭비성전투에서 적장의 목을 베는 수훈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압량주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644년)에는 소판으로 승진했다. 그해 9월에는 상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크게 이겼다.
선덕여왕 16년(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 공로로 명성이 더욱 높아지고 마침내 군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해에 선덕여왕이 재위 16년 만에 죽고 신라 왕실에서 남녀를 통틀어 마지막 성골(聖骨)이며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뒤를 이었다. 진덕여왕은 이찬 김알천(金閼川)을 수상인 상대등에 임명했지만 실권은 이미 이찬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진덕여왕 3년(649년) 8월에 백제군이 쳐들어왔을 때 김유신은 백제의 장수 10명과 군사 8천 980명을 죽이고, 100명을 생포했으며, 말 1천 필과 갑옷 1천 800벌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은 이 대목에서 또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좌평은 백제에서 으뜸가는 관직으로 장관급인데 그가 1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주어 돌아가게 했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김유신 한 사람의 힘만으로도 백제와 고구려를 능히 멸하고 이른바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엇으련만, 어찌하여 그 숱한 당나라 군사의 힘을 빌려야만 했을까. 그런데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인 654년 3월에 죽었는데, 성골의 대가 끊어져버렸으므로 진골인 이찬 김춘추가 뒤를 이어 즉위하니 곧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은 즉위 이듬해에 60세의 김유신에게 자신의 셋째 딸 지소(智炤)를 아내로 주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지소부인에게서 5남 4녀를 낳았다고 한다. 지소부인의 어머니는 바로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이니 지소는 외삼촌에게 시집간 셈이다.
무열왕 7년(660년)에 김유신은 문무백관의 으뜸인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망국 가야의 왕손이 마침내 신라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은 백제를 정복한 공로로써 대각간(大角干)에 올랐다. 당시까지 신라 최고의 벼슬은 각간이었는데, 각간으로도 모자라 대각간 벼슬을 만들어 김유신에게 내린 것이다.
무열왕이 그 이듬해인 661년 6월에 재위 8년 만에 59세에 죽자 태자 김법민(金法敏)이 즉위하니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다. 문무왕 4년(664년) 정월. 70세가 된 김유신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문무왕은 궤장과 안석을 내려주고 그대로 조정에 출사하게 했다. 4년 뒤에 고구려가 망하자 문무왕은 논공행상을 통해 일등공신인 김유신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 벼슬을 내렸다. 대각간이란 신라 최초․최고의 벼슬에 ‘태’자 한 자를 더 보태주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진정한 영웅호걸인가, 출세를 위해 가냘픈 여인을 짓밟은 비정한 사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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