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너무나 사랑한 퇴계(退溪)선생은 그냥 매화라 하지 않고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이라는 존칭으로 대하였다.
그리고 이 매화와 함께 퇴계를 이야기 할때는
늘 떠오르는 한명의 여인이 있는데 단양의 관기 두향(杜香)이다.
☞ 1000원권 지폐와 도산서원의 이야기
도산서원(陶山書院)은 경북 안동 도산면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도산서원을 일반 대중들께 가장 널리 알려 준 것이 바로 1000원권 지페인데
구 1000원권 지폐 뒷면의 그림이 바로 도산서원 풍경이다.(위 그림 참조)
도산서원은 퇴계가 말년에 내려와 후학들을 가르치는 조그만 서당(도산서당)이었는데
이것을 퇴계 사후에 선조의 명으로 증축하고 고쳐지어 서원으로 만든 것이다.
위 지폐를 보시면 상단의 THE BANK 에서 BA 글자 밑에 나무가 한그루 보이는데
이 나무가 이 도산서원을 상징하고 퇴계선생을 기리는 수령이 400년 쯤 된
회화나무(아래 본문 사진 참조) 였다. 이것이 지난 2001년에 말라 죽어 버렸다.
그 반면에 아래 WON 이란 글자 위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있는 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금송(아래 본문 사진 참조)이다.
그런데 이 금송이 바로 일본에선 일왕을 상징하는 왕궁의 조경수라는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그 뒤 뽑아 버리니마니 말들이 많았는데
현재는 키가 더욱 커져서 싱싱하게 아직도 그자리에 자라고 있다.
이 1000원권은 이후
2006년에 새롭게 도안이 되고 크기도 줄어든 새 지폐로 변경 되었다.
회화나무를 말라 죽게 만들었다고 안동시청 공무원들이 굉장히 시달렸는데
지폐가 바뀌고 나서는 그 그림이 보이지 않게 되어 원성이 많이 줄어 들었다는 후문이다.
신권의 앞면에는 조선 최고의 교욱 기관이었던 명륜당과 퇴계가 그리 아끼던 매화가 20포기 정도 그려져 있다.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고 하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1000원권 지폐는 크기도 줄어 들었고
그 도안이 바꿨는데 지금 사용 중인 지폐의 뒷면에는 이제 도산서원의 실물 그림은 없어지고
겸재 정선의 말년 작품인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실려져 있다.
이 그림은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이란 서화첩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황과 송시열의 호인 퇴계와 우암을 선생으로 기리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 계상정거도는 퇴계가 죽고
177년이 지난 다음 겸재 정선이 71살의 노년에 그린 그림이다.
아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물가에 있는 정자 같은 건물속에 한 선비의 모습이 보이는데(바로 아래 그림)
이 선비의 모습이 바로 퇴계 이황이다.
겸재 정선은 그림책에서 이 장면을 설명 하기로
퇴계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집필하는 장면이라 설명하고 있다.
주자서절요란 주희(朱熹)의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
문인지구(門人知舊)와 주고받은 서찰(書札)을 뽑아 엮은 서간선집(書簡選集)으로
기대승(奇大升)이 간행한 책이다.
퇴계의 대표작인 주자서절요를 짓고 있는 이때 퇴계의 나이는 58세.
따라서 아래 그림에 보여지는 선비는 퇴계이며 이때 나이는 58세라는 추론이 가능하여 진다.
근데 이 지폐가 발행되고 나서 위의 그림을 가지고 논란거리가 생겼다.
위의 그림이 계상정거도인 것이 확실하고 이 그림의 설명으로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짓고 있는 장면이라면
이때는 도산서원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가 된다.
그리고 위 그림의 내용대로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집필할 당시 퇴계가 있던 곳은 계상서당(溪上書堂)이었다.
계상서당은 도산서당이 세워지기 전 퇴계가 세운 서당이다.
도산서당과는 조그만 야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전혀 다른 위치의 장소다.
근데 문제는 이 계상서당이 초가였다는 것이다.
그림에서 퇴계가 앉아 있는 곳은 초가가 아니고
그림의 전체적인 풍경도 계상서당보다는 지금의 도산서원과 너무나 흡사하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도산서원으로 지목을 하게 된 것이다.
즉,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집필한 곳이 계상서당이 분명한데 그림은 도산서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은행에서도 처음에는 도산서원이라 했다가
뒤에 시대상 맞지 않은 오류를 지적하자 계상서당으로 말을 바꾸었다.